[김경희 작가의 추억의 뜰] 인생은 광야학교―김영숙 어르신(1941년~)

김경희 작가 승인 2020.09.10 16:26 | 최종 수정 2020.11.11 16:31 의견 0

작은 거인, 김영숙 어르신.

열 살의 조그만 여자아이와 여든의 어르신은 한결같았다.

소용돌이치는 인생의 파도위에서 담대하고 의연하게 순항의 닻을 내리고 계신다.

아버지의 큰 꿈, 더 큰 가족의 고통

‘솥에 삶을 것들’

그랬다. 우리는 솥에 삶을 것들이었다. 줄줄이 다섯인 딸들이 아버지 눈에는 언제나 가시였던지 아버지는 줄곧 우리를 솥에 삶을 것들이라고 하셨다. 어디서 비롯된 아버지의 증오였는지는 몰라도 아버지를 비난하지 않았고 오히려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지 않으려는 노력이 나를 성장시키는 기회가 되었다.

아버지 김시호 씨의 셋째 딸로 10살 때 6·25를 만났다. 고향은 산 좋고 물 맑은 청양군 목면이다. 3학년 때 6·25 전쟁과 만났으니 그 때의 삶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전쟁 난리 통에 어린 시절을 보낸 동년배들의 아픔과 사뭇 다르지 않았다. 남들보다 좀 더 힘들었다면 딸들에 대한 아버지의 끝을 알 수 없는 증오를 매일 견뎌야 하는 고통이었다. 김 씨네는 유난히 딸이 많았다. 명절 때 다들 모이면 여기저기 댕기머리 계집애들만 보여 어르신들이 한숨을 푹푹 내쉴 만큼 아들이 귀했다. 아버지는 솥에 삶을 것들이라는 무시무시한 말로 딸들에 대한 불만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셨다.


신식양반이라 시골에서 농사짓는 생활로는 만족할 수 없는 분이셨다. 줄줄이 딸들을 향한 아버지의 분노는 어디서 온 것일까? 잘살고 싶었고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군림하고 싶으셨다. 딸 다섯이 아닌 아들 다섯을 양옆에 끼고 큰소리 치고 싶으셨다. 그때는 다들 그만큼이 인식의 한계였다. 하지만 난 포기하듯 인생을 흘러가는 대로만 지켜보고 싶지 않았다. 공부를 너무 하고 싶었지만 학교에 다니는 건 엄두도 못 냈다. 많은 식구가 밥도 제대로 못 먹는데 학교는 꿈도 못 꿀 일이었다. 배움에 대한 열망이 나이 들어서도 일기를 쓰게 하는 시작이었다. 간간이 아이들과 떠난 가족 여행지에서도 종이만 보이면 펜을 꺼낸다. 순간의 생각을 메모하는 습관은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요즘 아이들은 공부해주는 게 벼슬인 양 한다. 도처에 공부할 기회가 있지만 아이들은 귀한 줄 모른다. 굶주리고 갈증이 나봐야 간절하게 된다.


친정아버지는 요즘말로 한량 같은 분이었다. 술 좋아하시고 큰 돈 버는 일만 관심이 많으셨다. 어디 우리 아버지뿐이겠는가. 당시를 살았던 우리네 아버지들은 힘든 오늘, 희망이 안 보이는 내일을 탓하며 술로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온전히 감내해야하는 그 어머니들의 고초는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배포가 크고 머리가 좋은 분이라 떵떵거리며 살고 싶으셔서 농사를 지어도 벼농사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그건 소인배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생각하셨다. 약초를 심고 병아리 부화장을 하셨다. 작은 것의 소중함보다는 한 번에 큰돈을 벌어보려는 마음이 훨씬 크신 분이었다. 그 시골에서 지천에 널린 것이 약초뿌리 인데 누가 약초를 사 먹을 것이며, 부화장 유지는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그것도 모자라 대파는, 온 밭에 잔뜩 심어놓고 판로를 개척하느라 종일 진땀을 빼셨다. 자기 밭에서 한 뿌리 두 뿌리 심어서 먹지 누가 시골에서 파를 사먹을까, ‘택사’라는 약 뿌리도 심으셨는데 역시 판로가 없어서 실패로 돌아갔다.

