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희 작가의 추억의 뜰] 지난 인생을 한 줄로 쓴다면, “말도 마, 기막혀.”―1938년 정진기 어르신

김경희 작가 승인 2021.03.11 15:21 | 최종 수정 2021.03.11 15:45 의견 0
1938년 정진기 어르신


어르신은 반전의 연속인 분이셨다. 옥천이 고향일까 여쭈었더니 충남 연기군 동면이 고향이셨고 유년시절에는 함경남도 원산에서 성장하셨다. 다시 월남하셔서 천안, 부강을 거쳐 옥천으로 오셨다. 한창 경기도 광주 신도시 개발 중이던 때 인쇄소를 하시며 돈을 쓸어 담아 본 적도 있으셨다. 시골살이를 마음속에 품고 있던 어르신은 옥천으로 다시 내려오셨다. 지금 어르신의 직업은 뻥튀기 사장님. 하얀 피부에 영화배우처럼 미남이신 어르신은 “아휴 말도 마! 기가 맥혀.”를 수십 번이나 되뇌셨다. 인생의 굴곡진 길도 걸었고 돈, 명예도 가져보았다. 이제 무명인(無名人)이 되었지만 어르신의 발자취가 누군가에게 사랑 하나, 버틸 수 있는 힘 한 번 주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그 삶을 존중해야 한다.

시대의 위협에 정착할 수 없던 유년시절

연기군 동면에서 살던 나의 유년은 풍족했다. 일본말을 잘하시던 아버지는 우체국에 다니셨다. 우리는 그 덕에 남들 끼니 걱정하던 시절에 귤을 먹는 호사를 누려보기도 했다. 우체국 월급날이면 아버지는 나일론 망 안에 줄줄이 엮인 귤을 들고 퇴근하셨다. 한 알씩 꺼내서 껍질을 깔 때면 손끝에 배인 귤 향기에 넋이 나가기도 했다. 모든 것이 귀하던 시절이라 귤 한 알이 주는 기쁨이 그날 우리한테는 전부였다.

평화롭던 내 유년은 큰아버지가 이북으로 올라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흔들리기 시작했다. 아버지도 우리 가족을 데리고 함경도 원산으로 올라가셨다. 내가 여섯 살 남짓 됐을 나이에 원산항은 어린 나에게 호기심 천국이었다. 원산항 갈마반도는 물 반, 고기 반 이었다. 간간이 주인 없는 물고기들은 우리 차지였는데 팔딱거리는 물고기가 손에서 미끄러지면 그걸 잡느라 한바탕 소동을 치렀다. 원산항 주변을 키 크고 얼굴이 굳은 러시아 군인들이 지나갈 때는 소름이 돋기도 했다. 동생은 네 살, 내가 여섯 살 무렵이었다.

우리는 회령으로 터를 옮겼고 아버지는 회령에서도 우체국에 다니셨다. 아버지가 우체국에 다니니까 살림의 여유가 있어서 이북에 정착할 수 있었다. 한날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러시아 군용기가 일본 군인들을 폭격했다. 러시아군인들이 조센징 이쪽, 일본사람 저쪽으로 가라며 손가락을 가리켰다. 목숨이 그 손끝에 달렸다. 러시아 군인들이 관직에 있는 일본 사람들을 죽이는 광경을 동네에서 목격했고 사람들은 겁에 질려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일곱 살 무렵의 나는 멀리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지만 오줌을 지릴 만큼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어린 나도 시대의 불행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때 벌써 이북에 공산주의가 들어왔다. 공직자나 부자들을 숙청하기 시작해서 우체국에 다니시던 아버지가 짐을 싸자고 하셨다. 이불이며 옷가지를 주섬주섬 챙기고 소 구루마를 세 얻어서 마을에서 회령까지 걸어 나왔다. 회령에서 기차타고 청진까지 왔다. 큰아버지와 청진항에서 만나 청진 연락선을 타고 나진까지 오는데 파도가 요란했다. 마치 우리 앞에 불어올 회오리바람처럼 말이다. 나진에서 하루자고 이튿날 원산으로 왔다. 그 때는 38선이 열려 있을 때라 원산에서 열차를 타고 경기도 연천 전곡까지 왔다. 밤에 한탄강을 걸어서 건너야 했다. 어른들 허벅지까지 물이 차올라 우리들은 어른들 목말을 타고 강을 건넜다. 순간순간에 목숨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때였다. 어린아이들은 다들 겁을 잔뜩 먹고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아휴 말도 마! 기가 막혀. 우리 가족은 다들 강을 건넜는데 나만 못 건너고 강 건너에서 기다리고 있었어. 얼마나 애가 타는지, 한탄강이 다 떠내려 갈 정도로 울고 또 울었지. 큰 아버지가 나를 목말을 태워서 겨우 건넜어. 걷다가 또 신발 한 짝을 잃어버려서 그걸 찾겠다고 또 울고불고…. 꼭 총소리가 나야 전쟁인가. 그런 게 전쟁이야. 아휴 말도 마! 기막혀. 전곡역에서는 미군들이 줄을 서서 우리들한테 DDT를 뿌려 대는 거야. 그때는 머리에 이들이 많았잖아. 그 살충제를 사람들한테 그냥 사정없이 뿌려. 그냥 벌레취급 하는 거지. 아휴 말도 마, 기가 막혀”

