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별이 지다…” 원효사 해월큰스님의 발자취

‘님 앞에서는 모두가 빛이어라’

이연자 작가 승인 2021.03.11 16:04 의견 0

교육의 일환으로 ‘불교문화박물관’ 짓고 싶었다는 해월큰스님…우리들의 숙제
아이들 마음속에 ‘생명을 존중하고 타인을 사랑하라’ 씨앗 심어
승납 36년간 무소유와 비폭력, 자율과 화합, 평화와 이타주의 등 용맹정진

해월 스님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무슨 일이든지 무리하지 말고 사정이 허락하는 대로 하라는 성철스님의 말이다. 여기 한세상 부처님의 자비를 실천하신 원효사 해월큰스님이 지난해 6월16일 밤에 입적 하셨다.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고 했다. 입적 후 해월스님의 자비와 주기만 하는 무조건적 사랑,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 이야기 하자면 밤을 새워도 모자란다.

해월 스님


해월스님은 교육에 굉장히 심혈을 기울여 실천하셨다. 처음 유치원을 짓는 것부터 시작해 중고등학교 아이들 법회를 오랫동안 하시고, 공주사대부고 울림불교법회는 열반하시기 전까지 지도하시어 그 안에서 훌륭하게 성장한 제자들이 많다. 그리고 여고, 공고 보리수 학생들에게 청소년 법회도 하셨다. 특히 유치부 아이들에게는 불교적인 가르침의 옛날 우리나라 구연동화를 들려주시고 한자 한 글자를 가지고 여러 해석으로 풀이하여 들려주기도 했다.


또한 근교에 아이들이 불교공부를 할 만한 전시교육관이 없다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셔서 교육의 일환으로 박물관을 짓고 싶어 하셨다. 다구용품, 크고 작은 오래된 역사적 가치가 있는 불상들과 경전들, 병풍, 손수 쓴 글과 그림 등 상당히 많은 귀한 자료들을 보관해 왔는데, 안타깝게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불교역사박물관’을 우리들의 숙제로 남겨두신 채 열반에 드셨다.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는 사고 난 아들로 인해 시작해 22년간 해월스님과 깊은 인연을 맺고, 건축과 인테리어 사업을 하고 있는 이수일 대표가 해월스님 열반 후 스님의 고마운 마을을 생각하며 자기가 잘 할 수 있는 건축과 인테리어를 살려 감사의 마음과 사랑으로 원효사를 수리, 아름답게 꾸미고 해월스님의 염원이었던 불교박물관을 작게나마 불교 전시관으로써 이루어 원효사를 찾는 이들에게 스님의 교육 자료를 소개한다는 소식을 들은 데 있다.

이수일 대표와 해월 스님


이수일 대표와 해월스님 입적 후 출가하신 동생 심인스님(원효사 주지, 원효유치원 원장)으로부터 해월스님의 발자취를 들어봤다.

이수일 대표


해월스님과 22년간 깊은 인연을 나눈 어느 가장의 이야기

염화미소(拈華微笑)란 “말로 통하지 않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한다”는 의미로 불립문자, 이심전심 등 석가모니가 영산회(靈山會)에서 연꽃 한 송이를 대중에게 보이자 마하가섭만이 그 뜻을 깨닫고 미소를 지음으로써 그에게 불교의 진리를 주었다고 하는 데서 유래한다. 우담바라는 3천 년에 한 번 핀다는 천상의 꽃으로 모든 인간은 우담바라처럼 소중하다는 뜻이다. 온 우주가 전율하듯 피어내는 절절한 신비의 꽃 우담바라보다 더 귀한 인간은 한 생각으로 온 우주를 담을 수 있다.