아버지의 야망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인조 직조공장, 공주 유구와 신풍에 직조공장이 있었는데 아버지는 욕심이 나서 아예 집에 기계를 갖다 놓고 사업을 하셨다. 더군다나 기술이 필요한 일이라 기술자를 불러다 놓고 일을 했다. 변변치 않은 시설에 기술자까지, 당연히 돈이 될 수 없는 구조였다. 끊임없이 사업을 펼치며 실패를 거듭하셨다. 어머니의 만류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으며 아버지를 말릴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거듭되는 실패로 살림살이에 구멍이 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초조해지기 시작했고 어머니께서 아버지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으려 애써 참고 참다 한마디씩 아버지께 건네는 말씀은

“여보 쌀이 없어요.”

아버지는 두말도 안 하셨다. 바로

“굶으면 되지.”

아, 이런. 어머니의 애원 섞인 하소연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땔감이 필요하면

“여보 나무가 없어요.”

아버지는 또 거침이 없으셨다.

“해다 떼면 되지.”

어머니의 하소연에 돌아오는 아버지의 대답은 너무나 무책임했다. 딸들은 다들 여자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죄인이라 우린 불평도 불만도 할 수 없었고 남동생은 어려서 집안 돌아가는 정황을 알 수가 없었다. 지독한 가난이 싫었지만 난 그래도 딸 노릇을 하고 싶었다. 아니 고생하는 어머니를 생각하면 나라도 어머니의 짐을 덜어드려야 했다.


고단했던 시절, 방년 16세

1950년대 후반 산은 온통 벌거숭이 산이었다. 땔감으로 다들 벌목을 해가서 깊은 산속까지 들어가야 제법 나무를 해올 수 있었다. 장정 있는 집들이야 가능하지만 우리 집처럼 딸 많은 집은 산에 오르는 것도, 나무를 해서 짊어지고 내려오는 것도 다 고역이었다. 변변한 장갑이 있는 것도 아니라 그냥 맨몸으로 산에 올랐으니 겨울이면 찬바람에 손등이 트고 나뭇가지에 여기저기 긁혀 손이 부르튼 건 예사였다. 게다가 산속은 일찍 어두워져서 알 수 없는 공포와 싸워야 하는 그 길도 너무 무서웠다. 어디선가 갑자기 산짐승이라도 나타나면 그 자리에서 잡아먹힐 수도 있다. 어찌 보면 목숨 걸고 올라가는 산길이었다. 등에 나무를 짊어지고 내려오는 길은 왜 이리 멀고 험한지…. 내려와도 내려와도, 집은 보이지 않고 눈물도 말라버렸다. 등에 얹힌 나무가 주는 무게에, 보이지 않는 삶의 무게까지 더해져서 내 등짐은 허리를 펼 수 없게 만들었다. 세상살이가 만만치 않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된 것이 그 때쯤이었다.

눈물을 머금고 다니던 산길이었다. 악착같이 잘 살고 싶다는 오기는 그때부터였는지도 모른다. 삶에 대한 갈증은 더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충족되지 못해 애가 탔지만 푸념만 하고 있지 않았다. 난 어쨌든 내 주어진 일에 온 힘을 다했다. 작은 몸으로 산에 올라 나무도 낑낑거리며 제법 해 날랐다. 그땐 그래봤자 열 살이 조금 넘었으니 일찌감치 철이 들고 말았다. 어린마음에 참 속상했던 것은 할아버지는 산을 갖고 계셨는데 그 산에서 우리는 나무를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큰 아버지만 아들 대접을 받고 다른 자식들은 홀대를 받았던지 우리는 그 산에서 나무라도 할라치면 눈치를 봐야했다. 밤 한 톨도 건드리지 못했다. 너무 억울하고 속상했지만 맞대응할 힘도 없고 그럴 수도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기가 찰 노릇이지만 남자 중심의 사고방식, 거기에 큰 아들에 대한 무턱댄 기대, 모든 여건들이 여자들의 고단한 삶을 위해 준비된 것처럼 열악한 시대였다. 지금 여자들은 그렇게 살라고 하면 다들 아우성에 ‘나 죽겠소’ 할 것이다. 다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고생한 우리 어머니 세대와 우리 세대가 남긴 유산이다. 그렇게 유년을 보내며 나는 다시 아버지의 조수로 일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방앗간을 시작하셨다.

