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석사 일경 스님, 돌아 돌아서 여기에 -족집게 보살의 운명의 넘어 일경 스님으로 坐定(좌정)하다

김경희 작가 승인 2021.11.10 15:07 의견 0

대문을 빼곰히 열고 작은 마당을 지났다. 환갑을 넘은 여사님들이 옹기종기 앉아 사는 이야기를 조곤조곤 나누고 있었다. 열린 안방 문 안으로 황금빛 자개농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바로 알아차렸다. ‘아, 아름다운 것들을 마음에 간절히 품었던 여인이구나.’

시선을 하나둘씩 옆으로 옮기고 있을 때 화장을 곱게 한 승복을 입은 초로의 여인이 마루를 가로질러 바삐 움직이고 계셨다. 일경 스님이었다.

도심 주택가의 제석사. 절이라고 하기엔 차 소리가 가득한 도로 앞에 자리를 틀어 궁금증을 자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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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석사 일경 스님

‘무속인이셨다가 스님이 되셨다니…… 아, 파란만장 하셨겠구나.
우리가 흔히 말하는 우스갯소리로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치르셨겠구나.’

미리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었다. 조금은 낯선 법당으로 들어가 앉아, 스님 이야기 듣고 싶다고 하니,

“아휴 내 얘기 뭘….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

내심 얼마나 힘들게 사셨을까 짐작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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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석사 일경 스님,

걷히지 않는 운명의 올가미

고향이 어디세요? 라고 여쭈니 충북 영동이라시며 술술술 이야기보따리를 꺼내놓으셨다. 어르신들에게 고향이라는 말은 우리가 생각하는 고향이 아니다. 향수 그 너머의 그리움과 위안이 모두 담겼다. 유독 할머니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는데 결국 그 사랑이 일경 스님의 발목을 잡게 되었다. ‘영화’라는 예쁜 이름을 갖고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누군가 점쟁이 할 이름이라고 한마디 내질렀던 모양이다. 운명이었을까.

스물다섯 살에 금산 남자를 만나 결혼하고 살아보려니 조금 더 넓은 곳으로 나가보자 길을 찾은 곳이 바로 대전이었다. 남편은 운전을 하고 일경 스님은 새우젓 장사며 온갖 행상을 하면서 근근이 입에 풀칠을 하며 하루하루 부레 없는 상어처럼 헤엄치며 허덕거렸다.

느닷없이 운명의 올가미에 갇혀 남편이 운전하다 사고를 당하고 장애인이 되었다. 남편, 아이들, 집안의 모든 짐을 일경 스님 아니 ‘영화’라는 여인이 짊어지게 되었다.

삶의 방편으로 남편이 신내림을 받으려고 갔던 그곳에서 남편에게는 미동도 안 하던 신의 막대가 아내(지금의 일경 스님)손에 잡히더니 멈출 줄 모르고 흔들리게 됐다. 마치 임자를 만난 듯이…….

마음속의 그리움으로 화석이 되었던 할머니가 무속인이 되라고 인도해주신 거부할 수 없는 날이었다.

인생의 변곡점, 족집게 보살

일경 스님은 5년 전까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무속인이었다. 족집게 보살, 새우젓 보살이라고 많은 사람들에게 회자되면서 그 세계에서는 이름값을 하던, 말 그대로 족집게 점쟁이였다.

인생이 기막혀 남편이 신내림을 받으려고 갔던 그 자리에서 일경 스님은 생각지 못한 인생의 변곡점을 만났다. 어린 시절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할머니의 사랑을 끔찍이 받았던 일경 스님, 즉 ‘영화’는 돌아가신 할머니의 속삭임으로 무속인의 길로 접어들었다. 사람들이 우주여행을 하는 시대에 무속인이라고 하면 코웃음을 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아직도 제석사를 찾는 이들은 마루에 한가득 들어앉아 있다.

비단 일경 스님의 제석사 뿐일까.