1998년 7월 31일. 죽을 확률 97%

큰아들 재형이가 6살이던 98년 여름방학에 아내가 재형이와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이웃집 6학년 아이를 같이 데리고 시골에 갔다. 윗동네 친구 동생이 운전미숙으로 트럭을 과속으로 몰면서 달려오고 있었다. 친가의 집 앞이 국도 3호선인데 6학년 형아와 재형이가 손을 잡고 건너가다가 달려오는 트럭을 보았다. 6학년 형아는 손을 놓고 혼자 되돌아가고 6살 재형이는 멋모르고 있다가 트럭에 머리를 부딪쳐 공중으로 날아갔다.

재형이는 김천 도립병원을 거쳐 대전종합병원에 저녁 6시쯤 도착했다. 병원에서는 중환자실에 올려 보내지 않았다. 이미 죽을 확률이 97%였기 때문이다. 다음 날 새벽 4시 30분에 중환자실에 올려 보내진 재형이는 그날부터 5개월간 중환자실을 거쳐 총 4년 반을 병실에 있었다. 그날부터 장모님과 나는 한 달간 매일 새벽 갑사 근처로 새벽기도를 다녔다. 갑사 위쪽의 어느 암자에 쌀 20kg를 지고 108배를 마치고 나오려니 거기 스님이 “왜 그렇게 새벽기도를 하느냐?”고 물어 자초지종을 말했다. 가만히 듣던 스님이 전화번호를 주면서 공주에 가면 한의원을 하는 스님이 좋은 일 많이 하시니 그리로 가보라고 했다.

해월 스님


해월 스님과 재형이 만나다

그날 바로 한의원에 가서 해월 스님을 만났다. 스님이 운영한다는 한의원은 규모가 작지만 따스함이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대전을 비롯한 각처에서 단골손님이 많다고 들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신도들이나 노인들, 빈곤한 분들에게는 진료비를 받지 않고 우선 치료부터 하고 약부터 먹으라고 했다.

내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 해월 스님은 당장 그날 저녁에 병원에 가보겠다고 하셨다. “내가 한 번 봐주겠다.” 그 한 마디만 했다. 아이를 고쳐주겠다는 말은 단 한마디도 없었다. 스님은 그날부터 종합병원 중환자실에 거의 이틀에 한 번 왔다 가셨다. 알다시피 중환자실은 아침 10시와 저녁 7시 두 번의 면회를 개방하는데 가족 포함 2명이 면회가 가능해서 스님과 내가 같이 들어갔다.

한의사로서 왕진이지만 대가도 바라지 않았고 1년 넘게 이틀에 한 번씩 비와 눈이 오면 다니기 힘든 그 시절에 마티 고개를 넘어 병원을 다녔다. 내가 한의원으로 못 가면 대전으로 나가는 환자의 차를 타고 병원으로 오셨다.

중환자실이라 공개적으로 침을 오래 놓고 있을 수가 없었다. 승복을 입은 채 기도한다는 명분으로 침을 꽂고 빼고를 반복하며 1시간 내내 계셨다. 그러한 노력으로 뒤틀렸던 팔다리가 제자리로 돌아와 주었다. 중환자실 5개월 만에 일반 병동으로 나왔지만 그래도 1년가량 스님은 왕진을 그만두지 않았다. 사랑을 뜻하는 love는 산스크리스트어 로바(lobha 탐욕)에서 온 것이라 한다. 탐욕을 부드럽게 풀어헤치면 사랑이 된다는 깊은 뜻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사랑은 나누는 것이기에 스님은 보답을 받지도 상대방의 고마움도 바라지 않는다. 한 번도 사례를 한 적도 없다. 처음에 한의원에서만 만났기에 절이 있다는 것도 몰랐다. 딱 한 번 통사정 끝에 소박한 식사 한 끼 대접한 것이 치료비의 전부였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지혜와 자비의 두 날개로 날아가는 새로 비유한 표현이 있다. 지혜와 자비는 동일하여 분리할 수 없다. 즉 지혜가 없는 자비는 참 자비가 아니고 자비가 없는 지혜는 참 지혜가 아니기 때문이다.

