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희 작가의 추억의 뜰] 어버이날, 7남매가 준비한 특별한 선물, 1941년생 예산 고덕면 상장리

김경희 작가 승인 2021.05.10 16:00 의견 0

인향만리
―작은 거인 송수돈 어머니 인생 에세이

신한은행 박○정 차장은 7남매 중 막내딸이다. 남매들은 주말이면 앞 다투어 고향집 마당에 차를 들이댄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어머니를 차에 모시고 산으로 들로 떠난다. 산해진미가 곁들여져 어머니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여인이 된다. 그 7남매가 2021년 어버이날에 준비한 특별한 선물은 어머니 인생 에세이다. 모든 어머니들이 입버릇처럼 하신 말씀, “내 얘기, 책으로 쓰면 열 권도 더 나온다.”

7남매는 어머니 책에 담을 편지를 쓰면서 서로 경쟁하듯이 어머니에게 사랑을 드러냈다.

가슴 촉촉해지는 7남매와 어머니의 추억 보따리 중 네 가지 매듭만 풀어본다.

무명천에 핀 목단 꽃은 고덕면 상장리 시골 마을, 여산 송씨 할머니와 많이 닮았다. 365일 내내 고단했던 그 때는 무명천 밑에 실타래처럼 얼기설기 매듭을 풀 수 없이 하루하루는 뒤엉켰다. 한 올 한 올 풀어가면서 무명천위로 목단꽃이 피어올랐다. 한숨과 세월로 한 땀 한 땀 놓은 수는 자태 고운 목단꽃은 코끝을 간질거리는 향기대신 80년 켜켜이 쌓인 인생의 향기로 마당 한 편에 도란도란 모여 앉았다.

발그레한 뺨이 붉어 꽃봉오리 같던 봄날의 청춘을 뒤로하고 이제는 고향 마을의 뿌리 깊은 나무가 되었다. 아득히 멀리 와버린 그 날의 기억들, 안타깝지만 허망하지 않은 건 두꺼운 외피를 벗고 속살을 기꺼이 내보일 수 있는 내공이 다시 만들어졌다.

‘딸부잣집 엄마’

딸만 줄줄이 낳던 시절에는 그 이름이 반갑지 않았다. 세월이 변해서 이제 딸부잣집 엄마들이 으스대는 세상이 됐다. 오래 살다보니 이런 좋은 세상을 만났다. 변하지 않은 건 우리 아이들이 나고 자란 우리 집, 시집와서 큰형님내외와 같이 살다가 5년 만에 이 집으로 제금 나와서 그 이후로 내내 이 집에 주소를 두었다. 주신이, 주미, 주란이, 주윤이, 주나, 은주, 은정이 우리 7남매가 서로 주고받는 남매의 정도 모양새가 달라지지 않았다. 우리 애들의 정이 넘쳐 나이든 내 차지까지 온다. 내가 서글플 겨를이 없게 하는 우리 아이들, 내가 한숨 쉴 틈이 없게 하는 우리 아이들. 필목장사 하던 시누가 자주고름 노란저고리로 나를 꼬드겨 열여덟 살에 시집가서 쪽잠자며 고단했던 날들, 줄줄이 딸만 낳을 때는 마음고생에 기댈 곳이 없었다.

남편 먼저 보내고 허전함을 달랠 길 없던 그 날들도, 이제 덤덤하게 지난 기억의 저편에 자리 잡았다. 아프지 않은 건 지금 더 행복한 추억 보따리들이 많기 때문이다. 골 깊은 주름이 여든 살이 넘은 나를 가리켜주지만 아직도 텃밭에 나가 손을 놀릴 수 있다. 주말이면 집 마당에 꽉 들어찬 우리 아이들 차가 나를 싣고 꽃놀이, 맛있는 집 찾아 가느라 쉴 틈이 없다. 나만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남편한테 미안한 마음에 꿈에서라도 보려나 마음 졸이며 잠을 청하지만 어째 그이는 한 번도 보이지 않는다. 야속한 그니. 잘 있다는 말일 게다. 무소식이 희소식이 되어 나는 여기에서, 그니는 거기에서 잘살고 있다.