우리는 용산역으로 와서 천안 외갓집에 짐을 풀었다. 외할아버지는 백영사라는 한약방을 하시면서 영사약이라는 한약을 만드셨는데 솥단지에 불을 떼서 한약을 만들던 그림이 눈에 선하다. 우리는 천안 풍세면에서 살다가 충남 연기군 동면 명학리로 이사를 갔다. 충북 부강초등학교 4학년까지 다니다 6·25 전쟁이 터졌다.

부강초등학교 연흥분교에서 졸업을 했다. 나는 학교 다니는 내내 반장을 했었다. 우리는 옥천 안내 동대리에 친척이 살고 있어서 열다섯 살 정도에 다시 옥천으로 내려왔다. 부강에서 걸어서 걸어서 안내면 동대리까지 왔다. 새벽같이 출발해서 밤이 되어 안내에 도착했는데 친척집에서 된장찌개를 저녁밥상으로 받아먹었다.

배가 고프기도 했지만 된장냄새가 날 때부터 연신 부엌 쪽을 바라보았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된장찌개를 한 숟가락 떴더니 아, 입안에 퍼지는 그 된장 맛에 하루 종일 걸었던 고단한 여정이 다 녹아내렸다. 이날까지 그때 먹어본 된장찌개만큼 맛있는 음식을 먹어본 적이 없다. 물론 산해진미는 먹어봤지만 그 입안을 감아 돌던 구수한 맛은 어떤 요리도 흉내낼 수 없었다. 동대리에서는 밥 먹으면 나무 하러 다니고 그날이 그날이었다. 형님과 나는 둘 다 머리가 좋아 그 시골생활이 운신의 폭이 너무 좁아서 고민하던 끝에 결단을 내렸다. 형님은 서울로 나는 대전으로 나왔다.

군복무 시절


대전에서 첫 직장, 동방 제책사

대전 대흥동 동방 제책사라는 노트 공장에 취업을 했다. 공장에 아가씨들이 150명, 남자들이 50명인 규모가 큰 노트공장이었다. 전국으로 노트를 보급할 정도였고 한창 유행하던 바둑이판 공책 등을 인쇄하는 회사였다. 나는 낮에 일하고 밤에는 중도 극장 골목의 영어수학 학원을 다니며 못 다한 공부의 한을 조금이나마 풀고 있었다.

나는 성실하게 일했고 인사성이 좋았다. 아침에 제일 먼저 출근해서 사장님이 오시면 공장이 떠나가라 “안녕하세요!” 인사를 했다. 가진 것 없던 나의 유일한 승부수였다. 일머리도 좋아 어린나이에 공장장까지 했다. 제대 후에 2년 더 공장을 봐주고 내가 직접 운영하는 인쇄소를 1967년도에 시작했다. 당시에는 대전에 열 군데 정도 인쇄소가 있었다. ‘예광 인쇄소’라는 간판을 내 걸었다. 그날은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지만 그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원동 사거리 뒷골목에서 비싼 기계도 폼 나게 들여놓고 종업원을 고용했다. 처음 시작인데 분수에 넘치는 장만을 하고 3년 만에 막을 내렸다.

내 나이 서른 살에 25살 엄순녀와 결혼하면서 인생의 새로운 반전을 꽤하게 됐다. 아내는 총명하고 배포가 큰 여자였다. 인쇄소를 그만두고 서울 숭실대 앞으로 이사 가려고 서울에서 집도 알아봤다. 이사 준비를 마치고 고속버스 안에서 우연히 ‘주간한국’ 신문을 보게 되었다. 신문을 펼치자마자 나는 눈을 뗄 수 없었다. 타이틀은 ‘경기도 광주 대단지 조성 계획’, 대전만한 도시가 경기도 광주에 들어선다는 소식이었다. 나는 바로 이거다, 라고 결정했다.

로타리클럽에서도 활발한 활동을 했다


1970년대, 신도시 경기도 광주에서 풍운아가 되다

형님과 함께 천호동에서 버스를 타고 경기도 광주에 도착했다. 광활한 벌판에 천막들이 뿌연 연기에 가려 날개만 펄럭이고 있었다. 서부 개척 영화의 한 장면을 옮겨 놓은 듯이 미래가 보였다. 희망이 보였다. 서울 판자촌을 철거하고 그 이주민들이 대거 광주로 터전을 옮겨왔다.