해월 스님은 전통과 관습에 따른 무조건적 신심도 거룩한 면이 있지만 보리심(菩提心)에 다가가기 위해서 체험을 중요시 여긴 것 같다.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것이 진정 불자의 수행이며 본인 역시 연민과 자비를 실천했다. 스님의 자비의 실천은 일상에서 매일 되풀이 되는 보편적인 행함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스님은 오고 감이 없이 고요했다. 언제나 고요해서 마치 본성처럼 보였다. 수행과 생활이 분리되지 않고 부처님의 초기 가르침처럼 일상생활이 수행이고 법이었고 그의 삶 전체에 일관되게 작동했다.

얼핏 광대한 우주심(心)을 보았다

스님에게 가장 고마웠던 것은 아낌없이 주면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재형이를 새로 태어난 아들이라고 해주었다. 스님은 일체 채식만 하셨고 바깥 음식도 별로 안 드셨다. 송광사 암자로 은사 스님을 뵈러 8시간 왕복하던 때도 출발 전에 식사하고 암자에 도착해서 드시고 원효사로 돌아와서 절밥을 드셨다. 이십여 년 넘도록 “곡차인데 한 잔 해볼까?” 하고 딱 두 모금 드신 것만 보았다. 나도 맛은 봐야지, 술맛이 뭔지는 알아야지 하면서 해맑게 웃었던 모습이 선연하다. 수행자 본연의 정신으로 너무나 정직하고 검소했다. 아이들을 굉장히 사랑하셨다. 여러 기관에서 불교에 대한 강연과 침 봉사 등 선행도 무수히 행했지만 담백한 성품으로 인해 구설수에 오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해월 스님은 타인의 고통을 직시하는 깊은 마음의 눈과 바다와 같은 연민의 마음을 가졌다. 불교에는 수행하는 비구와 비구니가 있으며, 보살이라는 존재들이 있다. 우리나라에 오랜 전통 불교를 저절로 접한 수많은 어머니들을 절에서는 보살이라고 호칭한다. 보살은 ‘고통에 빠져있는 모든 중생이 구원받을 때까지 자신은 결코 열반에 들지 않겠다고 맹세한 수행자’라는 참으로 존귀한 존재이다. 보살은 자리(自利)와 이타(利他)가 완전한 조화를 이룬 사람이다. 나는 해월스님이 스님이라는 권위보다 더한 보살행을 살았다고 느꼈다. 스님은 차에 항상 삽과 가방을 넣어 다녔는데 그 이유는 로드킬을 당한 고양이의 사체를 수습하기 위함이다. 당황해서 뛰어든 길 위에서 무참하게 부서진 사체를 잘 수습하면서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열 번 외우며 외로움을 달래주었다.

우금치 영산제


우금치 영산재, 동학혁명 영가 천도

또한 해월스님은 2013년 10월 3일 ‘제1회 우금치 영산재’를 봉행했다.

구한말 동학혁명 당시 최대의 격전지였던 공주 우금치에서 희생된 영령들의 원혼을 달래는 행사로 우금치 동학혁명 위령탑에서 당시 희생된 민관군 등 수만 명 영가의 넋을 천도하고 극락왕생을 기원하고 동학혁명군의 순국정신을 기리기 위함으로, 밖에 쾌불을 모셔서 천도제를 지내드린다는 게 쉬운 게 아닌데 해월스님은 ‘우금치 영산재’를 3년 내내 봉행했다.

우금치 영산제 -영가옷 2만벌

<해월스님의 심우실에서>

오늘 같이 비가 내리는 날 우금치에 오르면 나는 왠지 마음이 아프고 100여 년 전 그날 고개 너머의 고통과 함성이 귀에 들리는 듯합니다. 우리 원효사가 1972년에 지어졌고, 우금치 동학혁명탑이 1973년에 세워졌으므로 나는 중학교 시절부터 우금치와 함께했습니다. 강산이 네 번이나 바뀐 지금 우금치에 서서 한눈에 들어오는 공주 시가지를 바라다보며 그 지세가 현묘함을 다시 한 번 새겨 봅니다.

