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희 작가의 추억의 뜰] 숲 소목의 선물─안나의 고백 <1회>

박애일 어르신 (1932~)

김경희 작가 승인 2020.12.10 15:47 의견 0

아침 산행 길에, 형형색색 단풍 길을 지나며 감탄을 자아냈다. 오래전 그 시절은 하루가 어떻게 지나는지 가늠하기 어려운 시절이라 계절이 오가는 길목에 서 본 기억도 희미했다. 철지난 낙엽이 뒹굴면 겨울이 오겠구나 한숨 쉬며 가을이 지난 흔적도 찾지 못했다. 이제 젊은 날의 그 척박했던 힘겨움이 싹이 되어 눈과 마음이 같은 생각을 하는 안락한 일상을 만났다. 80년이 어느 틈에 내 곁을 스쳐 지났는지 분간이 안 되는 때다. 살다보니 이렇게 고운 날을 매일 보듬고 가는구나.

박애일 어르신


전염병으로 멍석에 말려간 아버지, 상여가 가당키나 한가

하루도 놓지 않았던 하느님의 딸. 질곡의 시간을 거쳐 따뜻한 뜰에 둥지를 깊이 내렸다. 빨간 우체통 집의 안주인으로 60년이 되었다. 대천 도화담리가 고향인 나는 죽산 박씨로 천주교 성인품을 받아 죽산 성지에 묻힌 선조가 있다. 믿음의 뿌리를 깊이 내린 핏줄이었다. 고향은 자갈밭이 많던 시골이라 농사도 썩 재미없어서 다들 어렵게 살았다. 우리 집도 예외일 수 없었다. 어린 시절 가장 오래된 기억의 끈은 아버지의 죽음이었다. 그때만 해도 동네에 장티푸스가 돌면 전염병이라 4, 50대 장정들도 맥을 못 추고 픽픽 쓰러졌다. 우리 집도 순식간에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를 잃었다.

까마득한 기억 속의 그날 밤. 돌아가신 아버지를 하얀 홑청으로 덮고 멍석을 말아 장사를 치러주었다. 아버지의 마지막 가는 길은 너무 처량했다. 상여가 가당키나 한가. 잠자리에 누웠을 무렵, 밖에서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렸다. 그 칠흑처럼 어두운 밤에 동네 장정들이 아버지를 멍석 말아 지게에 지고 나갔다. 전염병이라 동네 초상을 치를 수 없어서 쉬쉬하며 아버지를 그렇게 보냈다. 남편의 마지막 가는 길에 곡소리도 크게 낼 수 없었을 어머니의 그 소리 없는 통곡을 우리가 감히 짐작이나 할 수 있었을까? 문풍지에 침 발라 구멍을 뚫었지만 칠흑 같은 어둠에 묻혀 어렴풋한 그림자만으로 아버지를 보내드렸다. 다음날 아침 지난밤의 그 슬픔과 두려움은 누워계시던 아버지가 보이지 않는다는 그 사실로 다시 확인했다.

어머니와 우리 7남매


형제들이 한 달 사이로 돌아가셨으니 논마지기 다 팔고 밭뙈기 조금으로 연명하면서 집안이 망했다. 그전에는 먹을 만치(만큼) 먹고 살았는데 두 형제분이 한 달 내 3월 4월에 돌아가시니 집안에 사람들 발길도 뚝 끊기고 꼴이 말이 아니었다. 어처구니없이 그렇게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집안은 당연히 기울고 어머니는 남편 없이 혼자서 우리 4남매를 키우시느라 가시밭길에 들어섰다. 그래도 아버지와의 그 슬픈 이별을 달래주기라도 하듯이 어머니는 아흔이 넘어서까지 내 곁에 계셔주셨다. 그리고 늘 나에게 “안나는 나이 들어 큰 복을 받을 거다”라며 위안의 말을 해주셨다.

