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희 작가의 추억의 뜰] 이종무 (1937년~)

이름 없는 범부(凡夫)로 사는 락(樂)

김경희 작가 승인 2022.09.07 13:21 의견 0

아파트 입구 느티나무 한그루, 오랫동안 오가는 주민들의 벗이 되어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메아리로 돌려주고 지나는 차 소리, 세상의 소란한 소리들도 모두 삼키며 든든한 이웃이 되었다. 나이가 몇 살인지 알 수 없으나 아마도 그 동네에서 나이 많기로는 몇 손가락 안에 들 것이다. 말 그대로 ‘터줏대감’이다. 느티나무와 벗 되는 터줏대감이 한 분이 더 계신다. 이종무 아버님 무수한 세월이 흐르는 동안 마을이 아버님을 지키고, 아버님도 마을을 저버리지 않았다.

국민학교 단체사진

■ 징용, 겁에 질린 얼굴로 내 시야에서 멀어지던 형님의 뒷모습

1930년대에 태어났으니 일제 강점기 때 초등학교를 다니고 해방 그리고 두려움에 떨면서 피난길을 헤매던 유년의 기억까지 우리 동년배들의 인생도 고단하기로 말하자면 밤을 새워 토로해도 모자란다.

내가 대여섯 살 무렵, 형님이 징용으로 끌려가는 모습을 싸리문 뒤에서 훔쳐보면서 소리 없이 울어야 했고 가슴 치며 통곡하는 어머니의 절규도 잊을 수 없다.

일본 순사 손아귀에 목덜미를 잡힌 채 겁에 질린 얼굴로 내 시야에서 멀어지던 형님의 뒷모습을 어찌 잊을까. 가슴이 찢어진다는 게 어떤 고통인지 알게 된 날이었다.

그 이후로 살아서 형님을 다시 보지 못했다. 해방이 되어 징용으로 끌려간 이들을 태우고 오던 배가 폭파되어 바다의 원혼이 된 형님의 영혼을 바다에서 만나고 돌아왔다.

징용으로 끌려가던 형님의 뒷모습이 떠올라 며칠을 앓아누웠다. 핏줄은 참으로 애틋하고 무엇으로도 끊어낼 수 없다. 험악한 세상이 되어 뉴스 속에서 혹간 이웃의 이야기 속에서 혈육 간의 분쟁을 목도할 수밖에 없는 슬픈 현실을 맞이하기는 했지만 누가 뭐라 해도 ‘피는 물보다 진하다’.

■ 바람결에 날아온 쌀겨껍데기 그리고 비극

내 인생의 발목을 잡은 불상사는 참으로 어이없는 쌀겨껍데기에서 비롯되었다. 아홉 살 무렵 쌀겨껍데기가 오른 쪽 눈으로 들어가서 간질간질 하더니 결국 눈을 제대로 뜰 수도 없었다. 밤새 눈알이 빠질 거 같더니 아침에는 얼굴까지 퉁퉁 부어서 눈을 뜰 수도 없었다. 작은 시골마을에 변변한 안과가 있기를 하나 며칠 지독하게 앓고 우린 먹고 사는데 급급해서 다들 잊었다. 나도 며칠 눈알이 빠질 듯이 아프더니 어느새 통증이 가라앉았지만 훤하던 세상이 희미해져 가고 결국 약시가 되어 한쪽 눈으로 생활하게 되었다. 군대도 면제 됐으며 나머지 한쪽 눈까지 나이 들수록 약시가 되면서 사회생활을 변변히 할 수 없었다. 바람 불면 날아갈 그 쌀겨껍데기가 내 인생을 송두리째 집어 삼켰다. 우리를 위협하는 존재들은 오히려 엉금엉금 기어오던지 티끌처럼 작아서 보이지 않던지 그렇게 소리 없이 엄습해서 우리 인생의 희로애락을 좌지우지 한다. 미사일 보다 무서운 게 눈에도 안 보이는 ‘코로나’라고 우리는 3년간 내내 부르짖지 않았던가?