이곳만 동학교도들과 농민군이 넘었더라면 우리나라의 근현대 역사는 새로 써졌을지도 모르는 그런 역사의 현장인 우금치 고개는 여러해 전에 부여 가는 도로를 낮추고 확장하면서 새로이 만들어진 우금치 터널이 있어서 고갯마루 좌우를 연결했습니다. 터널 위쪽으로는 동학과 동민들을 생각하는 추모객들이 세웠을 대나무를 갈라 철근을 넣고 조립하여 만든 대나무 사람들이 7~8개가 만들어져 세워있었습니다. 그러나 지난해 모진 비바람이 치던 때에 한 개만 남고 모두 넘어져서 그대로 방치되고 있습니다. 이는 ‘사람이 하늘’이라고 외치면서 일어났던 불꽃 같고 열화와 같았던 민중의 함성들이 넘어지고 부서져서 좌절된 것처럼 남아있어 이를 보는 마음이 처연하기까지 합니다.

뜻있는 인사들이 나서서 새로 일으켜 세우든지, 아니면 너무 상하여 안 되겠다 싶으면 철거를 하고 다시 세우는 방법도 모색해 볼 수 있으련만 거의 한 해가 다 가도록 변화가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은 탑 주위로 백목련과 개나리가 만개를 하고 누군가 심어두었을 커다란 단풍과 느티나무 등에 연초록의 새잎이 그때의 함성처럼 마구 돋아 오릅니다.

1년에 수없는 학생과 참배객들이 답사 차 다녀가고 교대부속초등학교 어린이들이 소풍을 다녀가는 장소로 종종 이용되는 우금치 동학혁명탑 주변이 우리 공주에 사는 시민들의 관심과 호응 속에서 아픈 역사의 현장을 넘어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설계하는 사랑스런 장소로 자리매김하기 바랍니다.

또 하나 바라는 바는 혁명탑을 세우면서 그 과정을 새긴 두 개의 비석에 대통령 박정희라는 이름 석 자가 두어군데 있었지만 누군가의 손에 의해 정으로 쪼아져서 알아보기 힘들게 된 모습도 있으니 훼손된 것도 우리 역사의 한 단면이라 생각해 한쪽에 빼어 보관해 놓고 새로 만들어 대치하는 것으로 멀리서 온 학생들이 동학의 상황을 알기 쉽게 만들어주는 작은 배려도 있어야 하겠다는 생각입니다.

작게는 만 명에서 많게는 4~7만에 이르는 사람들이 뜻을 펴지 못하고 크나큰 한을 안고 돌아갔던 장소이니만큼 동학교도나 시민단체, 농민회 등이 추모에 그치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향을 피워 올리고 헌화하는 그런 장소로 거듭 자리매김하는 때가 오기를 축원합니다.

해월스님 작품


자비의 실천

자비의 자(慈, maitri친구 산스크리스트어)는 ‘진정한 우정, 순수한 친애의 마음’을 뜻하며 비(悲, karuna동정 산스크리스트어)는 연민을 뜻한다. 즉 자비는 함께 상처를 나눈다는 뜻이다. 특히 불교의 자비는 인간을 초월하여 우주의 모든 존재까지 이어진다. 고통 받는 사람들을 향한 부처의 마음으로 불교의 핵심 덕목이다. 자비의 두 글자 모두에 마음 심(心)이 들어 있는데, 마음을 어떻게 써야 하는가 하는 방법론과 연민을 가지고 괴로움을 없애려는 마음을 보여주는 글자 같다. 해월스님은 자비를 실천하기 위해 상당히 오랫동안 준비를 해왔다. 그것은 먼저 자신을 한의사로 만든 작업이다. 원광대한의학과에 76학번으로 입학했다.

