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의 숲에서 전통의 맥을 잇다―‘聲讀(성독)’ 비봉서당 송재선 여성 훈장

김경희 작가 승인 2021.10.13 15:15 의견 0
비봉서당 송재선 훈장

골목길, 어린 시절 학교를 마치고 엄마가 계신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길에 들어서면 이유 없이 기분이 좋았다. 엄마가 나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글 읽는 소리가 들리는 ‘비봉서당’이 바로 그런 곳이다. 아이들은 비봉서당의 문 앞에 서면 행복하다. 큰 엄마 같은 훈장님이 계신다. 대문을 열고 2층 계단을 오르면 소년의 성독 소리가 들린다. 한 계단 한 계단 오를 때마다 한 구절씩 더해진다.

莊子曰(장자왈) 一日不念善(일일불념선)이면 諸惡(제악)이 皆自起(개자기)니라

장자가 말하기를 하루라도 선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면 모든 악이 저절로 일어나느니라.

귓가에 맞닿은 聲讀(성독:전통 서당에서 아이들이 장단 고저에 맞춰 글 읽는 소리) 소리도 신선한 가을바람처럼 청량감을 더했고 건너편으로 내려다보이는 집 옥상의 빨랫줄에 키 맞춰 가지런히 널린 빨래들이 바람결에 흔들린다. 정겹다는 말 외에 다른 미사여구를 굳이 쓸 필요가 없다. 아이들은 스무 계단 정도 오르는 그 짧은 시간에 아파트 숲에서 경험할 수 없는 골목길의 정취를 눈으로 귀로 다 맛보고 훈장님과 만난다. 이미 마음은 서정의 기운으로 꽉 찼다. 서당 문을 열자 벽면의 서예작품들의 묵향기와 경서대 앞에 앉은 아이들의 성독소리가 유난히 낭랑하게 들려왔다.

비봉서당 송재선 훈장

■ 聲讀(성독) 서당의 홍일점, 송재선 훈장

여성훈장, 훈장이라는 이름 앞에 여성이라는 호칭도 쉽게 만날 수 없지만 더더욱 성독 서당의 여성 훈장은 극히 드물다. 성독 서당의 이해를 돕자면 우리가 흔히 듣던 노랫가락처럼 장단의 고저를 살리는 “하늘~천 땅 지! 검을~현 누를 황!”을 암송하는 소리를 연상하면 접근이 쉽다. 성독 서당문화는 고유문화유산의 한 자리로 떠밀려가고 있지만 비룡서당의 아이들 그리고 서당에 아이들을 보내는 학부모들이 특별한 길을 걷는 덕분에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안타까울 뿐이다.

어떤 이가 곱게 다린 한복을 차려입은 여성 훈장인 나의 자태와 청학동 산골짜기에서 들어봄직한 아이들의 글 읽는 소리(성독)가 도심의 주택가에서 들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뭉클해진다고 한다. 내가 만든 평온한 일상이 울컥한 마음을 채워준다? 우리 아이들은 어른들이 만들어놓은 황폐한 땅에서 선택의 여지없이 인성교육은 뒤로 한 채 시험이란 올가미 안에서 성장하고 있다. 푸른 언덕 같은 성독 서당은 공자 왈 맹자 왈 고리타분한 유학이 아닌 고전을 통해서 아이들의 마음이 키보다 더 빨리 자라는 통로역할을 하는 전통 학습 마당이다.

비봉서당 송재선 훈장

■ 유년시절부터 가계에 흘렀던 비봉서당의 원류

아이들은 처음부터 작정하고 서당에서 공부하겠다고 오지 않는다. 엄마 손에 이끌려 혹은 한자 급수를 올려보려고 서당에 첫 발을 디딘다. 한글을 배우듯이 서당에 오면 기초 한자를 100자 배우고 사자소학 명심보감 등을 배운다.

나도 가계에 흐르는 유교의 영향을 받았다. 전통서당에서 성독 서당은 여성훈장이 극히 드물다. 내가 그 길에 들어선 것은 절에서 탱화를 그리기도 하셨던 문인화가인 아버님의 영향도 있었지만 그보다 먼저 할머니의 혈통이었다. 할머니가 한자를 줄곧 읽으셨다. 부지불식간에 어린 시절부터 한문 쓰시는 걸 어깨너머로 자연스레 보았다. 부모님 슬하의 4남매지만 훈장의 길은 나 혼자 걷고 있으며 어릴 때부터 한자는 나에게 신기한 존재였다.

