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림의 인생 Rebooting] “어르신, 이제 영어간판 속 시원히 읽으세요!”

입시영어 하다 왕초보 어르신 가르친다… “제가 배우는 게 10배 더 많아요.”

정여림 작가 승인 2022.10.12 13:39 의견 0

미쉘잉글리쉬어학원(경남 통영시 북신로 53) 강미숙 원장

미쉘잉글리쉬어학원 강미숙 원장


▶ 어학원의 문을 두드리는 어르신들… 그 애환을 못 들은 척 할 수 없었다

“여기, 학생들만 공부할 수 있는가요? 영어 공부하고 싶은데……, 나이 든 사람은 안 받지요?”

어학원 문을 어렵게 열고 들어와서 영어 공부를 할 수 없겠냐고 묻는 어른들이 종종 있었다. 강 원장은 처음에는 정중히 거절하다 나중에는 마음이 무거워졌다. ‘어르신들이 가서 배울 곳이 정말 없구나…….’

우리 어머니 아버지 세대는 대다수가 자식들만 공부시켰지, 자신은 공부를 제대로 못 하는 시절을 보냈다. 혹자는 그 부분이 가장 한 맺히는 부분이라 한다. 강 원장은 그 애환을 읽고 그들의 한을 풀어드리고 싶었다.

수강생이 들꽃을 따 직접 만들어 씌워준 화관


▶ 부산에서 학원 사업하다 뜻하지 않은 일로 사업 접고 휴양차 결정한 통영행

강 원장은 미국 유학을 거쳐 부산에서 어학원을 크게 운영하며, 해외 유학사업도 했었다. 승승장구로 사업을 이어가던 중, 뜻하지 않은 일로 회의감에 빠졌다. 굳게 믿었던 사업 파트너에게 실망하자 상처를 크게 받았고 사람 자체가 싫어졌다. 입점해 있던 어학원 건물도 마침 비워 줘야 해 사업을 그만 접게 됐다.

쉼이 필요했다. 2007년, 사십 대 중반. 한국의 나폴리라 일컫는 항구가 아름다운 도시 통영에 언니네가 살고 있어 그곳에 잠시 머물며 머리를 식히게 됐다. 하지만 그녀는 천생 영어 선생이 되어야만 하는 운명이었다. 우연한 기회에 몇몇 학생을 지도하다, 지역에서 영어 교사를 원하는 많은 학부모의 청탁으로 다시 강사의 길로 나섰다. 그의 수업은 크게 인기를 끌었고 통영 지역에 어학원을 다시 개업하는 단계까지 이르렀다.

그런데 통영이라는 도시는 독특했다. 연세 지긋한 분들의 학업 열기가 남다른 곳이었다. 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사이사이에도 어학원의 문을 두드리는 어르신들의 간절한 눈동자를 잊을 수 없었다.

통영 용남면 주민센터 수강자들과 함께


▶ 그분들의 가려운 데를 시원히 긁어주고 싶었다

사람을 좋아하고 인정이 많은 강 원장은 처음에는 어르신들께 다른 학원을 안내해 드렸다.

“어르신, 여기는 수험생 위주라서요, 저쪽에 새로 생긴 성인 영어반에 한번 가보시죠?”

“그곳은 다 고급반이라 하더라. 왕초보만 가르치는 데는 하나도 없더라.”

학원을 찾아오시는 어르신들의 사연은 구구절절했다. “죽기 전에 영어를 한번 배워 보는 게 소원이다.”, “무슨 뜻인지 몰라도 영어를 한번 읽기만 해도 좋겠다.”, “차량을 보고 저 차가 무슨 차인지 알고 싶다.”, “화장품 선물 받으면 이게 어디에 바르는 건지 알고 싶다.”, “영어 간판 보고 읽을 수 있으면 좋겠다.” 등등.

우리 삶에는 어느새 영어가 깊숙이 들어와 영어를 모르고서는 여러 불편이 초래되는 상황이 온 것이다. 그런 고민을 외면하지 못하던 2012년 무렵, 강 원장은 ‘빨래집게 놓고도 A를 모른다’고 한탄하시는 그분들에게 자신이라도 나서야겠다고 생각했다.

‘Good Morning’부터 가르치기 시작하려는데 일부 어르신들의 표정에서 좀 더 기초로 가야겠다고 느꼈다. ABC부터 가르치는 교재를 준비했다. 또 수준 높은 영어를 접하고자 하는 수강생도 있기에 그들의 눈높이도 맞추기 위해 여러 수업을 고안했다. 컴퓨터로 팝송들을 골라 독음을 달았고 활자를 키웠다. 그분들의 가려운 데를 시원히 긁어주고 싶었다.