방앗간 집 조수, 김 씨네 셋째 딸

언니들은 시집가고 동생들은 공주에 나가있어서 방앗간은 온전히 내 몫이 되었다.

열여섯, 아버지의 조수가 되어 방앗간 일을 돕게 되었다. 발통기를 들고 집집마다 다니며 벼를 쪄주고 삯을 받아왔다. 쇳덩이가 무겁기는 얼마나 무거운지 소리는 기차 화통을 삶아 먹었나 어찌나 큰지. 눈썰미가 좋아서 기계도 알려주면 남자 못지않게 잘 다뤘다. 그래서 어쩌면 사서 고생했는지도 모른다. 차라리 할 줄 모르면 난 그냥 꾸지람은 듣더라도 몸은 편했겠지. 하지만 고생하시는 어머니 생각에 그리고 아버지를 도울 사람이 나밖에 없다는 생각에 다다르자 끓어오르는 책임감이 작은 몸으로 발통기를 들고 이집 저집 다니게 했다. 조그만 여자애가 발통기를 돌리는 모습에 사람들은 다들 신기한 듯이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하지만 난 부끄러운 것도 잠깐,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멈추자 남들의 시선은 다 거추장스러웠다. 문제는 발통기가 고장 났을 때다. 잘 돌아가던 발통기가 어느 날 갑자기 멈추면 그날은 보통 난감한 게 아니다. 그 진땀 빼는 날이면 난 발통기를 들고 공주 가는 버스에 오른다. 무거운 것을 들고 터덜거리는 시골버스 안에서 얼굴로 흘러내리는 눈물인지 땀인지 모를 끈끈한 물기가 나를 또 의기소침하게 만든다. 버스에 내려 기계를 고치는 집으로 찾아가, 손을 보고 다시 버스에 오른다. 무슨 마음으로 열여섯 어린나이에 그렇게 해냈는지 잘 살아야 한다는 그 의지가 나를 억척스럽게 만들었지만 진실을 한 번도 놓치지 않았다. 어려울 때 일수록 진실해야 하고 꼼수를 쓰면 안 된다. 그렇게 방앗간 일을 부녀지간에 1년 정도 했다. 돈이 되는지 어떤지 나는 종잡을 수 없었고 그저 부모님을 도와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발통기 방앗간으로는 돈 벌이가 시원찮았던 모양이었는지 아버지는 다시 광산으로 눈을 돌려 금광을 했다. 아마 아버지는 그간의 실패를 금맥을 잡아서 한 번에 만회하고 싶으셨던 모양이다. 요즘 말로 금광은 로또였다. 살림은 갈수록 더 기울고 그 놈의 금맥은 어디에 있는지…. 금은 캐도 캐도 나오지 않았다. 있기는 한 걸까? 혹시 허영심 잔뜩 든 사람들이 스스로 만들어 놓은 신기루 같은 것은 아닐지. 금광에 오는 사람들 대부분 부푼 희망을 가지고 오로지 금맥을 찾기 위해 오는 사람들이다. 매일 희망과 절망의 경계를 수도 없이 오고 간다. 그 인내의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 맞이하는 그 포기와 절망은 망연자실과 함께 사람을 깊은 수렁으로 빠뜨려버린다. 아버지는 마음이 오죽 급했던지

“이모네 소라도 끌고 와라.”

어머니를 몰아붙였다. 그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그 욕심이 당신과 가족을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 모르셨다. 매일 땀 흘려 일해서 얻어지는 보상과 열매에 우리는 좀 더 귀 기울여야 한다. 일확천금이 곧 一場春夢(일장춘몽)이다.

