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일의 시평] 경작(耕作) / 이성선

박승일 승인 2022.06.03 16:12 의견 0

경작(耕作) / 이성선

새벽에 농부는 밭을 간다.

쟁깃날에 햇빛이 갈리어

밭고랑에 넘어진다.

고랑마다 번쩍이는 하늘 물소리.

밤내 껴안고 신음하던

마음의 밭뙈기를 꺼내

벌판에 펼쳐놓고

힘껏 갈아가는 농부

넘어지며 부서지며 농부는

밭을 간다.

돌밭을 갈고 바람을 갈고 산악을 갈고

아내의 바닥에 고인 슬픔을 갈고

아이의 눈 속에 핀

새소리를 갈고.

그가 갈아온 밭고랑에

고인 눈물

하늘에나 빛나는 가난한 물빛

일생을 갈고 와 이제

황혼의 밭끝에 섰다.

그의 발 아래 다 갈려 넘어진 벌판

찢긴 밭고랑에 피빛으로 타는 놀

노을 속에 끝내 자기마저 갈아버리는

그의 뒷모습이

어둠에 잠기고 있다.

이 글은 외견상 가난한 농부의 삶을 그리고는 있으나 “밤 내 껴안고 신음하던 마음의 밭뙈기”에선 한 편 시를 짓기 위해 고뇌하는 시인과 가진 것 없는 그에게 기대 사는 아내와 아이의 애환도 엿볼 수도 있는 것이다.

때 묻지 않음은 어디서 구하는 걸까, 이성선은 경작을 통하여 깨달음을 구하려는 구도자의 마음으로 자신마저 갈아엎는다.

이성선(1941-2001)
시집 <시인의 병풍>, <별이 비치는 지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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