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태 칼럼] 백석의 시 감상

김형태 박사 승인 2022.01.10 16:10 의견 0

2007년 10월 14일 한국 시인 협회(회장 오세영)는 창립 50주년을 맞아 한국 현대 시의 대표시인 10명을 선정해 발표했다. 그들은 ① 김소월(진달래 꽃) ② 한용운(님의 침묵) ③ 서정주(동천) ④ 정지용(유리창) ⑤ 백석(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⑥ 김수영(풀) ⑦ 김춘수(꽃을 위한 서시) ⑧ 이상(오감도) ⑨ 윤동주(또다른 고향) ⑩ 박목월(나그네) 등이었다. 그리고 10대 시인에 버금가는 시인들로 김종삼, 이상화, 김영랑, 이육사, 김현승, 이용악, 조지훈, 신동엽, 박재삼, 기형도 등을 선정하였다. 오늘은 그동안 자주 접하지 못했던 백석의 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을 읽어보기로 하자. 어렵던 시절 신경림 시인에게 큰 힘이 되었다는 시이다.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바로 날도 저물어서/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나는 어느 목수(木手)네 집 헌 삿을 깐/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굿한 방에서/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 같이 생각하며/달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오면/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제우에 뜻 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또 문 밖에 나가지두 않구 자리에 누워서/머리에 손깍지 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내 가슴이 꽉 메어올 적이며/내 눈에 뜨거운 것이 피잉 괴일 적이며/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정을 쳐다보는 것인데/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느 먼 산 뒷 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아내도 부모도, 형제도 집도 없어지고 혼자 쓸쓸한 거리 끝을 헤매던 화자는 목수네 집 헌 삿(삿자리)을 깐 방을 얻어 쥔(주인)을 붙인다. 그리고는 물 밖에도 나가지 않고 누워 뒹굴거나 일어나 앉아 달옹배기 북덕불에 손을 쬐기도 하고 뜻 없이 글씨를 쓰기도 하면서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려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생각한다. 그러다가 문득 이 세상은 뜻대로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 자기들 마음대로 굴려 간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슬픔이나 한탄 따위는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움만이 남게 되는데 그때쯤 해서는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고 화자는 화로를 더욱 가까이 끼고 무릎을 꿇어 보기도 한다. 그리고 생각하는 것이다. 어두워 오는 저녁 바위 섶에 외로이 서서 마른 잎새에 쌀랑쌀랑 소리를 내며 눈을 맞고서 있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를…….

김수영은 “풀이 눕는다/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풀은 눕고/드디어 울었다/날이 흐려져서 더 울다가/다시 누웠다/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풀)”고 노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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