삶이 고달프고 인생의 방향을 정하지 못할 때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법으로 해결책을 찾고 비방을 구한다. 그 방편의 하나로 누군가는 무속의 세계에 한 수 맡겨보기도 한다. 그들의 비방이 모두 효험이 없다면 세상의 무속인은 모두 사라졌을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힘이 되고 비방이 되는 길을 안내하는 역할을 했기에 오늘도 제석사를 찾는 이들이 끊이지 않는 반증이기도 하다. 과학적 논리의 카테고리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틀렸다고 말할 수 없다. 그저 삶의 해석 방법이 다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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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석사 일경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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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석사 일경 스님

일경 스님, 올가미를 걷고 보시의 길로 나서다

일경 스님은 2016년도에 사찰 등록을 했고 수만 명의 신도가 스님을 거쳐 갔다. 일경 스님의 할머니는 스님에게 일체중생 구제로 덕을 쌓으라고 하셨다. 일경 스님도 남편의 사고로 집안의 온 짐을 떠안으면서 무속의 세계에 발을 들였듯이 세상에 파란만장한 삶을 사는 사람은 수없이 많다.

흔히 복채라고 말하는 그 값으로 3천 원을 수년간 내내 받고 있다. 3천 원을 받고 살림을 다 꾸리면서 아이들을 키우고 사글세에서 전세로 그리고 스님 이름의 집으로 거처를 옮겨갔다. 하루에 70명씩 사람들을 만나면서 입에서 단내가 나는 수 많은 날들을 지나왔다. 수만 명의 사람이 다녀가면서 고단한 사람들은 스님에게 삶의 고충을 토로하고 위로와 비방을 얻어갔다.

스님도 덩달아 ‘나보다 더 못한 사람들도 있구나.’라고 위로받으며 어려운 이들에게는 거꾸로 쌀값을 건네고 차비를 손에 쥐어주는 구제중생의 덕을 쌓았다.

돈 천 원을 들고 와서 열 세 식구의 운을 보는 어떤 여인에게 차비를 주고 보냈다는 일화를 들려주면서 나보다 더 딱한 여인이었다고 소회를 남겼다. 미신이라는 이름으로 평가절하하기에는 그 세계만의 힘이 있다. 우리가 어려울 때 힘이 되는 존재는 다양하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로도 위로가 된다면 스님도 세상에 보시를 한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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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석사 일경 스님

족집게 보살로 유명세를 떨치다가 6년 전 꿈에 할머니가 자꾸 나타나 승복을 입혀서 사찰로 등록했다. 현재 1000여 명의 신도가 있다.

시간을 거슬러 족집게 보살로 제석궁을 열고 두 여인이 찾아 왔을 때의 일화는 같이 박장대소하면서 웃음보를 터뜨렸다.

불쑥, 우리 시아버지가 무슨 병이냐고 집어내라는 여인에게 일경 스님은 할머니가 들려주는 대로 “대문 고치고 화를 입었구나.” 눈에 훤히 보이듯이 말해버렸다. 족집게처럼 맞춘 일경 스님의 말에 여인네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그 이후로 나를 찾아 문제가 생길 때마다 방편을 해주었더니 어느새 70이 넘어 언니처럼 동생처럼 인생 상담을 이어가고 있다.

30년 된 손님이 지금도 찾아온다. 그니는 이제 점쟁이인 족집게 보살을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인생의 선배로 훈수를 들어주는 일경 스님을 찾아온다.

일경 스님이 건강이 따라줄 때까지 많은 이들에게 보시를 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희망의 부재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 옳다 그르다의 문제를 놓고 옥신각신할 수 없는 삶의 테두리가 있다. 그 틈새에 일경 스님이 누군가에게 그리움이 되고 위안이 된다면 스님은 스님의 몫을 다하는 인생을 사는 것이다.

어쩌면 지금 우리는 보시가 간절한 때를 살고 있는지 모른다. 따뜻한 한마디 말, 정감 어린 눈빛, 다 보시라는 이름의 큰 위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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