생존을 위한 어머니의 분투

어머니는 이것저것 생계를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은 마다하지 않으셨다. 감을 우려서 시장에 내다 팔 때마다 따라다녔다. 나도 조막손으로 어머니를 돕겠다고 감도 만지작거리며 광주리에 담을 때 손도 거들었다. 어머니께서는 옹기장사도 하셨다. 살림에 보탤 수 있으면 뭐든 열심히 하셨다. 둘째 오빠가 여남은 살(열 살이 조금 넘은 나이) 됐을 때인가 어머니는 옹기를 머리에 이고 둘째 오빠는 지게에 지고 그릇을 팔러 나갔다. 땅거미가 내려앉은 후 돌아온 오빠는 눈물자국으로 얼굴이 때꾼했다. 어머니가 옹기 팔러나가는 길에 기막혔던 일을 들려주시며 한숨을 내쉬셨다. 어머니와 오빠는 옹기가 무거워서 가는 길에 잠시 쉬어 가려고 지게를 세워두었다. 오빠는 의젓하다 해도 열 살 조금 넘은 아이다. 지게 다루는 것이 서툰 것은 당연하다. 잠시 앉아 쉬고 있는데 ‘와장창’ 그릇 깨지는 소리에 깜짝 놀라 돌아보니 지게는 엎어져있고 그릇들은 부서져 여기저기조각들이 흩어져 있었다. “어머니, 어떡해요. 죄송해요. 제가 그릇을 깼어요. 이제 어떡해요.” 오빠는 속상하고 죄스러운 마음에 두 다리를 쭉 뻗고 대성통곡을 했다. 어머니는 널 부러진 옹기 조각에 애가 탔지만 망연자실 한 채 울고 있는 아들을 보며 어머니 마음은 더 아팠을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괜찮다. 아가 괜찮아.” 간신히 아들을 위로하고 달래긴 했지만 어린 아들의 통곡에 얼마나 가슴 아팠을 것이며 당신의 신세가 처량해서 눈물 흘리셨을 거다. 그 마음들이 오죽했을까…, 오빠는 어머니를 돕겠다고 나선 길에 그 지경이 됐으니 오빠의 소리 내서 우는 통곡, 어머니의 소리 없는 통곡. 가슴 아프기는 매 한가지다. 하루하루 애가 타고 살얼음판을 건너며 그 세월을 견뎌냈다.

큰오빠는 집안의 가장이라 장가도 서둘렀다. 올케 시집 왔을 때 난 다섯 살 정도 되었다. 나는 딸 같은 시누였다. 올케가 반갑고 신기해서 올케가 어머니와 얘기라도 나누고 있으면 옆에 궁둥이를 들이밀고 앉아서 정을 느끼곤 했다. 어려운 살림에 어린 시절이라 나를 챙겨주는 어여쁜 이가 또 있다는 것만으로도 힘이 됐다. 올케의 존재는 그렇게 무게가 있었다. 갓 시집온 새댁 눈에 시누가 어린아이처럼 보였을 테고 엄마처럼 나를 잘 돌봐주었다. 어렵게 살았지만 다들 정 많고 살가운 사람들이라 배고픈 설움도 잊고 살 수 있었다. 그렇게 유년시절은 아버지의 황망한 죽음, 그 이후의 가난과 어머니의 고생, 광복과 6·25로 이어지는 격동의 세월과 함께했다. 가난했지만 형제들과 우애가 좋았고 어머니는 힘들고 지쳤지만 우리 앞에서 한숨 한번 내쉬지 않으셨다. 그렇게 강인하고 따뜻한 분이셨다. 어머니 일손을 도우며 나는 큰 애기가 되고 스물이 넘었다.

기별 없이 찾아온 혼담

결혼 전 친구들과 같이(뒷줄 오른쪽 스무살 박애일)

대전에 나가있던 둘째 오빠가 어느 날

“어머니, 애일이 선 볼 사람 있어요. 시집보내야겠어요.”

하는 말에 화들짝 놀란 수줍은 큰 애기였다. 둘째 오빠와 같이 일하던 남편을 오빠는 손아래 매제 감으로 마음에 두고 있었다. 우리는 오빠와 어른들이 혼담이 오간 후 3년 만에 결혼을 했다. 남편의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성실하고 듬직해보였지만 내가 마음에 들어 고른 사람도 아니고 어른들이 정혼한 사람이라 그 땐 아무 생각이 없었다. 스물두 살, 그렇게 결혼이라는 운명과 만났다. 한 남자를 만나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새로운 인생과 다시 만나게 되었다. 결혼 전에 남편을 한 번 밖에 못 만나고 결혼했지만 탈 없이 해로하며 잘살고 있다. 천생연분은 맞는 모양이다. 4남매의 막내로 아버지 없이 조금은 외로웠던 나에게 결혼은 가족이라는 너무나 큰 선물을 얻는 축복의 기회였다. 지금 사는 집에서 59년을 살았다. 시부모님 모시고 살면서 그 긴 세월 동안 집도 고치고 아이들 7남매를 다 여의 살이 시키고 노년을 보내고 있다. 손녀까지 시집보낸 터, 배씨 집안의 산 역사가 흐르는 집이다. 기막힌 일 없이 3대까지 가풍을 이어오고 있다. 얼마나 감사한지. 친정어머니가 나한테

“안나야, 너 큰소리 치고 살 거다.”