어르신들은 “가장 목마른 게 배움이다. 배움은 돈 주고도 살 수가 없더라.”며 강 원장을 깍듯이 선생님으로 모셨다.

영사모 회원들과 함께 단합회


▶ 통영 최초로 주민센터에 영어수업 개설… 수강자 절반 이상이 50대 후반, 최고령자는 80대

강 원장은 자신의 영어 이름을 단 ‘미쉘어학원’을 운영하면서, 성인 영어의 저변 확대를 위해 통영 최초로 주민센터, 문화센터 등에 성인 영어반을 개설했다. 수강자 절반 이상이 50대 후반이며 최고령자는 80대인데 학업의 열기만큼은 여느 청년 교실 못지않게 뜨거웠다.

“코로나 전에는 일주일에 200분을 수강생으로 만났는데 최근에는 120~130명 된다. 어르신들 말씀이 ‘모여서 남의 말 안 하고, 멍하니 TV 안 보고, 수업 나와서 소리 내어 영어 읽고 공부하는 게 귀한 낙(樂)’이라 하신다. 죽는 날까지 공부하시려는 분들이다. 저는 이분들을 정말로 존경한다.”

미쉘 수업만의 특별함은 있다. 그는 활기차고 역동적인 태도와 밝은 목소리로 듣는 이를 유쾌하게 하는데, 수업 후에는 뒤풀이 겸 식사도 하며 수강생 간 인간적인 교류도 돈독히 쌓는다. 지역 내에 소문이 나고 여기저기서 중년의 수강생들이 줄줄이 모여들었다.

스승의 날 선사받은 꽃다발을 들고


▶ 수업에서 만나 인간적인 유대로 똘똘 뭉쳤다… 다양한 영어 커리큘럼

10여 년 전, 처음 그녀와 영어를 시작했던 분이 지금까지도 수업에 나와 공부할 만큼 한번 맺어진 인연은 오래 간다. 통영, 거제, 고성에서 그녀의 수강생 모임인 ‘영어를 사랑하는 모임(영사모)’도 오래전에 만들어져 주기적인 레저 활동과 단합대회를 갖는다.

강 원장의 수업은 요일마다 다양하게 꾸려진다. “우리가 수능시험을 칠 것도 아니잖아요.” 하며 영어를 즐긴다. 월요일은 팝송을 배우고 실제 불러보는 시간, 화요일은 중급과 초급 영어, 수요일은 프리토킹(Free talking), 영미소설 읽기, 영자 신문읽기 등으로 다양하게 하는데 인근도시에서 수강하러 오는 열혈 팬도 다수다.

코로나 시대엔 줌(zoom) 화상수업도 열었는데, 참여한 어르신들은 이런 첨단 수업 방식으로 참여한다는 자체를 뿌듯해했다. 손자들에게 “할머니 할아버지도 디지털 세대”라며 자랑한다.

강 원장이 어르신에게 저렴한 수강료로 배려해 주다 보니, 그들은 매번 농사지은 찹쌀 고구마 등을 학원에 갖다 나른다.

즐거운 팝송수업 시간


▶ 좋아하는 영어, 평생 할 수 있어 즐겁다

“제가 좋아하는 영어를 평생 할 수 있어 너무 좋다. 또 인복이 많아 수업에서 좋은 분들 많이 만나니 너무나 행복하다. 처음엔 독음을 달아 읽으시던 분들이 이제 순전히 영어만 보고 읽는 것을 보면 참 보람 있다. 저는 달랑 영어 하나 가르쳐 드리는데, 열 가지, 스무 가지 이상 수강생들로부터 배운다.”

70대 초반인 한 수강생은 필자에게 전했다. “자식들이 저를 보고 굉장히 ‘엄지 척’ 한다. 며느리, 손자가 나를 달리 본다. 주위에서 ”영어를 그 나이에 왜 해?“ 하며 부러워 시샘하면, 배운 것을 써먹는다. ‘Better then nothing’이라고. 하하.”

낱말 퀴즈 우승자 상금 20달러


강 원장의 “열심히 하던 분이 시력에 문제가 와 의사가 책을 보면 안 된다는 선고를 해 눈물 흘리셔서 저도 같이 울었어요.”라는 말을 듣고, “배움이라는 것은 인간에게 어떤 의미일까요?”라고 물어봤다. 강 원장은 스스럼없이 대답했다.

“그분들에게만큼은 배움이라는 것은 아마… 다시 태어나는 것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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