12·12 군사반란과 광주 시민에 대한 유혈진압으로 권력을 잡은 신군부 측이 국민적 저항을 미리 막기 위해 불교를 탄압의 본보기로 삼았다. 해월스님은 원광대학교에서 불교학생회 활동을 열심히 하던 중 10·27법난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부처님 도량을 짓밟은 탄압현장을 목격하고 출가를 결심했다. 출가 먼저 행하고 4년 후인 1988년, 공주산성시장 건너편 중동 먹자골목 2길에 자그마한 불광한의원을 개원해서 2004년까지 운영했다. 불자 한 명이 길에서 만난 고물장수 리어카에 실려 있는 자그마한 불상을 한의원에 모셔놓았다. 그곳은 자연스레 사람과 사람을 따뜻하게 연결해 주는 에너지의 장이 되었다.

스님이 한 일은 자비가 명상이나 기도 안에 갇혀있지 않도록 하는 일이었다. 누군가에게 아주 조그마한 것이라도 베풀 수 있다면 그것은 커다란 축복이다. 경(經)에 쓰여 있는 문자 너머에 버리고 또 버려 오직 진리 하나만 남겨놓은 해월스님은 진실로 하나이자 최고의 사랑을 실천하는 모습을 나에게 보였기에 수백만 명에게 보여준 사랑보다 더 지극하였다고 나는 말할 수 있다.

날아온 새에게 준 일용할 양식


해월 스님은 내게 용서와 감사를 알게 했다

용서란 쉬운 것이 아니다. 화해도 쉬운 것이 아니다. 무조건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 처음에는 쉽지 않았다. 가장 큰 수행은 바로 용서이다. 아이의 느닷없는 사고로 부조리한 현실에서 만나는 벽은 현실에서 느끼는 고통만큼이나 견고했다. 나의 감정은 롤러코스터처럼 급격하게 흔들렸다. 마음 깊숙한 곳에 이리저리 꾸깃꾸깃 쭈글쭈글 구겨놓은 참담함 억울함 미움 서러움 분노 원망 슬픔과 절망의 감정 덩어리가 치밀어오를 때가 많았다. 그날의 기억, 사고 이전의 재형이와의 추억들. 저장된 기억은 특정한 조건 아래 인간의 신경회로를 통해 발화하고 회상의 과정을 통해 원래의 이미지와 비슷하게 저장된 이미지를 기억한다. 꼬맹이 재형이에 대한 그 오롯한 기억은 몇 억 만년이나 멀게 느껴진다.

해월 스님은 고통의 한가운데에서 바짝 말라비틀어진 나의 마음을 보듬어주었다. 재형이와 중환자실에서 오롯이 한 시간씩 함께 보낸 시간으로 내가 치유되기 시작했다. 그전에는 수행하는 사람들의 말이나 명상하는 사람들의 표현은 분명 아름답게 들리지만 그것은 내가 도달하지 못하던 관념의 세계였고 언어의 유희일 따름이었다. 그들의 말은 팍팍한 현실을 잠시 잊게 해주는 당의정 같은 진통제일 따름이었다. 그럴싸하게 포장되어 중생을 현혹시키는 굴레일 뿐이다. 그런데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재형이를 섬기는 듯한 스님의 겸손이 나를 일으켜 세웠다.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고, 누구에게도 요구하지 않았던 스님이셨다. 스님 자신을 위해 물건을 구매하는 것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거처하던 요사채에서 도배와 장판도 40년 동안 그대로 사용할 정도로 청빈한 수행의 삶을 이어갔다. 밥은 하늘아래 굶는 이 없이 모두가 똑같이 나누어 먹어야 함을 실천하였고, 유치원부터 학생회에 이르기까지 그 고귀한 정신을 교육하였다.

