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희 작가의 추억의 뜰] 여든이 넘은 나의 호시절 이야기 들어볼텨? 정동춘 어머니(1941년~)

김경희 작가 승인 2022.11.08 14:18 의견 0


“그랴, 읍내 거기서 봐.”

동네 새댁들이 전화가 왔다. 막걸리 한잔 먹기로 하고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는다. 오늘은 내가 계산하는 날, 지갑도 단디 챙겼다. 동춘 형님네 둘째 딸 기순이, 이장댁. 내 막걸리 친구들이다. 60줄에 선 새댁들이니 나보다 한참 밑에 동상들이랑 술잔을 주고받는다. 읍내에서 셋이 만나 서로 돌아가면서 지갑을 열고 막걸리 한잔하면서 심심함을 달랜다. 젊은 아낙들이 나를 끼워주니 고맙지. 아직 말귀를 알아듣고 막걸리 잔 주거니 받거니 해도 아직은 손이 바르르 떨리지 않는다.

40년넘게 쓰고 있는 가계부

50년 된 가계부를 꺼내서 보여줬더니 둘이 기절초풍을 한다. 내 역사잖아, 살아온 역사. 귀하고 귀한 거지. 하루도 허투루 안 살았던 훈장 같은 거야. 그래서 나이 먹고 시골할매로 살지만 나는 당당하다. 이런 얘기 저런 얘기 쏙쏙 꺼내면서 집 얻으러 다니느라 오밤중에 산 넘고 물 건너 고생한 얘기를 들려주려니 한숨이 나왔다. 그런데 옛날이야기를 실타래처럼 풀었더니 지금까지 잘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어 어깨가 으쓱했다.

먼저 간 영감이 나랑 같이 즐거우면 좋으련만 둘이 살다 한사람이 먼저 가는 건 어느 한 집도 예외가 없으니 나는 나대로 잘 살다 가야 먼 훗날 영감 만날 때 더 반가울 거다. 동네 동상인 흥선이가 아침이면 동네 한 바퀴 돌면서 우리 마당에 와서 헛기침을 한다. 들은 척을 할 때도, 듣고만 있을 때도 있지만 나를 깨우는 헛기침 소리가 귀찮지 않고 고맙다. 하여튼 한 동네에서 우리 집 마당에 발길을 들이는 것만도 고마운 일이다. 동네 노인정 만들 때 흥선이 땅에 노인정 짓느라 영기 엄마랑 흥선이를 삶아대던 생각 하니 절로 웃음이 난다. 이제 흥선이도 70이 가까워 오는 늙어가는 나이가 됐으니 세월도 무심하다.

18살 꽃다운 나이

동네가 시원하게 내려다보이는 우리 집, 53년 동안 궂은일도 기쁜 일도 많았지만 애걸복걸 안 하고 살은 이유는 단 한 가지다. 그냥 살면서 부아가 치밀면 이렇게 했더니 진정되고 저렇게 생각을 바꿨더니 숙제가 해결되더라. 그리 알 뿐이다. 한때는 수줍은 미소를 머금을 줄 알았고 이제 벼락이 치고 폭풍우 몰아치는 밤, 문밖에서 요란한 천둥소리가 나도 두렵지 않다. 살 만큼 살았다는 얘기도 될 터이지만 지난 시간 속에서 고단했던 일들에 비하면 지금의 우리를 겁박하는 것들은 티끌 같다. 그래서 당당하다.

고난 속에서 배움이 없어도 해결해왔고 자식들은 다들 여유 있게 잘살고 있다. 마당에서 내려다보면 30여 호 안팎의 동네, 초록 들판밖에 보이지 않으나 다 가진 것처럼 마음이 그득하다. 여한이 없다는 말을 이럴 때 쓰나 보다. 동춘아, 춘하추동 동춘아 잘 살아 왔구나…….

