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희의 추억의 뜰] 이병옥(1924~), 白壽(백수)를 목전에 둔 사나이, 인생 敍事(서사)의 말미를 웃음으로 화답하다

김경희 작가 승인 2021.07.12 16:17 의견 0
X
이병옥 어르신


“우리 막둥이 선자, 큰놈은 진순이, 둘째는 윤옥이.”

어르신께 며느리들 이름을 여쭈었더니 이제 며느리는 없고 딸만 남았다고 하시며 한 분 한 분 불러내셨다. 영동, 풍광 좋은 배산임수를 끼고 앉은 예쁜 2층집, 키 작은 잔디들이 정갈하게 터를 잡고 앉았다. 주말이면 어르신의 호위무사들이 녹음이 드리워진 뜰에 줄지어 차를 댄다. 어르신은 깊은 세월, 70년을 아내와 둘이 걸었다. 두 손 잡고 작은 소롯길을 지나서 3남 1녀 자녀분들과 같이 신작로까지 뚜벅뚜벅 걸어 나오셨다. 한때는 드넓은 바다 위를 헤엄치는 부레 없는 상어처럼 고단하기만 한 시절의 올가미에 갇혀 허우적거린 때도 있으셨다. 지금의 평안을 사모님께 모두 돌리신 어르신, 기개가 남다르셨던 ‘白壽(백수)를 목전에 둔 사나이’의 무용담은 거침없었다.

X

열네 살, 겁 없는 무용담―관부연락선을 타다

칠흑 같은 어둠 저 멀리서 깜박거리는 히로시마항의 불빛이 보이자 열네 살 까까머리의 심장이 벌렁거리기 시작했다. 전북 부안 촌놈이 신태인역을 출발해서 부산항에 당도, 관부연락선을 타고 드디어 일본에 도착했다. 1924년생인 내가 열네 살 되던 해 어머니에게 일본에 가야겠다는 겁 없는 통보를 했다. 호시절이라도 허락할 부모가 없을 텐데 일제강점기하의 엄혹한 여건에서 어머니는 그 말을 들으시고 내 손바닥에 100원짜리를 얹어주셨다. 내 손가락을 접어 100원짜리를 꼭 쥐게 하시면서 “잘 다녀오너라.”

어머니는 큰 숨을 들이켜며 애써 마음을 추스르셨다. 집을 떠나던 날, 내 등에 꽂힌 어머니의 걱정 어린 눈빛을 애써 외면하면서 발걸음을 돌렸다. 나를 믿어주신 어머니.

일제강점기하에서는 운신의 폭이 작았다. 도항 증명을 내야 배를 태워주었다. 내가 일본에 가기 위해서 넘어야 할 첫 번째 장애물이었다. 도항 증명은 군내 경찰서장이 발행해주거나 동척회사에서 발행해주었다. 사촌형님이 동척회사를 다녔다. 동척회사는 농촌을 착취하는 일본 회사였지만 그 시절 사촌형님도 어쩔 수 없이 호구지책으로 그 회사에 다니고 있었고 나는 덕분에 도항 증명을 받아냈다.

“형님, 일본 갈랑께 도항 증명 하나 내주시오.”

“뭔 소리냐, 간도 큰 놈이네. 증명은 내주는데, 반드시 살아 돌아오니라.”

쥐방울만한 녀석이 가방 하나 짊어지고 집을 떠나 3일 만에 일본 히로시마에 도착했다. 구겨진 종이를 펴고 사촌형님 주소를 읽어 내려갔다. 물어물어 형님 집에 도착했다. 형님이 나를 보자마자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3일 동안 완행열차, 덜컹거리는 버스, 3등 칸에 겨우 몸을 기대는 허접한 배를 갈아타면서 일본에 도착한 시골 촌놈의 꾀죄죄한 꼴은 또 얼마나 가관이었을까.

“병옥아, 어찌 된 거냐?”

“일본에서 학교 다니고 싶어서 왔습니다.”