해월 스님은 학승이지만 한편으로는 철저히 자유인이었다. 가장 엄격하게 종교적인 계율을 지키는 스님이었지만 종교적 방식이 주는 이데올로기에 얽매이지 않았다. 세상이 알려주는 성공의 법칙에도 매달리지 않았으며, 삶을 있는 그대로 생생하게 살아갔다. 자신이 만나는 모든 관계의 스펙트럼을 무한하게 확장하는 것은 그의 겸손한 자세와 헌신의 마음 그리고 연민이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자꾸 몸이 마르고 공양을 하시기 힘들어지시기에 건강검진을 하신 결과 건강상태가 많이 안 좋은 상태였다. 이대목동병원에서 1차 수술은 하셨지만 본인의 상태를 아신 듯 더 이상의 치료는 필요 없다고 하시어 절에 내려가시길 원하셨다. 호스피스 병동도 거부하시는 말씀이 워낙 완강해서 누구도 스님을 거부할 수가 없었고 순리대로 가겠다는 스님 앞에 아무도 저항하지 못했다. 임종하실 때 심인 스님이 “한 말씀 해 주십시오.”하고 여쭈니, “한 세상 잘 살고 간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희미한 미소와 함께 눈을 감으셨다.

님 앞에서는 모두가 빛이어라

중생에 대한 연민, 존재가 보여주는 슬픔과 희망도 스님을 흔들지 못했다. 그는 만나는 여러 사람들과 가지는 관계에서 모든 이들을 언제나 온전하게 그리고 진실하게 섬겼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이 가진 본래의 마음과 본질을 깊이 이해하였던 스님은 언제나 현명하고 선선하게 아무런 편견 없이 마주치는 사람들을 대했다.

습관적이고 기계적인 관계에서 미움과 분노와 비판으로 지친 사람들에게 보다 깊은 차원이 있음을 보여주고 사랑을 실천하라고 주문했다. 대단한 것이 사랑이 아니라 눈앞에 보이는 휴지를 당장 줍는 것이 더 위대하다고 안내하며 영적 성장으로 가도록 도와주는 스승이었다. 자신에게는 엄격한 계율로 찬란한 해탈의 절대 자유와 행복을 추구했다면 타인에게는 무량한 마음으로 겸손함과 관대함으로 대했다.

반야심경의 내용대로 인간은 자신이 지닌 고유한 유전자와 문화와 언어를 토대로 구축한 자신만의 정신세계에 살고 있다. 선한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연못의 잔물결처럼 퍼져나가 세계가 밝아지기를 희망한다. 나의 기도는 우주의 이치대로 흘러가 세상이 밝아지리라. 해월스님은 여기에 더해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더라도 깨닫기 위해 실천에 옮기라고 말하였다. 그래 실천이다. 이기적인 관점이 아니라 진정한 우주의 일부분으로 평화를 실행하리라.

한의원 운영에서 나온 수익금을 기반으로 원효유치원을 설립해 20여 년간 운영하면서 아이들 마음속에 생명을 존중하고 타인을 사랑하라는 씨앗을 심어주었다. 새싹 아이들은 자그마한 들꽃에서조차 억겁의 인연을 볼 수 있는 깊은 마음을 배웠을 것이다. 지금 여기 이 순간이 영원의 응축된 모습과 시간과 매 한가지로 매일을 새롭고 신선하게 살아야 하는 책임과 의무가 있으니, 권리와 노력도 승계하도록 요구했다.

1984년부터 생성된 울림불교학생회(어린이법회, 청소년법회, 청년회법회)에서 퍼져나간 인재들이 공주를 비롯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이 불성을 지닌 존재로서 모든 사람을 섬기면서 우리 사회를 밝게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과 삼라만상 그리고 우주는 깊은 단계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처럼 만물이 근원적인 차원에서 상호의존적일 뿐 아니라 결코 개별적으로 분리될 수 없기에 해월스님에게서 퍼져 나온 실천의 행이 두루두루 퍼져 나갈 것임을 나는 굳게 믿고 있다.

아이처럼 순수한 마음 즉 초발심으로 구도의 길을 훠이훠이 걸어가던 해월스님. 지나간 과거를 안타까워하지도 다가올 미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지 말라고 할 것이다.