집안의 유교문화 덕분이었는지 결혼 후에 홀시아버지를 22년간 모시기도 했다. 며느리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음에도 부끄럽지만 시아버님을 모셨던 그 시간을 효부상으로 위로받았다. 결혼 후에 시댁의 환경은 어린 내가 감당하기 쉽지 않았다. 어머니께서 작고하시고 막내 시누가 8살 그 위로 12살, 17살이었다. 막내 시누이는 내가 키워서 시집까지 보냈다. 시아버님 돌아가시기 전 11년 정도는 치매를 앓다가 가셔서 나도 감당이 쉽지 않았지만 한복을 다려서 입혀드리며 정신을 잃어가는 아버님을 마지막까지 존중해드렸다. 그 과정에 한문공부를 꾸준히 하면서 자연스럽게 서당을 하게 되었다. 아버님 돌아가시고 묘비문도 내가 써드렸다. 松田(송전)이라는 호를 부여해드리고 편안히 보내드렸다. 사후에 내가 직접 초염을 했고 1년 동안 영정사진 보면서 문안인사를 드렸다.

■ 飛鳳서당의 사회적 가치와 책임

서당 시작은 아버님 모시는 중에 사원 김경곤 선생님께 사사를 받으면서 공부를 시작했다.

비봉서당의 시작은 2011년이다. 50살이 넘어 훈장이 되었지만 아이들이 일찍이 배워서 인성에 가르침을 받고 한자를 통해 언어의 깊은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힘이 커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겁도 없이 서당을 시작했다. 현수막도 없었다. 비봉서당이라는 문패를 보고 궁금해서 와 보았던 사람들이 시작의 문을 열었다. 훈장하면 나이 지긋한 남자라는 고정관념이 초창기에는 더더욱 팽배해서 문의 전화가 와서 내가 받으면 훈장님 바꿔주세요’라는 말을 듣는 게 태반이었다.

30명 정도의 아이들이 자유로운 시간에 와서 일대일 수업을 했는데 코로나로 아이들이 좀 줄어서 안타깝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더 집중해서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어서 다행스런 마음이기도 하다.

아이들이 성독으로 암송을 하다 보니 자세도 바르고 의미도 더 깊게 이해하고 있다. 항상 拱手(공수)자세로 인사하는 습관이 들어서 다른 아이들보다 예의범절이 바르다는 말을 듣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비봉서당이 우리 사회에 작은 기여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코로나 전에는 전국대회도 많아서 차를 대절해서 차 앞에 비봉서당 이름표를 붙이고 다니면 다들 힐긋힐긋 보면서 경계를 했다. 성독 서당으로는 우리아이들이 항상 우선순위에 입상을 해서 우리 서당의 입지가 높았다.

예의가 사라져가는 세상, 학교 진도에만 몰두하는 교육환경에서 서당에 다니는 아이들보다 유혹을 뿌리치고 서당에 보내는 학부모들의 결의를 더 칭찬하고 싶다. 나만해도 딸 셋 중 아무도 나의 길을 걷지 않는다. 일곱 살 손주가 와서 “할머니 한문 가르쳐주세요.”라고 할 때는 마음속에 감동이 포물선을 그린다.

사실 서당은 학부모들이 다녀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서당에 다니는 학생과 학부모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대양초등학교 4학년 박준성: 옛날 사람들이 하는 말씀이 재밌고 생활과 공부에 큰 도움이 되는 거 같아요. 자신감이 많이 생겼어요. 한자공부가 즐거워요. 함께 단체전을 암송해서 서당친구들과 더 많이 친해질 수 있어서 좋아요.

박준성 모(김영환 님): 예절과 인성교육을 위해 서당을 보냈지만 오히려 준성이는 즐기면서 공부를 하는 게 좋았습니다. 한자공부는 모든 공부에 기본이라고 생각했고 서당에 다니기 전에는 한자급수에 연연하는 엄마였는데, 서당에 다니면서 급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살아가면서 좋은 글과 좋은 말씀을 한자로 배우면서 더 큰 배움을 얻게 되었습니다. 한자는 다른 친구들에게도 꼭 추천하고 싶어요. 훈장님은 엄마처럼 때로는 할머니처럼 대해주시고 학원의 개념보다는 내 집처럼 편안하게 가서 공부하면서 쉴 수 있는 공간이 되었고 준성이는 하나하나 외울 때마다 성취감이 엄청났고 뿌듯해 했어요. 즐기면서 자신감 있어 하는 모습도 보기 좋고 흐뭇했습니다.

飛鳳서당의 이름은 비래동에 근거지를 둔 이유도 있지만 아이들이 봉황새처럼 날아서 큰 일꾼이 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도심 숲에서 울리는 아이들의 글 읽는 소리가 골목 안에 울리는 것만으로도 암울한 이 시기를 넘는 단단한 징검다리 역할을 하고도 남는다.

훈장님은 본인의 허리 아래 춤에 키를 맞춘 작은 아이도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안타까운 지금, 우리 아이들에게 희망의 메시지 한 구절을 마음에 새겨주셨다.

“하루라도 독서를 하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一日不讀書(일일불독서), 口中生荊棘(구중생형극)”…아이들의 학습서인 推句(추구)의 한 구절이면서 안중근 의사가 뤼순감독에서 쓴 遺墨(유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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