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일
승인
2021.02.05 13:36
의견
0
투명한 것은 날 취하게 한다.
시가 그렇고
술이 그렇고
아가의 뒤뚱한 걸음마가
어제 만난 그의 지친 얼굴이
안부 없는 사랑이 그렇고
지하철을 접수한 여중생들의 깔깔 웃음이
생각나면 구길 수 있는 흰 종이가
창밖의 비가 그렇고
빗소리를 죽이는 강아지의 컹컹거림이
매일 되풀이 되는 어머니의 넋두리가 그렇다
누군가와 싸울 때마다 난 투명해진다
치열하게
비어가며
투명해진다
아직 건재하다는 증명
아직 진통할 수 있다는 증명
아직 살아 있다는 무엇
투명한 것끼리 투명하게 싸운 날은
아무리 마셔도 술이
오르지 않는다..
―
누가 이 불확실하기 짝이 없는 시대에 최영미와 같이 외칠 수 있으랴. 그녀의 의식은 확고하고 투명하다. 그러하기에 지배층과 권력을 향한 당당하고도 예측불허하며 자유로운 표현에 거침이 없는 것이다.
어쩌면 70년대 시가 가졌던 시대적 의식을 복원했다고도 할 수 있으며 그 통쾌한 직설에 짜릿해지기까지 하는 것이다.
누군가와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투명하지 않으면 싸울 수가 없는 것이다. 투명한 것끼리 싸운 날에는 술조차 투명하지 아니한가. 시시콜콜 훠언히 다 보이니까 말이다.
무수히 쏟아져 나오는 시도 무의식의 시대를 닮아 가는지 눈 씻고 보아도 어떤 메시지를 던져 주는 시는 드물다. 허구한 날 자신의 지질하기 짝이 없는 정신세계를 저 홀로 유랑하고 있을 뿐이다.
최영미 (1961년 서울)
시집_ <서른 잔치는 끝났다>, <꿈의 페달을 밟고>, <돼지들에게>
산문집_ <시대의 우울>, <우연히 내 일기를 엿보게 될 사람에게>, <다시 오지 않는 것> 등
저작권자 ⓒ 시사저널 청풍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