내 삶이 무명천에 핀 목단꽃처럼 자수천 밑으로 얼기설기 실타래가 엮였지만 자수천 위로 피어오른 목단꽃은 내 인생처럼 곱게 피어났다. 인향만리라고 했던가, 내 인생의 진한 향기가 만리까지 퍼져 우리 아이들 곁에 내내 머물 수 있다면 여한이 없다.

추억 보따리 매듭, 네 가지만 풀어보자면…

첫 매듭

―노란저고리 끝동이 맺어준 천생연분

열일곱 살, 필목 장사하던 우리 동네 성님은 나한테 자주고름이며 노란 저고리 끝동을 수시로 손에 들려주면서 “참하다 예쁘다”며 덕담을 건네주셨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건 다 나를 꼬드기는 뇌물이었다.

송수돈 어머니

나는 올해 여든넷이 됐다. 합덕 신리가 고향이다. 딸만 셋인 집에서 자랐는데 동네 이웃으로 지낸 성님이 나를 예뻐해 주셨다. 댕기머리 따고 앙증맞던 17살, 동네에 필목(비단) 장사하던 그 성님이 돈으로 치면 적잖은 양의 자주고름이며 노란저고리 끝동을 받기 미안할 만큼 슬며시 손에 쥐어주곤 했다. 처음에는 고운 빛깔에 마음을 뺏겨 넙죽 넙죽 받았지만 값으로 쳐도 적잖은 것이라

“안 받을래요.” 사양을 했다. 그래도 주는 손길이 멈추지 않아 난감해 하고 있을 때 필목장사 성님이 나한테 넌지시 말을 꺼냈다. 침을 꼴깍 삼키는걸 보니 어째 어려운 얘기를 하려나보다.

“우리 남동상이 하나 있는데 아직 장가를 안 갔어. 그란디 손이 한 짝이 없어. 군대 가서 사고가 났는데 사람은 미끈하고 인정도 많아.”

신통방통한 것은 그 말을 듣자마자 “에구머니 뭔 소리여?” 해야 하는데 나는 얼굴도 못 본 남동상이라는 그 양반이 괜스레 측은했다. 혹여 시집이라도 가면 고생은 맡아놓은 당상인데 그 생각은 안 들고 “젊은 사람이 손이 없어서 어쩐대요?” 괜한 걱정까지…. 그래서 만났지 뭐여. 천생연분이었던 모양이다. 내가 예리덜(18) 살, 남편이 스물일곱 살이었다. 12월 동짓달에 시집오고 그 집안에 다달이 좋은 일이 생겼다. 어른들이 한 짝 손으로도 장가들게 생겼다고 경사 났다고 하셨다.

두 번째 매듭

―예닐곱 살, 총명하고 당돌한 송수돈

8·15 해방 때 예닐곱 됐지. 동네사람들이 만세만세 부르는 소리 듣고 해방된 줄 알았어. 어릴 때도 총명하고 당돌했는데 동네에 일본 사람들도 더러 있고 이장네 딸이 나랑 동갑이었는데 그 집은 놋쇠 숟가락으로 밥을 먹었어. 나는 그 꼴도 못 보겠더라고.

“연심이는 왜 놋쇠 숟가락으로 밥을 먹냐?”

한 소리 내지르기도 했어. 집집마다 놋쇠 그릇이라도 있으면 일본 놈들이 죄다 수탈해갔거든. 이장 집은 놋쇠 숟가락을 쓰고, 우리는 사기 숟가락 쓰느라 밥도 제대로 떠먹지 못했거든. 해방되고 일본사람들 떠난 빈집에 마을 사람들이 몰려가서 깨소금 단지까지 들고 나오기도 했어. 나야 어려서 차지할 것도 없었지만 마을 어른들이 그동안 당한 거 생각하면서 다들 들고 나왔어.