■ 장리쌀, 하늘바라기 농사꾼들의 피고름을 짜다

6·25때 잠시, 김천으로 시집간 누님댁에 피난을 다녀오긴 했지만 총성이 잦아들 즈음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피난 행렬을 따라 김천까지 가면서 한여름 땡볕 내리쬐던 전쟁 통에 엄마를 놓칠세라 어깨에 이불 보따리를 짊어지고 잰걸음을 내딛던 열네 살의 내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훤하다. 피난 길 들판을 지나가면 물 댄 논에 개구리들이 어찌나 구슬피 울던지 우리 피난민들 처량한 신세를 녀석들도 알기는 알았던가 보다. 우리 세대가 살아온 시절의 부산물들이 험한 꼴일 수밖에 없던 때다.

우리 동네도 40호가 조금 안 되는 작은 마을이었는데, 땅덩어리가 작지는 않았지만 변변치 않은 동네라 부락민들이 많지 않았다. 초가집 짓고 농사 지면서 근근이 먹고 살았다. 농사꾼들이 많아서 다들 하늘바라기였다. 농사짓는 사람들에게 날씨는 치명적이라 하늘 바라보면서 가뭄 들지 않게, 홍수 나지 않게 해달라고 비는 하늘바라기 신세였다.

누님들과 형님 5남매 중 나는 막내였다. 누가 나에게

“인물도 잘생기시고, 막내라서 귀여움 많이 받으셨겠어요?”

라고 속 모르는 소리를 한다. 얼굴 밉다는 소리는 안 들어봤지만 다들 쌀 구경하기 힘든 시절에 막내라고 귀여움 받을 여력이 어디 있을까? 고구마라도 나눠 먹으려면 형님과 누님 눈치도 봐야 하고 곤궁한 시절이었다. 어머니께서 홍두깨로 밀어주시던 칼국수 한 그릇이면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이 후루룩 뚝딱 비우곤 했다. 먹고 살 거리가 없으니 마을에 농사 좀 짓는 집에서 장리쌀(장례쌀)을 얻어서 끼니를 해결하곤 했다. 봄에 쌀 한 가마니 빌리면 가을에 한 가마니 반으로 되갚아야 하는데 어느 세월에 반 가마니를 얹어서 줄 수 있을까. 가난의 올가미에서 벗어나려면 숨이 턱턱 막혔다. 굶어 죽지 않으려니 피고름이라도 짜야 했다.

■ 국민학교를 두 번 다닌 사연인즉

어렸을 때 살던 이야기를 하면 어찌 살았나 기막혀 말문이 닫힌다. 국민학교도 두 번이나 다녔다. 먹고 살 거리가 없으니 월사금을 제대로 못 내 선생님이 “정무야, 집에 가서 월사금 가져와라.”라며 급우들 앞에서 창피를 줬다. 쫓겨나듯이 나와서 나는 그 이후로 2년을 학교에 가지 못했다. 끼니 거리도 없으니 언감생심, 학교는 나에게 사치였다.

2년을 쉬고 다시 3학년으로 들어갔더니 마을에서 나에게 형님 하던 애들이랑 같이 학교를 다니게 되었다. 하기야 내가 형님 하던 형들도 나랑 같이 학교를 다였으니 제 나이에 학교 다니는 것만도 다행이던 시절이었다. 서로 어렵게 산 이야기 터놓기 시작하면 밤새는 줄 모를 것이다.

■ 보물단지 아내, 고생문이 닫히기 시작한 건 아내 덕분

25살에 중신이 들어와서 박정순과 결혼을 했다. 아내는 보물단지다. 아내는 옆 동네에서 시집을 왔는데 내가 약시인 줄 모르고 시집을 왔다. 중신애비가 어릴 때 눈을 다쳤다고 지나는 말처럼 전한 통에 적당히 보이는 줄 알았던 모양이다.

결혼 전에 약혼 사진 찍던 날 처음 아내와 대면했다. 나는 25살 아내는 22살, 목단꽃처럼 예쁘고 참하던 아내. 우리 집에 와서 어색한 첫 만남을 하고 대전 나가는 버스를 집어 타고 시내에 나가 약혼 사진을 찍었다. 둘 다 뻘쭘한 사진이지만 그 부끄러운 만남 후에 1962년 10월 한창 좋은 날씨에 결혼을 하고 3남매를 낳았다.

아내는 시집와서 보니 아마 기가 막혔을 것이다. 둘째 며느리인데 20여 년간 시어머니를 모시고 결국 대소변 수발까지 다 해내야 했고, 시력을 잃어 변변한 능력 없는 서방에 아이들까지 키우느라……. 거기에 방직공장의 근로자로 일하면서 1인 5역을 해냈다. 너무 고마운 아내다. 묵묵히 살림도, 직장생활도, 시어머니 봉양까지 잘해준 아내. 신사임당이 따로 없다.