아, 내몰린 결혼. 운명의 길모퉁이

아버지의 연이은 사업실패로 가세가 기울자 입 하나라도 덜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결혼, 그 때 결혼은 인생의 황홀한 출발이 아닌 그저 어려운 살림에 입하나라도 덜자는 궁여지책이었다. 그땐 다들 그렇게 어려웠고 우리의 선택이 삶의 질과는 무관할 수밖에 없었다. 광산까지 실패하자 난 더 이상 집에서 부모님의 짐이 되면 안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큰아버지가

“영숙이 시집가야겠다. 정월 보름날 우리집으로 오너라.”

시집이라니. 이 무슨 청천벽력 같은 말인지. 스물셋, 아무것도 모르는 나이. 결혼은 생각조차 안 해봤다. 하지만 그땐 결혼도 하라면 해야 하는 때였다. 여자들에겐 생각이나 자기의지라는 기회가 좀처럼 주어지지 않았다. 뭐가 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 날짜에 난 큰아버지 집으로 갔고 머리를 빡빡 깎은 낯선 남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인삼 삼장에서 일하는 그 남자는 햇볕에 그을린 얼굴이라 까무잡잡했지만 키가 크고 잘생긴 남자였다. 쑥스러울 것도 없고 아무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설렘이나 쑥스러움이 있었다면 서글프지는 않았을 것이다. 스물셋, 나에게 주어졌던 결혼이 그저 오늘 지나 내일 만나듯이 아무 생각 없이 받아져야 한다는 건 알고 보면 슬픈 일이다. 하지만 그 조차도 느낄 수 없었으니 말 그대로, 환경에 내몰린 결혼이 되었다.

“공주에 다녀옵시다.”

어색한 만남 속에서 잠시의 침묵이 흘렀다. 그는 무뚝뚝한 말을 건네며 나를 데리고 공주로 갔다. 그때는 처음 본 남자여자가 그렇게 결혼을 하고 백년해로를 약속 하며 부부가 되었다. 나만의 불행한 삶이 아닌 그 시절을 살았던 우리들의 비슷한 결혼 풍속도였다. 그는 공주 금은방에 가서 나에게 시계를 사줬다. 낯선 남자와 함께 갔던 금은방, 진열된 시계가 마음에 드는지 예쁜지 아무 생각이 없이 그저 기계처럼 움직였다. 지금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그때는 그렇게 결혼해서도 천생연분이라는 말로 위로하면서 부부라는 책임감으로 잘 살아냈다. 남편과의 어설펐던 첫 만남은 얼마 지나지 않아 부부의 인연이 되었다.

스물셋, 정월 보름에 만나 3월 22일 결혼을 했다. 그 남자는 60년 가까이 함께 하는 남편 박승진 장로이다. 그때는 마음에 드니 안 드니 싫으니 좋으니 그런 생각은 사치였다. 어른들이 만나라면 만나고 결혼하라면 하는 시대였다. 물론 어이없지만! 그렇게 만나도 서로에 대한 책임감으로 인내하면서 가정을 꾸려나갔다. 딸을 준비 없이 시집보낼 수밖에 없는 부모님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셨을까. 하지만 살림도 기울고 광산은 남자들이 드글드글 한 곳이라 과년한 딸과 같이 생활하는 것이 부모님도 편치 않으셔서 차라리 나를 시집보내는 것이 딸을 위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하셨다. 처지가 처지인 만큼 결혼에 대한 내 생각이나 입장은 없었다. 만난 지 불과 두 달 여 만에 번갯불에 콩 볶듯 했지만 고민하고 생각할 겨를이 나에게는 주어지지 않았다. 부모님도 딸을 내몰듯이 결혼시키는 마음이 왜 아프지 않았을까. 바리바리 챙겨서 보내고 싶으셨지만 그렇지 못한 어머니의 마음은 애가 탔다.