국민학교 입학 전에는 입학할 아이들한테 취학통지서랑 광목 옷감을 끊어서 보내줬어. 그 광목으로 옷 한 벌 해 입고 입학을 했었지. 나랑 동갑인 사촌도 같이 학교에 가게 됐는데 두 사람 몫으로 나왔으면 좋으련만 한 사람 몫만 나온 거야. 둘 중 하나는 학교에 못가는 거지. 워째 둘 다 보내주면 월매나 좋아. 할머니는 고민할 것도 없이

“지지배가 무슨 학교냐, 아들부터 학교 가야지. 흥섭이부터 학교에 보내자.”

너무 속상했지만 내가 힘 있나 할머니 말을 들을 수밖에 없지. 그래서 학교에 못 가게 됐어. 그란디 어찌나 속상한지 분을 참을 수가 없었어. 너무 속상해서 애호박에 화풀이를 했어. 애호박을 칼로 꾹꾹 찌르면서 나는 왜 학교에 안보내주느냐고 울었지.

할머니가 내 편을 들 리 만무허지. 어린 것이 잔망스럽다고 애꿎은 애호박을 왜 건드리냐고 지청구(꾸중)만 한 번 더 먹었지. 여자를 사람취급 안 하던 시절이야. 지금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지. 나도 어린 것이 당돌하기는 했어.

학교에 못 가니께 동네 야학에도 잠깐 다녔어. 야학 선생님을 우리시형 오빠 삼았는디 미끈하고 얌전한 분이었어. 나는 야학에 가다가 나중에는 야학 선생 집으로 가서 공부를 했어. 야학 선생 마누라랑 같이 배웠지. 고마운 양반이여. 그때 거기서 한글 배웠어. 공부 배울 때 재밌었어. 그래서 지금 까막눈은 아니여. 필요한 건 다 읽고 쓰지. 학교는 안 다녀도 총명하고 말귀를 잘 알아들었거든.

세 번째 매듭

―남편의 그림자, 달빛아래 숨기놀이 하는 7남매

나는 친정에서 딸 셋으로 성장했다. 아버지 어머니를 우리 집으로 모셔 와서 같이 지내다 돌아가셨다. 남편은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도 있었지만 장인장모한테 남들이 흉내 낼 수 없을 만큼 효자였고 우리는 생전 싸움을 안 했다. 애들 앞에서 큰소리 내보지 않았던 우리 품에서 자란 큰 딸 주신이가

“엄마 나도 시집가면 엄마처럼 살줄 알았더니 싸울 일이 왜 이렇게 많아? 엄마는 어떻게 안 싸우고 살았어?”

싸울 일 없는 부부가 세상천지에 어디 있나. 참는 것도 지혜다. 속이 곪아 터지는 게 지혜가 아니라 남편한테 의지하기보다 내 할 일을 잘 해내는 것이 지혜다. 그건 어머니에게 배운 덕이다. 어머니는 내가 애들한테 지청구라도 하면 보따리 싸서 나간다고 하시면서 대문 열고 나가셨다. 갈 데도 없으면서 집 나가는 시늉을 했다. 애들 사랑이 얼마나 넘치는지 남편도 장모한테 잘하고 다들 서로 못해줘서 안달이었다. 그래서 우리 부부도 그 어렵던 시절을 싸우지 않고 버텨냈다.

누에를 치던 우리 집 뒤꼍은 뽕나무 밭이었다. 남편과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김치에 된장찌개 한 그릇으로 밥 한 공기 뚝딱 비우며 저녁상을 물렸다. 7남매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쪼르르 달려 나갔다. 어느새 남편도 막내를 업고 아이들 무리에 끼어 신이 났다. 그날도 숨바꼭질 하느라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뒤꼍으로 나가자마자 깔깔대는 웃음소리에 같이 살던 친정어머니는 “딸만 잔뜩 낳아놓고 뭐가 좋다고 신이 났나 망신스럽다”며 혀를 끌끌 차셨다. 내심은 사위가 든든하고 고마웠을 게다. 어머니 입가의 미소가 이미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천하의 호인이던 남편은 참 좋은 사람이었다.