■ 빨간 지붕, 우리 집 나이도 쉰둘이네

1941년생이여. 우리나라 나이 여든셋, 요즘은 나라에서 만으로 나이를 맥인다니 여든둘이지. 어느새 80년을 훌쩍 거슬러 왔나 몰러. 지금 용산리 이 집에서는 52년을 살았다. 우리 4남매 다 낳고 이 집으로 왔으니 반백 년이 넘은 집이다. 우리 석순이 낳고 다음 해에 왔으니까, 그 젖먹이 석순이가 쉰셋이다. 아직도 고운데 벌써 쉰이 넘었다. 우리 옛적 쉰 살이면 할매 소리 들었는데 세상이 좋아져서 우리 딸만 봐도 새댁 같다. 좋은 세상이 오긴 온 것 같은데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뉴스 보면 왜 그리 험악한 얘기들이 많은가 몰러. 세상이 좋아지면 사는 것도 더 좋아져야 하는데 우리 가난하게 살던 그 시절이 간간이 그리울 때가 있어. 그때는 없이 살아도 인심들은 좋았는데 말이야.

금왕에서 살다가 4남매 다 낳고 여기로 왔다. 옛날엔 우리 집을 봉학골에서 빨간 기와집이라고들 불렀다. 동네에서는 그래도 끗발 있는 군청 산림계장 집이라고 방귀깨나 뀌는 집이었다. 그러믄 뭐 햐, 우리 영감님은 곧이곧대로 살던 양반이라 그 끗발 있는 자리에서도 고지식하게 일하느라 콩고물 한번 얻어먹은 적이 없네. 허울 좋은 끗발이었지만 듬직했던 우리 집 양반이 최고였어. 우리 아이들도 영감님 닮아 다들 양반이야.

■ 고향은 장호원, 백화점 물 좀 먹었지

내 원 고향은 장호원이야. 경기도 이천군 장호원읍. 장호원은 80년 전이나 똑같아 스물한 살에 남편 만나서 원남 덕정리로 시집왔다. 반기문 생가 근처 동네지. 친정집은 농사를 지었어. 보리쌀 농사짓고 식구들 입에 겨우 풀칠이나 했으니 니집내집 다들 가난하게 살던 때야. 우리 집이라고 뾰족한 수가 있나. 부모님은 인자하시고 나를 많이 사랑해주셨어. 부모님 품을 떠난 건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작은아버지가 나를 데려다가 공부시켜준다고 초등학교 3학년 때 작은 집으로 갔다. 친정은 가난해서 작은 아버지젙(곁)에서 공부를 이어갔다. 작은 집은 잘사는 집이라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밥값 하느라 그 집 애기도 보고 집안일도 거들면서 초등학교를 나왔다. 장호원여중에 다니다가 작은아버지가 운영하는 백화점에 들어갔다. 그래도 교복 입고 여중 다니던 기억이 머릿속에 있으니 큰 추억이다. 우리 친정 남매들 이름은 동순 동철 동만 동춘이 4남매인데 나는 남자 이름 같았다. 어릴 때는 동네 남자아이들이 춘하추동 동춘아 하면서 놀리면서 불렀지. 그때는 사내 녀석들이 여간 짓궂었어야지.

장호원에 합심사라는 백화점이 있었는데 작은 집이 하던 거야. 백화점에서 심부름도 하고 작은 일들을 도왔다. 일머리가 좋아서 나이는 어렸어도 야무지게 잘했어. 작은 집에서 공부시켜주고 먹여주고 재워주는 대신에 나도 열심히 일을 도왔어. 학교 갔다 오면 심부름하고 애기 봐주고 가게 가서 물건 해놓고 연일 바빴네. 지금 여든이 넘어서도 아직 총기 있다는 소리 듣는 건 어쩌면 작은 집에서 공부도 했지만 백화점 다니면서 여러 가지 배워서 문리를 깨우친 모양이야. 세상에 공짜가 없다고 그렇게 저렇게 고단했던 시간들이 또 영민한 내가 되었네. 그때 훈련받아서 아직 총기가 있나 봐.

백화점에 있을 때 보따리 장사 보부상 할매들이 나한테만 와서 물건을 주섬주섬 갖다놓고 “아가씨 이것 좀 끼워 넣고 팔아줘.” 하더라고.

내가 얼굴에 솜털이 가시지 않은 때라 순진해 보여서 그랬을 거야. 나는 우리 엄마가 가난해서 보부상 할매들도 가난할 것이라고 생각하니 엄마 생각이 나서 슬쩍슬쩍 물건을 끼워서 진열해주기도 했어. 동변상련이라고 그 마음을 알겠더라고 먹고 살겠다고 애쓰는데 내가 해줄 수 있는 거라 눈치껏 할매들 물건을 끼워서 팔아줬지.

순전히 우리 엄마 생각해서 그랬던 거야.