1972년도, 광주에 정착하는 시점에 관청이 들어오고 서서히 학교들이 생기면서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12만까지 차올랐다. 나는 재기를 선언하고 ‘숭문당’ 이라는 인쇄소 간판을 걸었다. 내 인생 최대의 황금기였다. 관공서와 학교에서 쏟아지는 인쇄물이 차고 넘쳤다. 동사무소의 기본 서류인 초본 등본 인감 전입신고서부터 학교 출석부, 연초에는 계획서, 졸업 때는 상장, 밀려드는 인쇄물에 밤새는 줄 모르면서 일하고, 돈 세면서 아침을 맞았다.

짧은 시간에 집을 몇 채나 샀다. 급히 번 돈은 화를 불러일으키는 법이다. 인쇄소 하면서 일식 집 ‘미락’을 운영했다. 규모가 엄청 났는데 개업 날은 문전성시를 이뤘지만 그 또한 오래가지 못했다. 지금이야 횟감 양식을 하지만 그때는 대부분 손으로 잡아 올린 횟감들인데 너무 비싸서 마진을 제대로 챙길 수 없었다. 지인에게 당시 억대의 큰돈도 빌려주며 화근을 불러일으켰고 일식집도 너무 큰 규모라 오래 버텨내지 못했다. 병행하던 인쇄소가 큰 버팀목이 되었다. 그 와중에도 큰 딸이 공부를 잘해서 주소를 강남으로 옮기고 서울로 여고를 보내면서 학구열까지 남한테 뒤지지 않았다. 경기도 광주에서는 회오리바람처럼 풍운아가 되기도 하고 쇠락의 씁쓸함도 맛보았다. 일장춘몽 같은 몇 년을 보내고 나는 옥천으로 내려왔다.

1992년, 옥천으로 귀향하다.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있던 시골, 안내면 동대리에 땅을 사고 1992년도에 옥천으로 오게 되었다. 집식구도 서울 큰 교회 전도사로 재직했던 경험이 있어서 동대리 수양관을 개관했다. 학생들 수련회 시설이나 농촌 체험학교 시설도 계획했었다. 계획만큼 성과가 없었지만 남들 보다 항상 앞서가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먹고 살 궁리를 하다가 보은 5일 장날에 튀밥 튀기는 장사를 보게 되었다. 일도 재미있어 보이고 돈도 제법 될 것 같았다. 시골에 마땅한 간식거리가 없던 시절이라 뻥튀기도 수요가 많았다. 호기심이 생기면 바로 추진하는 성격이라 나는 대구 칠성시장에 가서 뻥 튀기 기계를 사가지고 와서 시작했다. 마음만 앞서서 구식 기계만 사고 제대로 써먹지도 못했다. 다시 대전으로 나가 한번 해보겠다고 마음먹었는데 막상 전을 펼쳐놓고 입을 제대로 떼지 못했다. 아는 사람이라도 보면 어쩌나 뒤통수가 따갑기도 했다.

‘뻥튀기 사세요’라는 말이 도저히 밖으로 안 나왔다. 뭐든 처음은 낯설고 내 옷이 되려면 숙련의 시간이 필요하다. 나도 예외일 수 없으며 지금 나는 그 세월을 지나 옥천시장의 뻥튀기 사장님으로 상인회장을 맡고 있다.


5년 전, 2016년 2월 투석 중 이던 아내를 너무 허망하게 보내는 충격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던 시간이 있었다. 아내는 그날 거실에 나와서 외출준비를 하며 오버코트까지 입었는데 어지럽다고 안방에 잠시 누웠다. 그 잠깐 사이에 숨이 넘어갈 지경에 이르렀다. 아내는 이미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나도 내 정신이 아니었다. 119를 불러서 성모병원으로 갔다가 시간만 지체하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길로 떠났다. 서울 있는 큰딸이 헬리콥터까지 띄워서 혼신을 다했지만 아내는 골든타임을 놓치고 말았다. 곁을 지키던 아내를 준비 없이 떠나보내면서 회한과 슬픔이 한꺼번에 밀려와 견뎌내기까지 시간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아내 떠난 빈집을 지키고 있지만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청년처럼 일할 수 있는 내 사업장이 있어 마음이든 살림이든 궁색하지는 않다. 우리 삼남매가 사회에서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어 애비로서도 흐뭇하다.

고즈넉한 옥천에서 소박한 일터를 가진 노년의 삶이 내게 족하다. 이제 항구에 닻을 내리고 잔잔한 파도를 지그시 바라본다. 감읍(感泣)한 하루다.

저작권자 ⓒ 시사저널 청풍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