설거지를 마치고 슬며시 올라가보면 아이들은 달빛이 드리운 그림자 뒤로 요리조리 잘도 숨었다. 꽁꽁 숨은들 남편 손바닥 안이지만 그래도 숨어보겠다고 뽕나무 잎 사이로, 언덕배기 수풀 속으로…. 한 녀석 한 녀석 남편 손에 붙들려 나올 때 마다 까르르까르르 다들 더 신났다. 뭐가 그리 좋은지.

넉넉하지 않아도 욕심 없었고 삶이 고단해도 인정 많은 남편과 사랑스러운 우리 아이들, 그 맛에 견뎌냈다. 남편은 먼 길 떠난 지 오래지만 40년이 지나 그때 그 날처럼 우애 좋은 남매들은 노년의 내가 서글플 겨를을 안 준다. 한숨 쉴 틈을 안 준다. 사랑 많이 받고 자란 우리 아이들, 그래서 사랑이 넘쳐 그 사랑이 나이든 내 차지까지 온다. 주말이면 마당은 아이들의 차로 꽉 들어찬다. 아이들은 나를 차에 싣고 꽃놀이를 떠난다. 꽃 대궐 이룬 꽃밭에서 나는 모델이 되어 아이들의 카메라 셔터 앞에서 웃고, 하트를 날려본다. 팔도의 산해진미는 덤이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엄마 얼굴이 뭐 볼 게 있다고 여기서 찰칵 저기서 찰칵! 나만 행복해서 미안하다고 남편한테 간간이 말을 걸지만 알아들을 리 만무하다. 제대로 해 먹이지도 못하고 옷이며 신발이며 언니들한테 물려받아가며 내 것 한 번 제대로 가진 적이 없던 아이들. 미안하고 고마운 내 새끼들이다.

나의 오래된 아픈 기억들까지 추억 보자기로 싸매준 우리 아이들. 달빛아래 숨바꼭질하던 그 천진한 마음으로 내내 살아줘서 노년의 나를 복 많은 여자로 만들었다. 사랑은 대대손손 대물림이다.

네 번째 매듭

―고단한 시골아낙, 밤새 누에 밑 가리고 물옴 잡히다

밤새 누에 밑 가리고 새벽 에는 텃밭 일구고 낮에는 모심느라 24시간의 8할은 일하느라 몸이 고단했다. 365일 내내, 쉴 틈에 살림하고 아이들 돌보느라 쪽잠을 청하기 일쑤였다.

앉으면 꾸벅꾸벅 졸고…. 고생 안 시킨다고 첫 날밤에 약속한 남편의 호언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큰 동서는 내가 졸고 있으면 간간이 지청구를 했는데 누에 치고 모 심느라 몸을 가누기 힘들 때가 다반사였다.

잠실방(누에 치던 방)에서…

누에는 깨끗한 뽕잎만 먹고 자라는 애들이라 고추밭에서 농약이라도 날아와 우리 뽕 밭을 스치기만 해도 금세 누에들이 알아차린다. 잘 자라지도 않고 애를 먹였다. 우리 애들이 학교 다녀와서 잠실 방에 들어가서 누에도 치고 먹이도 챙겨주느라 다들 애썼다. 간간이 잠실에 잠들어 있는 딸내미들을 보고 있으면 자고 있는 걸 깨우자니 안쓰러워서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누에똥이 잔뜩 있어도 너무 졸려서 그 방에서 잠들어 있는 딸내미를 보면 어린 거까지 고생시키니 애미 속은 다 타들어 갔다. 여자아이들이라 꼬물거리는 누에를 보면서 엄마야 징그럽다고 도망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 때 다들 힘들었던 기억 때문인지 우리 아이들은 지금도 번데기는 그다지 즐기지 않는 음식이 되었다. 그래도 군말 안 하고 엄마 일손 돕는 우리 애들은 참말로 착했다. 우리 친정어머니도 뽕도 잘 따고 일도 많이 하셨다. 뽕잎을 딸 때도 내가 반 포대 하는 동안 어머니는 한 포대씩 땄다. 뽕 농사는 둘째가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했으니까 근 20년은 농사를 지었다. 온 가족이 십시일반 일손을 보태면서 누에 농사를 짓느라 다들 애 많이 썼다.