우리 아이들 결혼시키면서 돌아가신 어머니의 마음을 다시 읽을 수 있었다. 결혼식, 마음을 어디에 둘지 몰랐는데 그날따라 비까지 또 주룩주룩 내려서 내 마음을 더 울적하게 만들었다. 내 손을 꽉 잡아 주시던 어머니, 서운한 마음이 어머니의 붉게 충혈된 눈으로 다 읽혀졌다. 난 애써 눈물을 참으려고 입술을 꽉 깨물며 견뎠다. 타들어 가는 마음에 그나마 촉촉한 봄비가 작은 위안이 되었다. 초라한 혼례상 일지라도 앞마당에 차려두고 결혼을 해야 하는데 내리는 비를 피하느라 창고에서 결혼식을 치렀다. 초라하기 짝이 없는 결혼식, 스물셋 한창 예쁠 나이에 그렇게 결혼을 하고 부모님 품을 벗어나 새 가정을 꾸리게 되었다. 결혼사진 한 장 없는 것이 안타깝지만 그날은 사진사도 마땅치 않아서 결혼사진도 남기지 못했다. 비를 피하겠다는 단순한 생각만으로 창고에서 결혼을 하고 그렇게 어설픈 모습으로 신혼은 시작됐다. 비가 와서 지푸라기를 쭉 깔아놓은 앞마당 창고에서의 서글픈 결혼식, 주룩주룩 내리는 비 까지 나의 시집가는 날은 그렇게 구슬픈 진풍경을 그렸다. 그리고 시댁으로 갔다. 아 마루바닥은 삐거덕거리고 처마가 머리끝에 닿는 곤궁하기 짝이 없는 집이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결혼 또 다른 인내의 시작

시집가는 길, 길도 없어서 냇물을 따라 차를 타고 갔던 기억에 우리인생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다. 없는 길을 내면서 가는 것이다. 벼랑 끝에 나를 세웠더니 인생이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왔다. 어려운 살림이었지만 그나마 위안 삼을 수 있던 것은 인자하신 시어머니의 사랑이었다. 그땐 다들 어렵고 힘들었던지 이 설움 저 설움 술로 달래며 남자들은 그들 삶의 무게를 덜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나도 술 좋아하는 남편을 보며 속은 새까맣게 탔지만, 무턱대고 바가지만 긁어대는 미련한 여자는 아니었다. 아내로서 남편을 이해하려 했고 내 헌신 속에서 가정이 단단하게 서기를 기도했다.

말 그대로 술이 원수지 좋은 사람이었다. 우리는 은산으로 나와서 시계포를 했다. 그때만 해도 시계포는 큰돈을 벌지는 못해도 오고가는 손님들이 있어서 밥은 먹고 살았다. 시계포도 목돈 마련하느라 동네 아줌마한테 곗돈 250,000원 타서 책상 하나 두고 시계줄 몇 개 갖다놓고 시계방을 차렸다. 남편의 이름을 따서 ‘승진당’이라고. 손바닥만 한 구멍가게였지만 우리가족에게는 희망이었다. 개업하는 날 잠도 오지 않았다. 남편은 손재주가 좋아서 어릴 때부터 모형 탱크를 진짜보다 더 멋지게 만들기도 했었다. 유리장에 먼지라도 묻을까봐 걸레질하며 폼 나게 보이려고 애를 썼다. 뭐든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에서는 최선을 다하는 성격이라 유리장이라도 반짝반짝 하게 닦아놓아야 직성이 풀렸다. 남편은 사람 좋아하고 천성이 착한분이라 남의 말을 의심하지 않고 잘 믿었다. 남의 말을 잘 듣다보니 누군가 사업을 권하면 또 거기에 온통 관심을 쏟기도 했다.

시계포 할 때 남편의 친구들이 택시사업을 권하는 통에 1년을 택시사업하자고 나를 졸랐다. 사실 그 때쯤은 시계포가 제법 잘됐다. 자리를 잡았고 동네에서 이미 입소문이 나서 먹고 살만했다. 남편이 호인이라 남편보고 오는 사람들도 많았고 난 나대로 성실하고 책임감 있게 일을 해서 손님들에게도 신임을 얻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남편의 친구들이 남편에게 택시사업하면 돈을 번다고 바람을 잔뜩 집어넣었다. 친구들이 손님한테 받은 돈을 남편 보는 앞에서 천 원 이천 원 세고 있으면 남편은 택시사업이 돈이 될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50년 전, 천 원 이천 원이 적잖은 돈이었다. 남편은 돈을 보며 마음이 들떴고 시계포에서 받는 잔돈푼이 당연히 하찮아 보였다. 남편은 나에게

“임자, 택시 사업 해 보자구. 어때? 돈 좀 될 것 같은데 말이야.”

