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완 시인의 그림책 산책] 『민들레는 민들레』와 『오소리네 집 꽃밭』

이해완 시인 승인 2021.04.12 14:29 의견 0

꽃들이 대지를 수 놓는 4월을 맞아 준비한 그림책은 『민들레는 민들레』와 『오소리네 집 꽃밭』입니다. 『민들레는 민들레』와 『오소리네 집 꽃밭』 은 우리 주변의 작은 것들의 소중함을 일깨워줄 겁니다.


『민들레는 민들레』

글 : 김장성

그림 : 오현경

출판사 : 이야기꽃

높은 아파트들이 숲처럼 빽빽한 사이를 지나온 봄바람이 무슨 할 말이 있어 저렇듯 떠들어대는지 궁금해서 거실 창문을 열었다. 배드민턴장에서 공을 가지고 노는 아이,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아이.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을 나선 가족들이 여기저기 보인다.

바람이 한차례 거실로 들이치자 보름이가 쪼르르 달려와 내 곁에 자리를 잡는다. 보름이의 눈동자 속에는 산책 나온 개들이 들어서 있을 것이다. 개들의 이동 경로를 따라 보름이의 눈도 움직인다.

보름이의 바람을 들어주려고 “보름아, 산책 가자!” 하고 외쳤더니, 꼬리를 흔들며 재빨리 현관 쪽으로 달려간다. 새로 산 하네스를 채우고 아파트를 빠져나와 거리를 산책하는데 노란 민들레가 보도블록 틈 사이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다. “보름아, 이 꽃은 민들레야. 예쁘지?” 내 말을 알아듣는지 못 알아듣는지 알 수는 없지만, 코를 킁킁대며 꼬리를 흔든다.

꽃을 들춰보니 총포가 아래로 처져있다. 내 예상대로 서양 민들레다. 이 녀석의 선조는 1900년대 초반 유럽에서 배를 타고 건너온 누군가의 바짓가랑이나 신발에 딱 붙어 머나먼 한국 땅까지 왔을지 모른다. 항구의 구석진 모퉁이에 터를 잡고 씨앗을 틔우고 노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었다가 바람이 불면 그 바람을 따라 날아가 터를 잡고 그렇게 이어졌을 것이다. 그런 끈질긴 생명력으로 지금 나와 마주하고 있는 것이리라. 이제 꽃이 지면 꽃 진 자리에 탁구공처럼 둥근 씨앗들이 맺힐 것이다. 그러면 또 그 씨앗들은 바람을 타고 새로운 터전을 찾아 떠날 것이다.

『민들레는 민들레』는 2015 라가치상 수상작이다. 이 책에 대한 심사평을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소개한다.

“이 시적인 그림책은, 씨앗에서부터 바람에 흩어져 날리기까지 민들레의 한 생애를 아름답게 보여주고 있다. 여백을 잘 살린 섬세한 수채화와 최소한으로 절제된 간결한 글은, 도시에 사는 한 식물이 어떻게 자라나고 어떻게 살아남는가를 힘주어 말함으로써, 작고 약한 생명들이 삭막한 환경을 꿋꿋이 이겨내는 모습을 보여주며, 무엇보다 우리 삶 속에서 가장 평범한 것들이 가장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ㅡ2015 라가치상 심사평

어린 시절, 나는 민들레 씨를 보면 꽃대궁을 꺾어들고 푸른 하늘을 향해 후후 불어 날렸다. 민들레 홀씨들이 훨훨 날아 멀리멀리 가서 더 많은 꽃을 피우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보름이와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다 보니 나설 때는 못 봤던 민들레들이 보도블록 사이에 꽤 많다. 민들레를 밟지 않으려고 땅을 보며 오는데 문득 일제강점기 '조선어학회'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영화 ‘말모이’ 속의 대사가 떠오른다. 문 사이사이에서도 억척스럽게 문 둘레에까지 마구 피어서 문둘레로 불리다 민들레가 되었다는.


『오소리네 집 꽃밭』

글 : 권정생

그림 : 정승각

출판사: 길벗어린이

한밭도서관에 들렀다가 보문산에 올랐다. 평일인데도 사람들이 많다. 길가에는 나무들이 손에 손마다 꽃송이를 들고 반긴다. 그래서인지 사람들 얼굴도 환하다. 발아래를 보니, 풀들 사이에 이름 모를 작은 꽃들이 “저요! 저요!” 손을 들고 서로 먼저 시켜달라고 외치는 초등학교 저학년 교실의 어린 학생들처럼 자기를 봐달라는 듯 얼굴을 내밀고 있다. 이렇게 예쁜 꽃들의 이름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에 미안해진다. 사람들은 이런 아름다운 꽃들을 좀 더 가까이서 보려고 꽃밭을 가꾸고 정성껏 돌보지 않나 싶다.

