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태 칼럼] 가람 이병기의 시조 감상

김형태 교수 승인 2022.05.11 14:53 의견 0

① 외로 더져 두어 미미히 숨을 지고/따뜻한 봄날 돌아오기 기다리고/음음한 눈 얼음 속에 잠을 자던 그 매화//손에 이아리고 바람으로 시달리다/곧고 급한 성결 그 애를 못 삭이고/맺었던 봉오리 하나 피지 못한 그 매화//다가오는 추위 천지를 다 얼려도/찾아드는 볕은 방으로 하나 차다/어느 뉘 다시 보오리 자취 잃은 그 매화(이병기/매화)

② 풍지에 바람 일고 구들은 얼음이다/조그만 책상 하나 무릎 앞에 놓아두고/그 위엔 한두 숭어리 피어나는 수선화//투술한 전복껍질 발 달아 둥에 대고/따뜻한 볕을 지고 누워있는 해형수선/서리고 잠들던 잎도 굽이굽이 펴이네//등에 비친 모양 더우기 연연하다/웃으며 수줍은 듯 고개 숙인 숭이숭이/하이얀 장지문 위에 그리나니 수묵화를(이병기/수선화)

③ 바람이 서늘도 하여 뜰 앞에 나섰더니/서산머리에 하늘은 구름을 벗어나고/산뜻한 초사흘 달이 별 함께 나아오더라//달은 넘어가고 별만 서로 반짝인다/저 별은 뉘 별이며 내 별 또 어느 게요/잠자코 홀로 서서 별을 헤어 보노라(이병기/별)

④ 밤이면 그 밤마다 잠은 자야 하겠고/낮이면 세 때 밥은 먹어야 하겠고/그리고 또한 때로는 시도 읊고 싶구나//지난봄 진달래와 올봄에 피는 진달래가/지난여름 꾀꼬리와 올여름에 우는 꾀꼬리가/그 얼마 다를까 마는 새롭다고 않는가//태양이 그대로라면 지구는 또 어떨진가/수소탄 원자탄은 아무리 만든다더라도/냉이꽃 한두 송이에겐들 그 목숨을 뉘 넣을까(이병기/냉이꽃)

⑤ 파랑새 날아오면 그이도 온다더니/파랑새 날아가도 그이는 아니 온다/오늘도 아니 오시니 내일이나 올는가?//기다려지는 마음 하루가 백 년 같다/새로 이가 나고 흰머리 다시 검어라/그이가 오신 뒤에야 나는 죽어가리라(이병기/파랑새)

가람 이병기(李秉岐/1891.3.5.~1968.11.29.) 선생은 우리나라의 시조 작가 겸 국문학자이다. 연안(延安) 이씨이고 호는 가람(嘉藍)이며 전라북도 익산에서 태어났다. 그는 한성사범학교를 나와 경성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집으면서 많은 시조를 발표하였다. 1926년 시조 부흥을 위해 동아일보에 <시조란 무엇인가?>를 발표한 후부터 현대 감각에 충실한 새로운 시조를 발표했다. 1939년 <가람 시조집>을 발간했으며 문헌학자로서 숨겨져 있던 많은 고전 작품들을 찾아 학계에 소개해 왔다. 광복 후에는 우리 민족의 고전 문학을 현대어로 고치는 일에 힘써왔고 전북대학교 문과대학장, 서울대학교 강사, 중앙대학교 교수 등을 지냈다. 가람 선생의 시조를 몇 편 더 소개하겠다.

⑥ 설레던 바람 자고 서리는 고이 내렸다/해 돋아 오르고 멀리 안개는 잦았다/떼지어 까마귀들은 어느메로 가는고//아직 이 걸음이 하루 백리(百里)는 가겠다/이리저리 다니며 맘대로 놀고져라/가다가 우러러보며 너를 나는 부럽다(이병기/봄아침)

⑦ 보릿잎 파릇파릇 종다리 종알종알/나물 캐던 큰아기도 바구니 더져 두고/따뜻한 언덕 머리에 콧노래만 잦았다//볕이 솔솔 스며들며 옷이 도리어 주체스럽다/바람은 한결 가볍고 구름은 동실동실/이 몸도 저 하늘로 동동 떠오르고(이병기/볕)

⑧ 재 너머 두서너 집 호젓한 마을이다/촛불을 다시 혀고 잔 들고 마주 앉아/이야기 끝이 못 나고 밤은 벌써 깊었다//눈이 도로 얼고 산 머리 달은 진다/잡아도 뿌리치고 가시는 이 밤의 정(情)이/십리(十里)가 못 되는 길도 백리(百里)도곤 멀어라(이병기/송별(送別))

3행의 짧은 글 속에다 어떻게 이런 심오한 내용을 담을 수 있는가? 주로 카톡을 사용하여 최소한의 문장 축약 기호로 단발 정보만 주고받는 현대인들의 심성이 넓고 높고 깊어질 리는 없을 것이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옛 시인들의 초연한 심상을 공유해보면 우리의 정서도 좀 더 촉촉해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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