형님은 놀란 가슴을 겨우 진정시키고 나를 집으로 들였다. 나는 일본에서 학교에 다니면서 불평등을 신랄하게 맛보았다. 그들이 말하는 조센징이 되어 무차별한 위협에 시달렸지만 당하고만 있을 내가 아니었다. 하교 후 골목길에서 일본 아이들이 떼로 몰려있으면 당연히 얻어맞기도 했지만, 반드시 한 놈이라도 패주고 잽싸게 도망을 다녔다. 몸이 빠르고 머리가 좋아서 위기의 순간을 잘 모면하며 1년 가까이 일본에서 잘 버텨냈다. 결국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됐지만 3일 걸려서 당도하는 머나먼 그 길을 열네 살의 꼬마가 혼자서 오고갔다. 거침없는 그 무용담을 평생 가슴에 간직하고 인생에 폭풍우가 몰려 올 때는 雄志(웅지)를 품고 관부연락선 3등 칸에서 몸을 도사리던 열네 살의 병옥이를 늘 기억했다.

8·15 광복의 기쁨을 진정시킬 새도 없이 다시 맞닥뜨린 비극, 6·25

명동 한복판에서 방송이 계속 흘러나왔다.

“휴가 장병은 조속히 귀대하라.”

1950년 6월 25일, 평화롭던 일요일이었다. 명동으로 책을 사러 나간 길에 느닷없는 방송을 듣고 온몸이 경직됐다. 중앙대학교 2학년 다니다가 6·25사변이 터졌다. 전쟁이 터지고 고향으로 내려오던 그 날 6월 27일 한강 다리가 폭파되었다. 상도동 집에 이불 보따리며 책들을 후스마(벽장)에 몰아넣고 못질만 한 채 서울과 잠시 이별을 했다. 이미 전쟁의 참상을 맛본 나는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우리는 관악산을 넘어 오후 3, 4시 경에 군포에서 기차를 탔다.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우리는 겨우 기차에 몸을 싣고 대전역에 내렸다. 밤새 주먹만 한 빗줄기가 내렸는지 대전역은 이미 흥건히 젖어 있었다. 마치 우리 앞날을 예고하듯이 공포와 슬픔을 가득 머금은 대전역은 처연했다. 나는 1924년생이다.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고스란히 몸으로 겪은 나이인데 인생에 몰아쳤던 소용돌이의 괴력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중국의 철학자 지센인의 명문 ‘다 지나간다’를 몸으로 체득했지만 인생은 골목마다 희로애락의 올가미를 걷어내야만 다음골목으로 진입할 수 있었다.

X


어머니, 먼 하늘을 올려다본다. 눈물이 떨어질세라

어머니를 함축하는 단 한마디, 그리움. 어머니 생각을 하면 먼 하늘을 올려다보아야 한다. 눈동자에 가득 고인 어머니의 얼굴이 눈물방울로 떨어질세라 한참을 올려다본다. 중학교는 고창고보에 갔다. 한 달 한 번씩 머슴이 집에서 쌀가마니를 짊어지고 와서 하숙집 마당에 내려놓았다. 쌀 닷 말이면 한 달 하숙비가 된다. 쌀가마니 곁의 소담스러운 보자기에는 어머니께서 가지런히 준비해주신 반찬들이 나를 반기고 있었다. 어머니 생각에 울컥했지만 큰 숨 들이마시면서 꾹 참았다.