하시던 그 말씀이 힘이 되어 긴 세월을 잘 견뎌왔다.

22살에 결혼했다. 안나와 레나도의 만남


시아버지 시집살이, 연단의 날들

결혼은 다른 운명과 만나는 출발이다. 한 남자를 만나면서 시댁의 울타리에 들어간다. 결혼 후 바로 시어른을 모시고 살았다. 결혼 전에 어려운 살림이었어도 막내딸이라 귀여움 받으면서 힘든 일은 많이 하지 않았다. 그래서였던지 시어른을 모시는 일은 여간 신경 쓰이고 부담되는 일이 아니었다. 아버님은 보통 분이 아니라 식사며 일상을 챙겨드리는 일들이 갓 시집 온 새댁한테는 시어머니 시집살이가 아닌 시아버지 시집살이였다. 시아버지는 엄한 분이셨고 기개가 남다른 분이라 늘 어려웠다. 남편의 친어머니인 시어머님은 26살에 너무 일찍 돌아가셔서 남편에게도 그리움 속의 어머니지만 나에게도 역시나 존재가 없는 시어머니였다. 갓 시집왔을 때 시어머니는 아버님의 여러 부인 중 한 분이셨다. 남편은 농담처럼 가끔 나에게 푸념했다.

“내가 당신까지 여자 손을 열 한 명이나 거치면서 살았어요.”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말이다. 어린 시절 어머니를 여의고 할머니 손에, 새어머니들 손에 숙모 손에, 그리고 아내인 나의 손을 거쳤다는 마음 아픈 사연이다. 시아버님은 평범하지 않으셔서 집안 보다는 당신의 성공에 더 큰 관심이 있으셨던 어른이다. 그 연세에도 젊은 시절 해외에 나가 사업을 하기도 하셨다. 대만에서 한약재 유통 관련 사업을 하셨던 앞서가는 분이셨다. 남자가 시대를 앞서가면 장부의 기개는 살지만, 식구들한테는 소홀해질 수밖에 없다. 안팎으로 조화롭게 이뤄간다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다. 그 과정에 돌아가신 시어머니도, 남편도 고독하고 힘겨운 시간들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시어머니는 26세, 너무 일찍 돌아가셨다. 시아버님은 첫 번째 부인과 사별하고 그 마음을 달래느라 새어머니들을 만났지만 온화한 가정을 꾸려 나가시는 건 졸장부들의 24시간이라고 생각하신 거 같았다. 어린 새댁인 내가 비위를 맞추기엔 너무 어려운 분이었다. 남편은 아버님과 달리 소박한 삶의 가치를 더 깊이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새댁 때는 아침마다 아버님의 아침 밥상을 차리느라 진땀을 뺐다. 갓 담은 김치에 고기를 재워 먹음직스럽게 올렸다. 솜씨는 없지만 어르신 밥상이라 온갖 정성을 다하고 반찬이란 반찬은 다 꺼내 올렸다. 시험 보는 아이처럼 아버님의 젓가락만 쳐다보고 있었다.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아버님은 드시지 않았다. 그때서야 아버님이 입이 짧은 분임을 알았고 험난한 시집살이가 그려져 그날은 한숨만 나왔다. 김치를 안 드시는 대신 차라리 고기라도 많이 드시면 좋으련만. 아버님은 즐겨 드시는 음식이 없어 식사 때마다 신경이 곤두섰다. 그 시절, 밥상 위 반찬이란 것이 김치 푸성귀가 전부였던 그 때. 마땅한 음식을 만들어 내놓기엔 가정 형편이나 손맛이 부족했다. 남편도 입이 짧은 편이라 먹성 좋은 사람들이 가리는 것 없이 잘 먹는 집이 부러웠다.

시아버님은 까다로운 분이라 일머리가 부족한 나에게 간간이 꾸지람도 주셨다. 내 딴에는 잘한다고 했지만 아버님 성에 안차면 다른 방도가 없다. 속으로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시아버님이라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시어른들과 7남매 같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데 얼마나 많은 잡음이 있고 서로 부당하다는 마음이 드는 것도 다반사였을 것이다. 결국 인내는 나의 몫이었다. 하지만 그건 강요된 헌신과 인내가 아니라, 나 스스로가 가장 현명한 판단을 내린 것이다. 그것이 본이 되어 아이들도 오히려 정직하고 반듯하게 잘 자라주었다. 고난이 유익이라고 시아버님의 시집살이가 나를 성숙하게 만든 밑거름이 되었다. 아버님은 68세에 돌아가셨는데 좀 더 오래 사셨으면 하는 아쉬움은 있었다. 고된 시집살이를 했지만 그 또한 깊은 정으로 남아서 돌아가실 때 어찌나 울었는지. 그래도 손주 장성하는 것도 보시고 가정의 소중함도 뒤늦게 맛보신 후에 돌아가셔서 그것으로 위안 삼았다.