“아니 운전도 못하면서 무슨 택시예요. 지금 있는 시계포나 잘하면 되죠. 다른데 눈 돌리지 말고 지금 가게나 잘 합시다. 경험 없이 덤벼들었다가 실패하면 어쩌려고요.”

하지만 1년 동안 ‘택시택시’ 노래하던 남편을 이길 수 없어 결국은 택시를 사고 말았다. 삼촌과 같이 사업을 시작했다. 사업이 뭔지 모르니 그저 운전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막상 사업을 시작하니 돈 걱정, 마음 고생이 떠날 날이 없었다. 난 불평하지 않았다. 혼자만의 영달을 위한 단순한 욕심이 아니었다. 그래서 남편을 이해하고 어떻게 살아나갈까를 고민했지, 주저앉아서 불평과 한탄만 하지 않았다.

다시, 생활전선으로. ‘하면 된다’

남편은 택시사업하면서 시계포에 시계기술자 한명을 두었다. 그는 시계기술에 도장까지 팔 수 있는 사람이었다. 예전에는 손수 파는 도장이 문전성시를 이루는 때가 있었다. 난 어깨너머로 도장도 배우고 운전도 배웠다. 생계의 수단으로 어설프게 시작됐지만 어깨너머 배우면서도 반드시 내 기술로 만들었다.


시계기술자는 추석을 쇠러 간다며 나에게 도장 파는 기술을 간단히 알려주었다. 어릴 때부터 눈썰미가 제법이어서 한 달 동안 ‘김 자’, ‘이 자’ 시늉만 하며 배워나갔다. 새로운 세계는 크든 작든 경이롭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열심히 배우자 했더니 한 달 만에 시늉을 하게 되었다. 나는 일단 해보고 판단하지, 먼저 못한다고 주저하지 않는 성격이다. 그 기술자는 추석을 쇠러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이런, 이젠 진짜 내 일이 되었다. 승진당에서 도장도 판다고 소문은 낫겠다, 정말 추석 지나고 손님이 왔다.

돈을 받고 도장을 파줘야 한다. 손도 바르르 떨렸지만 내색을 할 수 없었다. 손님은 나를 힐끗힐끗 쳐다보고 있었다. 돋보기를 더 가까이 들여다보며 한자 한자 파고 여백을 없애나갔다. 그 5분의 시간이 얼마나 길었던지. 어느새 내 눈에 보이는 손님의 이름, 김. 영. 길.

‘아 하나님. 제가 도장을 팠습니다.’ 그 짧은 시간에 혼자 진땀을 빼며 도장을 판 내 손길이 신기하고 대견했다. 손님은 내가 첫 작품을 만들었는지 알 리가 만무하다. 도장을 받아가며

“좋네요.”

라고 한마디 던져준 것이 그 길로 자신감이 되어 난 도장기술자로 출발을 하게 되었다. 첫 작품의 탄생비화다. 그렇게 도장기술 첫 시작을 마치고 난 못하는 것이 없는 여자로 변신하고 있었다. 위기는 기회이며 두려움 속에서 맞이한 도전이었지만 진심으로 정성을 다하면서 결과를 내고 한 발 더 성장하는 내가 되었다.