원효사 불교용품 전시장


창가에 비치는 아침햇살만큼이나 청명하고 생기 가득한 그의 미소는 내 가슴에 남아있다.

법륜종 종단 소속인 원효사는 현재 심인 스님이 주지 소임을 맡고 있다. 불경 상당수, 다구용품, 크고 작은 오래된 역사적 가치가 있는 불상들과 경전들, 병풍 등 상당히 많은 귀한 자료들을 보관해온 해월스님의 유지를 이어서 성보박물관의 확장의 의지가 있다.

이수일 대표


건축과 인테리어가 주 업인 이수일 대표는 해월스님 열반 후 원효사 곳곳을 본인의 손으로 수리하고 아름답게 꾸미며 해월스님의 염원인 불교박물관을 작게나마 구현하기 위해 원효사 2층에 불교전시관을 만들어 사랑과 정성을 다해 멋진 인테리어로 꾸미고 해월스님의 작품과 교육 자료들을 전시했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곳곳에서 이수일 대표의 사랑과 해월스님을 향한 따뜻한 마음이 느껴진다. 어느 누가 한다고 해도 이런 아름다운 전시관은 나오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다. 하루빨리 해월스님이 못 다한 ‘불교문화전시관’이 지어져 어린 학생들의 교육의 장이 되길 바라본다.

원효사 불교용품 전시장


원효사 불교용품 전시장


이수일 대표가 운영하는 정광건설(주)은 작지만 알차고, 고객의 만족을 최우선으로 생각한다. 모든 역량을 집중하여 완벽한 시공을 목표로 하는 건축사업 분야와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고의 효과를 내는 가성비를 자랑으로 삼는 인테리어 분야가 있다.

건축사업 분야는 다양한 건축물의 신축시공, 리모델링을 전문으로 하고 있으며, 다가구 및 전원주택의 신축시공, 판매등도 활발히 하고 있다. 또한 인테리어사업 분야는 각종 금융기관, 병원, 상가, 아파트 등 여러 분야의 내·외부 인테리어를 시공하고 있다. 이수일 대표는 올해를 새로운 목표를 향한 도약의 원년으로 정하고 ,업계 최고의 회사로 가기 위해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했다.

해월스님의 뒷모습


인터뷰를 마치며

바람결에 전해들은 아름다운 우정 이야기를 인터뷰하고 싶었다. 해월스님은 2020년 6월 16일 입적, 승납 36년간 무소유와 비폭력, 자율과 화합, 평화와 이타주의 등 수많은 용맹정진이 있었다. 하지만 필자는 오직 힘든 시간을 함께 하면서 고통을 영겁의 빛으로 승화하도록 한 만남을 말하고 싶었다. 한 가장의 입을 통해 피어난 우담바라 향기는 지난한 질곡의 삶을 사는 우리에게 오랜 향기로 남을 것 같다.

해월 큰스님


1982 원광대학교 한의과대학 졸업

1984 운호 대천스님 문하로 입산

1986 송광사 천자암 활안스님을 은사로, 일각스님을 계사로 사미계 수지

1990 범어사에서 자운스님을 계사로 비구계 수지

2010~ <한국불교 법륜종> 총무원 부원장. 재단법인 한국불교 법륜종 이사

2019 대종사 품계 수지

2020 6 16 세수64세, 승랍 36세를 일기로 입적

1989~2004 공주 시내에 불광한의원 운영

1993~1998 옥룡동 금강사회복지관 침 봉사활동

2013~2020 반죽동 공주노인종합복지관 등에서 침 봉사활동

1997 공주 중동에서 특수아동 조기교육실 잠시 운영

1990~ 원효유치원 설립 및 이사장

1998~2020 원효사 주지

저서

산에 가면 길이 있다(2000)

대예참문(2007), 대예참문-소(小)(2008)

화엄대예문(2008)

우리도 부처님 같이(2011)

신문으로 본 근대공주불교(2012)

공주사지순례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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