군대소집영장, 일제치하 죽음의 그림자

고창고보 졸업하고 금융조합 근무 중에 소집영장이 나왔다. 일제하에 소집영장은 죽음을 바로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군 입대 전용 열차, 아직 얼굴에 솜털이 가시지 않은 스무 살짜리 청년들의 얼굴은 빳빳하게 굳어 마른침만 삼키면서 신태인역을 출발, 대전역에 잠시 정차했다. 군대에 끌려가면 죽음이라는 방정식이 우리들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어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도망을 가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기회를 엿보고 있던 차에 어디선가 호루라기 소리가 들리더니 우당탕 난리가 났다. 한 녀석이 나보다 먼저 탈출을 시도했다. 녀석은 바로 잡혀서 바닥에 내동댕이쳐지고 일본 놈들은 군화발로 녀석의 얼굴을 사정없이 짓이기고 있었다. 한바탕 난리를 겪은 후라 군용열차 칸은 무거운 정적만 감돌았다. 죽음을 담보로 하는 군대생활은 하루하루 피가 마르고 밤 점호시간이면 ‘오늘은 이렇게 목숨을 부지했구나’ 하는 얕은 신음소리로 하루를 마감했다.

젊은 날의 초상, 대전에서 터를 일구다

중앙대학교 2학년 다니던 중에 전쟁이 나서 다시 학교로 돌아가지 않고 나는 결혼, 그리고 대전으로 터전을 옮기는 또 다른 인생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나와 안식구는 결혼식 당일 첫 대면을 했다. 결혼식 날 아내 얼굴을 처음 봤는데 연지곤지 찍고 족두리 쓴 모습을 슬며시 보았다. 아내는 스무 살 시골 처녀라 수줍어서 고개도 못 들고 발그레한 뺨이, 스물여섯 청년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결혼 후에 대전으로 올라왔다. 결혼하고 가정을 갖게 되면서 호기심만으로 인생을 살 수 없는 여건에 놓였다. 어느 날 나를 찾아온 이가 있었다.

“같이 일해보자” 제안을 받고 우연한 기회에 대전 삼성동 보문제지 공장에 입사하게 되었다.

열네 살에 대한해협을 건넜던 나에게 부안은 작은 동네였다. 학교 교사도 금융회사 직원도 내 호기심을 채우거나 역량을 발휘하기엔 부족한 곳이라고 생각했다. 겁 없이 세상을 바라보았던 호기 넘치는 젊은 날의 자화상이었다. 그렇게 운신의 폭을 넓히고 싶은 시점에

대전에서 제안이 와서 거절하지 않았다.

재력가였던 최○○ 사장이 나에게 같이 일해보자 제안을 한 것은 내가 기술자도 아니고 비록 시골사람이었지만 기개도 있었고 영민한 사람으로 주변에서 인정받고 있어서 나를 찾게 된 것이다. 메리야스 업종이 호황이던 시장이라 많은 사람들과 일하면서 부정을 저지르거나 회사 이면에서 모종의 계획을 세우는 사람들이 최 사장에게는 불편한 상대들이었다. 청렴하고 일머리가 좋은 측근이 필요한 시기였다. 그 시기에 나를 지목해서 찾아온 것도 사실 고마운 일이었다. 그 최 사장이 자본 여유가 있어서 메리야스 업 외에 제지공장을 만들었다. 사업수완이 좋은 최 사장의 생각에 제지시장이 호황의 시대를 맞을 것이라는 예견을 한 것이다.

X


대전 제지업계의 효시, ‘보문제지’의 관리자

일제강점기에 종이를 만들었던 기술자나 회사들이 해방 후에 모두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우리나라는 실질적으로 제지를 만들 만한 환경을 새롭게 다져야 할 때였다. 대전 동구 삼성동 보문고등학교 근처에 부지를 마련하게 돼서 이름도 보문제지라고 칭했다. 나는 보문제지의 총괄 책임자가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지 사업 자체 이익이 없어서 아예 전문 화장지 시장에 발을 들여놓았다. 화장지 원료는 펄프를 써야 하지만 비용을 감당할 수가 없어서 다시 펄프 대용 생산에도 촉각을 곤두세웠다. 원료를 보니 삼베를 쓰면 될 것 같아 전국의 엿 장사들을 모았다. 그들에게 삼베를 걷어오게 했다. 당시만 해도 삼베로 옷을 해 입거나 집안 용품들을 사용하던 때라 낡아서 버려진 것들을 다 수집하기 시작했다. 낡은 삼베, 고물 원료로 시도해보기 시작했다. 너무나 원시적인 방법이었지만 전문지식을 가진 기술자가 없으니 그저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이렇게, 저렇게 공식 없이 해답을 도출해내고 있었다. 보문제지의 관리자를 하면서 대전의 화장지 역사를 쓰기 시작했다. 이론의 공식보다 현장경험이 우위를 점하는 때였다.