당당한 여자로 우뚝 서다. ‘1인 5역’

시계포 할 땐 우리 집에 성한 냄비가 없었다. 시계 줄을 갈아드리고 혹은 도장을 파드린 후에 한참 지나 어디선가 탄 냄새가 코끝을 진동할 때 마법에서 풀린 듯이 부엌으로 달려갔다. 아내로 엄마로 주부로 가게 사장으로 몸뚱이는 하나지만 너무 많은 일을 하면서 간간이 정신 줄을 놓기도 했다. 그 땐 부엌에서 심지에 불을 붙여 사용하는 풍로를 사용했다. 부엌에 들어가 보면 다음 광경은 불을 보듯 뻔하다. 양은 냄비들이라 그 시간 동안 통째로 새까맣게 타버린 건 부지기수다. 좁은 부엌 안은 아수라장이다. 새까맣게 타버린 냄비들이 간혹 생활고에 힘들어 숯처럼 타들어가는 내 마음인양 애처로웠다. 수세미로 박박 닦으면 어느새 윤기 나는 양은 냄비들 잠시나마 깨끗해지는 냄비들을 보면서 고단한 내 마음을 위로하기도 했다. 5남매 키우랴 가게 운영하랴, 손이 열 개라도 모자란 그런 시절을 보냈다. 이따금 술 좋아하는 남편이 술 드시고 다치기라도 하면 난 작은 몸을 어디에 둘지 몰라 너무 힘들었다. 하지만 수많은 세월 속에서 위기상황에 대처하는 방법. 생활인로서의 자세, 아내로 엄마로 내가 해야 할 덕목을 그대로 지켜나갔다. 처음엔 헌신이라고 착각했다. 하지만 그건 그저 내 역할이었다. 이젠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다. 여든이 넘었지만 난 경제활동을 할 수 있고 주변에 영향력을 주는 여성이 되었다.

마르지 않는 쌀독, 행복한 노년, 하나님의 축복

아이들 키울 때까지 쌀독은 늘 바닥 긁는 소리를 냈다. 하지만 이제 우리 쌀독은 마르지 않는다. 아이들이 보내는 용돈, 거기에 나는 내 기술로 돈을 버는 엄연한 사장님이다. 그 어려운 시절을 용케 견뎌낸 그 시간의 아름다운 보상이다. 어설프게 생계로 시작한 도장 기술, 이젠 제법 근사한 소일거리로 한 자리 떡하니 차지했다. 청춘을 나이로 매기는 게 아니라면 난 진짜 청춘이다. 아직 열정이 있고 지금도 매일 아침이 기다려진다.


잘 살았노라! 아낌없이 주는 나무

이제 걱정이 없다. 손 갈 일이 없다. 젊을 땐 아이들 키우고 가게하고 남편 돌보느라 몸이 열개라도 모자랐다.

작년 겨울, 우리 아이들과 제주도 가족여행을 다녀왔다. 다들 사회에서 자기 몫을 하느라 바쁜 아이들이 오랜만에 다 같이 모였다. 우리 부부는 너무 행복했다. 그 어려운 시절을 견뎌내고 끼니걱정하며 아이들을 키웠는데 다들 착하게 잘 살아줘서 고맙다. 먹을 걱정 입을 걱정 누울 자리 걱정 안하는 게 어딘가…. 난 그 여행 틈에도 오래된 나만의 즐거운 습관에 빠졌다. 생각나는 무언가를 또 기록해야 했다. 방에 들어와 종이라도 보이면 또 적었다. 어디를 다녀왔는지 기분이 어땠는지…. 박스 상자 날개에도 쓰고 편지봉투라도 여백이 보이면 또 적었다. 쓰면 행복하다. 평생 공부하고 싶다. 배우고 또 배우고 싶다. 어려움 속에서 기회를 얻는다고 결국 고통이 나를 다시금 일으켜 세웠다.


시계포의 사장님에서 택시사장님 이젠 도장 파는 사장님으로 난 생활을 남에게 의지하지 않는다. 하물며 자식들에게도. 은산 성결교회의 권사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 사회에서 안정된 자리를 지키는 5남매에게 존경받는 엄마다. 내세울 것 없는 나의 삶을 존경해주는 우리 아이들. 자식에게 인정받는 것 만한 축복도 없다. 그래서 잘살았노라! 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한낮의 햇살에 깜박 졸음이 찾아올 때 데려다 주는 힘들었던 과거의 그날도 이제는 단꿈이 되었다. 여든이 넘은 나, 이만하면 자존심을 지켰다. 이제 餘恨(여한)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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