백화점에서 물건 팔려면 머리도 좋아야 돼. 물건마다 가나다라 암호가 있거든. 지금 말로 정가라고 생각하면 돼. 예를 들어 ‘가’ 하면 천 원짜리, ‘나’ 하면 2천 원짜리들로 정가를 표시하는 거야.

백화점에서 열심히 일하면서 스무 살이 됐어. 그때는 친구들이 보통 열여덟, 열아홉에 시집들을 많이 갔어. 나는 스물한 살에 중매가 들어왔어. 덕정리 김주사 댁이라고 뼈대 있고 돈 많은 양반 가문이라고 해서 시집가서 팔자 고치려나 내심 기대했었지. 시집와서 보니 그 많은 땅을 다 팔아먹고 빈털터리인 거야. 고생문이 훤하더구먼…….

스물한 살 결혼식


■ 덕정리 김주사 댁으로 호적을 옮기다, 뒷모습 둔둑했던 남편

우리는 결혼 전에 세 번은 만났을거야. 약혼 사진 찍으러 가야 되잖아. 약혼 사진 찍는 날 처음 만나고 세 번 만났어. 공부하고 백화점에만 다니다가 선을 봤으니 어디 남자 만날 일이 있기를 해 쑥스럽지. 그래서 뒤통수만 봤어.

양복 입고 왔는데 뒷모습이 둔둑하더라고. 듬직해 보였어. 살아보니 천하의 양반이야. 스물한 살에 첫눈에 보면서 듬직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마음이 60년 동안 변함이 없었어. 생전 말수가 없었어. 음성군청에 산림과에 다녔는데 그때는 산림과면 최고 끗발이 좋은 과였어.

결혼할 때는 원남면에서 면서기로 시작했어. 그때도 산림과에 있었어. 결혼할 때 나는 21살, 남편은 24살이었지. 남편은 외아들이라 군대도 6개월만 근무했어. 딸 셋에 6·25 때 아들 하나 나가고 막내인 남편이 종갓집 대를 물려받게 됐어.

시집와서 보니 남편은 합격이었는데, 중매쟁이 말은 부잣집이라 했지만 생각보다 돈이 많은 집은 아니었어도 시댁 식구들 인품은 다들 좋았어. 시집가서 보니 우리 남편이 막내라 어머니가 연세가 많으셨어. 어머니께서

“새아가, 네가 밥해먹어라.”

하시며 됫박을 나한테 맡기셨어. 그때부터 살림을 했지. 시부모님을 3년 모시다가 음성군청으로 발령 나서 따로 살다가 무극으로 발령 나서 거기서 모셨지. 그리고 두 분이 돌아가셨어. 점잖은 분들이라 선산에 묻으러 상여 뒤를 따를 때는 하염없이 눈물이 났지. 요령 소리에 묻혀서 내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지만 없는 살림에 인품 지키던 어머니의 고단한 인생을 알기에 떠나보내는 길이 애처롭고 가슴이 저렸다.

■ 조카들까지 돌보던 새댁, 보따리 장사로 살림을 보태다

나 시집살이 한 번 안 시킨 어머니셨다. 외아들한테 시집와서 오는 족족 아들 3형제 낳고 막내 석순이 고명딸 낳았지. 일머리 좋지, 노인네 모셔놓고 공무원이라 생활하기 어려웠지만 시집살이는 안 시키셨다. 천하의 양반이셨다. 우리 동무들이 시집가서 대대로 시집살이 하느라 죽어나던 시절인데 거기 비하면 나는 인품 좋은 시부모님 만나서 마음고생은 안 했다. 친정에서도 자상한 부모님 품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내 복인 거지.

그때만 해도 공무원이 박봉이라 나도 같이 살림을 도와야 해서 궁리 끝에 서울 가락시장 가서 물건을 떼다 팔기로 했다. 시부모님에 아이 셋이라 남편만 바라보기엔 안 되겠더라고.

음성 촌에서 서울 가락시장이 어디 붙었나 알기를 해. 먹고 살겠다고 길을 찾다 보니 거기까지 갔네그랴. 기성복 속내복을 도매 받아왔어. 아침 첫 버스로 가서 물건을 해와서 보따리 장사를 시작했어.

아후, 그때 고생한 거 생각하면…… 그 야그는 다음번에 들려주기로 하세.

저작권자 ⓒ 시사저널 청풍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