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경석의 단상] 어떤 나르시시즘

홍경석 편집위원 승인 2021.02.09 15:26 의견 0

‘미녀와 개자식들’(Beauty and the Dogs)은 2017년에 개봉한 영화다. 튀니지, 프랑스, 스웨덴, 노르웨이, 레바논, 카타르, 스위스 등 무려 7개 나라 영화인들이 연합하여 만들었다.

튀니지의 21세 여대생인 마리암은 어느 날 학생 파티에서 유수프를 알게 된다. 첫눈에 그 남자에게 반해 파티장을 나온다. 둘이 키스를 하던 도중, 경찰차가 다가오더니 유수프를 다짜고짜 끌고 간다. 경찰관 둘은 번갈아가며 마리암을 강간한다.

겨우 달아나 경찰서에 가서 신고를 하지만 누구도 그녀의 말을 귀담아 들어주지 않는다. 외려 아무 남자에게나 함부로 다가서는 노류장화(路柳墻花) 쯤으로 치부한다. 절망한 그녀는 지푸라기라도 잡겠다는 일념으로 더욱 분노한다.

다방면을 찾아 신고하던 중, 도움을 주겠다던 여기자에게도 연락을 취한다. 하지만 어느새 경찰에 회유되어 그 기자는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는다. 이 부분에서 후진국의 병폐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럼에도 그녀는 자신의 소중한 권리와 존엄을 되찾기 위한 지난한 투쟁을 시작한다. 결국 여기서 이긴 그녀는 자신이 겪은 실화를 모티브로 하여 책을 낸다. 그것이 도화선이 되어 튀니지에서 인권운동이 들불처럼 번져간다.

‘미녀와 개자식들’에는 정말 수많은 인간 개자식이 등장한다. 개자식은 사전적 의미처럼 어떤 사람을 좋지 않게 여겨 욕하여 이르는 말이며 주로 남자에게 쓰인다. 마리암이 개자식들로부터 겪은 수모와 치욕을 글로 승화하지 않았다면 묻혀버릴 ‘팩트’였다.

책과 글의 힘을 새삼 발견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제 본론이다. 왜 책을 내야 하는가? 필자는 일기를 쓰듯 얼추 매일 글을 쓴다. 습관이 된 지 어언 20년이다. 이것이 동인(動因)이 되어 세 권의 책을 냈다. 곧 발간할 네 번째 저서 역시 같은 선상의 결과물이다.

그렇다면 책은 어찌 내야 할까?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은 다작(多作)을 생산한 작가에게 코칭을 받는 것이다. 주변에 수십 권의 저서를 발간한 고수들이 우뚝하다. 수소문하여 자문을 구하면 십중팔구 친절히 안내해준다.

출간의 어려움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경험한 ‘선배님’이기 때문이다. 책을 내기 위한 과정엔 당연히 글쓰기가 접목된다. 이 과정에서 저자는 그동안엔 몰랐던 희열 따위를 경험한다. 과거와 현재의 내 인생을 제3자의 객관적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는 것도 포함된다.

글을 쓰는 과정에선 분명 내게 상처를 주었던 ‘개자식(들)’도 언뜻언뜻 보인다. 그러나 기꺼이 용서할 수 있는 너른 아량까지 부여하는 게 바로 글쓰기의 묘미이자 백미다. 누구라도 세상에 고통과 상처 없는 인생이 있었던가.

당신도 책을 내라. 그 과정에서 글을 쓰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미녀와 개자식들’까지 발견할 수 있을 테니까. 여기서 말하는 ‘미녀’는 물론 나 자신이다. 온갖 역경을 딛고 오늘 이 자리까지 달려온 자기 자신이야말로 어떤 칭찬으로도 부족한 의지의 한국인이기 때문이다.

‘이긴 자가 살아남은 게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이긴 것이다’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더욱이 지금은 여전히 살벌한 ‘코로나 시국’ 아니던가! 반면 파란만장과 험산준령, 배신 따위를 남긴 대상은 싸잡아 ‘개자식들’로 치부해도 무방하다.

너무 노골적이고 직설적 표현이라는 비판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또한 글 쓰고 책 내는 이의 어떤 특권임은 구태여 사족의 나르시시즘(narcissis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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