아내 그리고 엄마의 자리

아이들 키울 땐 남편 도시락까지 합쳐 아침이면 도시락 여덟 개를 싸서 들려 보냈다. 새벽 닭 우는 소리에 일어나 양은 도시락에 기껏해야 김치 반찬이지만 밥이라도 꾹꾹 눌러 담아 보내고 싶은 마음에 발을 동동 구르며 도시락을 쌌다. 차곡차곡 얹어놓으면 하나씩 챙겨서 나갔다. 힘들어도 도시락 들고 나가며

“다녀오겠습니다.”

그 말 한마디에 기운이 솟고 우리 아이들 뒤통수를 보면 밥 안 먹어도 배가 불렀다. 그렇게 아침나절을 보냈다.

남편은 고등학교 때까지 반에서 1등을 놓치지 않았지만 어려운 집안의 가장이라 대학을 포기하고 소목(小木)의 길에 들어섰다. 어려서부터 독립적으로 성장한 사람, 우리 아이들에게도 고등학교까지만 지원해주고 나머지는 알아서 인생을 개척하라고 아이들에게 선언을 했다. 큰 아들 공부 잘해서 서울 일류대에 갈수 있었는데 충남대 장학생으로 진로를 바꾸면서 3일 동안 입 한 번을 안 떼는 데 가슴이 다 무너져 내렸다. 가능성 있는 자식한테 무조건 다 주지 못하는 애절한 부모 마음을 1할이라도 알아차릴까? 아니 모른다.

어르신들 계시니 매끼니 챙겨드려야 하고 하루가 어떻게 갔는지 모르게 매일이 분주하고 하루도 수월한 날이 없었다. 7남매 키우다 보면 이러 저런 일들이 다반사다.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웃을 일도 많고 반면에 고단한 일도 많았다. 우리 큰 딸한테 아직도 미안한 일 하나. 우리 큰 딸도 참 착했다. 호수돈 여고에 다녔는데 용운동 집에서 대동까지 걸어가서 버스를 타고 학교에 다녔다. 가끔 늦은 밤에 지친 모습으로 집에 오곤 했다. 공부하느라 힘들었나 일축하고 말았지만 그 이유를 알고 놀라움과 미안했던 그 마음은 지금까지도 마음의 짐처럼 남아있다. 유독 지친 얼굴로 돌아온 날은 학교 마치고 걸어서 집에 왔던 길이었다. 버스비 아낀다고…. 부모가 여유 있었으면 그런 생각을 하기나 했을까 싶은 마음에 미안하고 대견했다. 그 긴 시간을 걸어서 오는 그 길이 미옥이한테 어떤 마음을 주었을지는 엄마라는 이름으로도 헤아리기 어렵다. 그저 미안하다. 우스갯소리지만 내내 걸어 다닌 미옥이는 그 덕분인지 달리기를 잘했다. 성당에서 운동회라도 하면 다른 사람들보다 한발은 먼저 가니 사람들이 늘

“아이구, 마리아님 같이 좀 가요.”

라면서 미옥이 뒤를 따르기도 했다. 그렇게 착하고 예쁜 딸도 어느덧 손주를 보며 할머니가 되었다. 큰 손녀가 결혼할 때 혼인 신고하면서 증인란을 우리에게 맡겼다. 요즘 아이들에게는 의미도 없어진 증인란, 나이 들면 가족으로부터 뒷방늙은이 취급당하면서 소외당하는 설움이 가장 큰 설움이다. 우리 손녀딸까지 우리부부를 존중해주고 인생의 첫발을 내딛는 자리에 우리를 끼워줘서 어찌나 고마웠는지. 생각만 해도 행복해지는 우리 아이들이다. 착하고 살뜰하지만 아이들이 심지가 굳었다. 자기 삶에 확고한 설계가 있는 아이들이다. 자식자랑은 팔불출이라지만 그 소리 듣더라도 우리 아이들 자랑을 해야 속이 후련하겠다.

다음호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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