정작 힘든 건 누에치는 것보다 모심고 다리에 물옴이 생길 때였다. 밤이면 다리가 퉁퉁 부어서 걷기도 힘들었다. 그때는 장화도 딱히 없어서 시원찮은 양말 신고 들어가면 거머리에는 안 물렸지만 물옴이란 녀석한테는 못 당했다. 살가죽이 부풀어 올라 속에 물이 잡힌다. 추측해보건대 외양간 오물이며 농약들이 물댄 논으로 흘러올 수밖에 없다. 그것들이 쌓이고 쌓여서 독소가 만들어졌을 거다. 그래서 우리는 모내기철에 물옴으로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살이 얇아서 물옴이 올라 밤마다 퉁퉁 부은 다리를 달래느라 힘들었다. 피부는 울긋불긋 간지럽고 긁기라도 하면 더 부어올라 종아리가 허벅지 만해졌다. 그 시절 고생은 말을 할 수가 없다.


참, 사는 게 고역이었는데 딱히 방도가 없어 미련하게 또 그렇게 하루하루 보냈다. 우리 아이들 중학교 고등학교 다닐 때였다. 동네에 묘 자리를 두고 있던 ○○네가 이장하던 날, 땅 속에서 미라가 나왔다. 동네꾼들이 다들 나와서 구경하는데 나는 집 밖을 나가볼 시간도 없었다. 우리 애들이 미라 봤다고 호들갑을 떨어도 자취방에 김치 담아서 보내느라 다른 데 눈 돌릴 겨를이 없었다. 마을에 버스가 7시, 10시, 12시, 3시밖에 들어오지 않아서 그 시간을 맞춰 김치를 손에 들려 보내는 것이 그저 내가 할 일이었다. 보고 싶은 거 궁금한 거 다 찾다보면 우리 애들은 누가 챙겨주나. 나, ‘송수돈’이 없는 시절이 있었다. 한창 누에를 치고 농사를 짓고 아이들을 키울 때는 내가 없어야 우리 새끼들이 살았다. 다 주어도 아깝지 않았다. 너무 다행스러운 건 나이 들어 ‘송수돈’이라는 내 이름을 아이들이 찾아주었다.

늦복이 차고 넘치는 할미가 되었다.

가족여행


희로애락의 올가미에 갇혀 보지 않은 사람은 없다는 것을 알아가면서 세월의 나이테를 쌓아간다. 우리 딸 은주가 차려준 된장찌개를 먹고 창가로 스며드는 따뜻한 햇살을 받고 싶다.

혹여 그 햇살이 한낮의 졸음을 데려온다면 꿈을 꾸고 싶다. 그 졸음을 타고 오래전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달빛아래서 우리 7남매가 까르르 웃으면서 남편과 숨바꼭질 하던 그 뽕나무 잎 사이로 나도 숨을 것이다. 그 속에서 나도 같이 웃고 마냥 행복 하고 싶다. 보고 싶은 그이 박종순, 그리고 우리 자식들 사랑합니다.

지금 이렇게 행복해도 될까요. 우리 식구들의 냄새가 곳곳에 밴 우리 집, 흙냄새를 맡을 수 있는 우리 집, 내 노년을 복되고 값지게 만들어주는 우리 집 곳곳에 사랑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를 두 손 모아 봅니다. 이만하면 부끄럽지 않았고 소박하지만 자존심을 지켰다.

다 덕분이다.

주신이 주미 주란이 주윤이 주나 은주 은정이의 엄마여서 행복한 고덕 상장리 송수돈.

― 2021년 5월 3일, 따뜻하고 예쁜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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