1970년대 고속도로가 개통되고 산업화의 물결을 타면서 모든 산업들이 호황의 국면에 들어섰는데 화장지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우리는 기술이 부족하다보니 이미 만들어진 화장지를 연구하면서 후발 주자로 따라가기 시작했다. 당시 그레이하운드라는 고속버스에는 화장지가 비치되어 있었다. 그 버스에 비치된 화장지를 몰래 가져와서 이리 찢고 저리 찢어보면서 테스트를 하기도 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화장지를 만들기 시작했다. 1965년 보문제지에서 화장지를 생산했다. 신제품이 나올 때는 공장이 떠나갈 듯이 탄성을 지르고 어깨를 겯고 같이 춤을 추었다. 눈물 가득고인 웃음으로 서로를 격려했다.

이후 태평양제지 상무이사, 전주 구천제지 대표까지 하고 경영의 일선에서는 물러났다. 호기심 많고 영민했던 까닭에 사업제안도 많이 들어오고 관심의 영역도 넓었지만 젊은 날의 좌충우돌을 겪은 뒤에는 화장지 총판을 하면서 무리수를 두지 않은 채 70살 정도까지 경제활동을 했다. 호기심 많은 나를 만나 아내도 혼돈의 시간들을 속울음 삼키며 잘 참아낸 것을 안다.

X


마르코(세례명)의 노년

이제 손을 뻗치면 바로 만져지는 아내의 손, 내일모레 백 살이 되는 남자 곁을 아내가 지켜준다. 나만큼 행복한 남자를 몇이나 찾아낼까. 다 우리 각시, 순자 덕분이다. 우리 부부는 70년 묵은 連理枝(연리지)다. 늙은이가 아닌 ‘어른’으로 사는 힘은 내 것이 아니다. 나는 반쪽짜리, 아내가 곁을 내주어야 비로소 우리가 된다. 오늘 점심도 아내가 끓여주는 된장찌개를 먹고 창가로 찾아드는 햇살을 따라 낮잠을 청하고 싶다. 꿈결의 끝에서 그리운 어머니를 만난다면 작은 사내아이 병옥이가 되어 어머니 품에 안겨보고 싶다. 달그락거리는 아내의 설거지 소리를 듣고 낮잠을 물린다. 무릎을 ‘탁’ 치며 혼자 읊조리겠지. ‘아, 여기까지 정말 잘 왔구나.’

X

할아버지,
저 손녀딸 지현이예요.

할아버지의 유년시절부터 지금까지의 삶을 쭉 읽고 있노라니 할아버지께서 걸어오신 발자취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실 제가 태어났을 때부터 할아버지는 이미 넓고 깊은 어른이셔서 할아버지의 유년시절의 환경이나 정서는 짐작할 수 없었습니다. 글을 읽으면서 할아버지께서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이 얼마나 크신지 새삼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그 분들은 직접 뵙지 못했지만 얼마나 대단한 분인지도 알 수 있었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살아오신 삶과 제 삶을 비교하면서 할아버지께서 얼마나 대단한 삶을 살아오셨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제 삶의 멘토이십니다. 제가 매사 자신감 있게 살아갈 수 있는 건 할아버지가 만들어주신 우리가족의 큰 그늘과 따뜻함 덕분입니다. 할아버지가 남겨주신 무한한 사랑에 감사합니다. 늘 건강하시어 하느님의 기호아래 행복과 기쁨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두 손 모아 기도드립니다.

언제나 사랑하고 또 사랑합니다.

2021년 6월 -사랑스런 손녀딸 지현 올림-

저작권자 ⓒ 시사저널 청풍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