1969년 무렵 박정희 대통령 시절 외딴집 철거비용으로 받은 17만 원으로 집을 지어서 우리 살림을 시작했다. 나는 약시에 특별한 기술이 없어 공사 현장에서 막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경부 고속도로 현장에도 나가서 낙반 사고로 하마터면 죽을 뻔한 아찔한 경험도 했다. 먹고 살기 위해서 발버둥 치던 지난날을 다시 기억하는 건 그리 유쾌하지 않지만 열심히 살았던 추억으로 그날들을 마음에 새겨본다.

가진 것 없는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나와의 약속을 만들었다. 술 담배 안 하고 그저 하루 일당은 모두 아내에게 맡기고 매일 용돈을 타서 쓰기로 했다. 아내와 같이 허리띠 졸라매면서 열심히 살고 한 푼 두 푼 모았다. 아내가 계도 야무지게 하고 저축도 하면서 차곡차곡 모았다. 그때는 계가 많아서 곗돈 사고도 많았는데 우리는 다행히 그런 불상사가 없었다.

이제 허리는 굽었지만 나라에서 노인들을 챙겨주고 자손들도 알아서 자기 밥벌이를 하니 걱정이 없다. 우리 부부는 배움도 가진 것도 없이 맨손으로 시작했지만 우리 3남매는 남들만큼 배우게 하고 사회에서 어엿한 자리에서 자기 몫을 하고 있다.

나 같은 촌 노인의 후손 중 박사가 셋이나 된다. 감격스럽고 고마운 우리 새끼들이다. 끼니도 제대로 못 먹던 그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지금은 부자가 된 것 같지만 내 인생의 구원의 여인인 아내도 3년 전 먼저 선산에 자리를 잡았고 친구들이 하나둘 먼저 이승을 떠나서 곁을 지키는 벗이 없는 허전한 마음은 무엇으로도 달랠 수 없다.

■ 쌀독 빌 걱정 없는 감읍한 매일

아파트 입구 버스정류장에서 우두커니 앉아 버스에서 오르내리는 사람, 지나는 사람들을 보면서 몇 시간씩을 보내기도 한다. 심심해서 소일거리인 양 자리 잡고 앉기 시작했지만 이제는 그 재미가 쏠쏠하다. 모르는 이들은 ‘저 노인네가 저기 앉아 뭐하나?’라고 고개를 갸우뚱하겠지만 지나가는 사람들을 우두커니 앉아 바라보는 그 맛을 누가 알까.

뭐든 계속하면 새로운 게 보이고 그 안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있다. 첫째 아들이 내년 2월이면 은퇴를 한다. 은퇴 후에 바로 우리 옆 동네로 이사 온다고 아들 내외가 주말마다 와서 집 안 구석구석 꾸미고 다듬고 있다. 같이 살지 않아도 힘이 난다. 서울에서 60년 넘게 산 며느리가 어찌 살지 염려도 되지만 마음이 갸륵하다.

궁핍한 유년 시절을 생각하면 지금은 호사를 누린다. 쌀독 빌 걱정이 없고 내 건강만 지키면 된다. 작은 동네에서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다 보니 큰물에 나가 대업(大業)을 이루지는 못 했지만 대업을 이룬 사람은 작은 시골 마을의 범부(凡夫)로 살았던 락(樂)을 모를 것이다.

이만하면 족하고 자존심을 지켰다. 물론 모든 건 먼저 간 고마운 아내 덕분이다. 지팡이가 친구가 되어 다니지만 언젠가 지팡이 잡을 힘도 없어지는 그 날이 온다면 저녁을 먹고 꿈속에서 아내를 만나러 가고 싶다. 언제 일이 될지 모르는 그 날을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반가운 손님으로 맞을 채비를 할 수 있게 된 지금 노년의 나는 슬프지 않다. 죽음은 비극이 아니라 누구나 맞이해야 하는 ‘귀한 손님’이다.

매일 세수를 깨끗이 하고 정갈하게 ‘귀한 손님’ 맞을 준비를 하면서 하루하루를 쌓으면 된다. 그럼 또 그 매일 매일이 빛이 날 것은 자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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