그래서 이번에 준비한 책은 권정생 선생님이 글을 쓰고 정승각 화가가 정감있게 그려낸 ‘오소리네 집 꽃밭’이다.

동그란 먹선 속에 오소리 아줌마가 울타리 뒤에서 학교 꽃밭을 훔쳐보는 표지 그림을 보고 있자니, 그 동그란 원이 과거로 통하는 문이라도 되는 듯 옛날로 나를 이끈다.

어릴 적, 우리 집 마당에는 작은 꽃밭이 있었다. 거기에는 채송화, 봉숭아, 맨드라미, 나팔꽃, 접시꽃, 코스모스, 그리고 해바라기가 우리 가족의 보살핌 속에서 오손도손 근심 없이 자라고 있었다. 어머니와 누이들이 꽃밭을 만들고 씨를 뿌렸을 터이다.

아버지가 술과 사람을 좋아하고 남 퍼주기를 좋아해서 정작 우리 가족의 삶은 궁핍했지만, 어머니는 키 큰 나무 밑에서 바둥거리면서도 끝내는 꽃을 피워내는 채송화처럼 우리 여섯 남매를 꿋꿋하게 키우셨다.

아버지가 저세상으로 떠난 뒤, 어머니는 여섯 남매를 홀로 건사해야 했다. 장사를 마치고 귀가하면 고단한 몸을 뉘일 틈도 없이 집안일이 또 한가득이었을 텐데, 어머니는 꽃밭을 일구셨던 것이다.

꽃밭에 봉숭아가 피면 누이들은 꽃잎을 따서 손톱에 봉숭아 꽃물을 들였다. 봉선화 꽃을 따서 잎사귀와 백반을 넓적한 돌 위에 놓고 작은 돌멩이로 찧어서 손톱에 붙인 뒤 헝겊이나 비닐로 싸고 실로 총총 감는 모습을 나는 턱을 괴고 흥미롭게 바라보곤 했다.

장독대 옆에서 깔깔대며 손톱에 봉숭아물을 들이던 누이들은 어느덧 할머니가 되었고, 우리를 그 어려움 속에서도 꽃처럼 티 없이 키워주신 어머니는 별이 되셨다.

‘오소리네 집 꽃밭’의 오소리 아줌마는 50년 묵은 밤나무가 뿌리째 뽑혀 넘어질 만큼 무서운 회오리바람에 40리나 떨어진 읍내 장터까지 날아갔다가 사람들이 운동장 둘레에 만들어 놓은 꽃밭을 보고 자신도 그런 예쁜 꽃밭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다.

꽃밭을 만들려고 괭이질을 하다가 오소리 부부는 집 주변이 그대로 들꽃밭이었음을 알게 된다. “영차!” 여기를 찍어보면 패랭이꽃이요, “영차!” 저기를 찍어보면 용담꽃이다. 꽃이 안 핀 데를 찾아보지만 여기도 저기도 다 꽃이다. 잔대꽃, 도라지꽃, 용담꽃, 패랭이꽃…….

결국 오소리 부부는 일부러 꽃밭을 만들지 않아도 집 둘레가 예쁜 꽃들이 지천으로 피어있음을 깨닫고 꽃밭 만들기를 그만둔다.

몰라서 그렇지 가만히 눈여겨보면 우리 주변에도 예쁜 꽃들이 널려 있다. 어디 눈에 보이는 꽃만 꽃이겠는가. 겨울이면 온 산 가득 피어나는 눈송이가 눈꽃이듯, 내 가족의 이야기가 꽃이고, 내 이웃의 삶이 꽃인 것을!

● 이해완 약력

- 시인

- 시집 우리시대 현대시조 100인선에 선정되어 『내 잠시 머무는 지상』 태학사 발간

경기문화재단 우수작품 창작지원 작품에 선정되어 『수묵담채』 고요아침 발간

『한국을 움직이는 인물들』 수록, 중앙일보 간

- 대전시민대 동화창작 강의

- 한국그림책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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