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미 교장선생의 가곡 ‘그대가 꽃이라면’ 곡(曲)이 울려 퍼질 때

민순혜 기자 승인 2022.11.08 14:43 의견 0

음악애호가인 대화초등학교 김선미 교장선생은 지난 10월 “대전충청가곡 정기연주회”에서 가곡 ‘그대가 꽃이라면(장장식 시, 이안삼 곡)’을 첫 연주했다. 시종일관 단아한 모습이 노래 가사 중 하얀 민들레를 연상케 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연주여행중-마산가곡제

김 교장선생은 퇴임을 2년여 앞두고, 퇴임 후는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 활동을 좀 더 전문적으로 하고 싶다는 일념이 있었다. 첫 시도로 대전충청가곡연주회에 참여했는데, 작은 연주공간이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로 터질 듯 후끈했다. 대성공이었다.

김 교장선생이 교직을 택한 건 부친의 바람 때문이었다. 여성도 경제력이 있어야 한다는 부친의 간곡한 권유로 교대에 진학했다. 그러나 교대에 다니며 학교생활에 권태가 생기면서 ‘자신이 진로를 잘못 선택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졸업 후 서울신도림초등학교를 첫 부임지로 발령(1983. 9. 1.)받고, 교직자로 초등 아이들과 보람 있는 시간을 보내며 부친의 권유를 잘 받아들였다고 여기게 되었다.

전교어린이회 임원들이 회의 마치고 교장실에 회의보고 및 건의사항 전달하러 온 모습

김 교장선생이 교직 생활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일 중 하나는 10여 년간 국악 합주를 지도한 것이다. 이 시기는 정말 敎學相長의 시기였다. 각종 국악을 배우면서 한편으로 아이들을 지도해야한다는 부담으로 체력이 바닥이 나서 고생하기도 했지만 새로운 것을 잘 받아들이는 김 교장선생은 배우는 것이 마냥 즐거웠다고 회고했다.

그 당시 대전광역시뿐만 아니라 전국대회에 나가서도 1등을 했다. 그 제자 중에 전공자도 세 명이 있고, 김 교장선생도 자신이 즐기는 음악의 폭이 넓어지게 되었다. 그 후 교육과정에 국악이 정말 많이 투입되었고 김 교장선생은 우리 문화를 우리 아이들에게 퍼뜨리는데 일조했다는 자긍심을 갖게 되었다. 이것이 보람이라면 큰 보람이라고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다문화 어린이들과 대화하는 모임

서울 초임지에서 2학년 담임을 할 때 있던 아이들과의 일화가 하나 있다. 국정호라는 아이가 유난히 김 교장선생을 잘 따라서 상급 학년에 진급하고도 문제가 생기면 담임 선생님들이 아예 그 아이의 생활지도를 김 교장선생에게 맡기곤 하였다. 그 아이가 4학년 때 김 교장선생이 지방에서 결혼식을 하였는데, 결혼식에 오겠다는 정호를 그 아이 어머니가 말려서 오지 못하게 되자 생병이 났다.

김 교장선생이 대전에서 신혼생활을 하고 있을 때, 정호어머니가 아이 상태를 이야기하며 아이와 대전으로 김 교장선생을 보러 오시겠단다. 정호는 김 교장선생을 보자 엄마의 간청과 협박에도 불구하고 김 교장선생 신혼집에서 일주일을 머물다 갔다고 한다. 그 후도 정호는 고교 3년까지 대전에 있는 김 교장선생을 찾아오곤 했는데, 정호가 대학 입학을 하고 소식이 끊어졌다. 김 교장선생은 정호가 지금은 어떻게 변했는지, 성장한 정호가 몹시 보고 싶다고 했다.

극동방송운영위원들과 산행

그 당시 남편은 중등교사로 근무하며 고급 오디오를 통해 클래식 음악을 즐겨 들었다. 식구들은 그냥 공기처럼 클래식 음악에 젖어 살았고, 오디오광이던 남편 덕에 주변 지인들이 음악 감상하러 자주 왔다. 어느 날 집에 어떤 의사가 음악을 감상하러 왔는데 시어머니가 웬 의사가 저렇게 잘 생겼냐며 저 사람이 들어서니 집안이 다 훤하다고 하셨다. 그 훤한 분과는 후에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며 그분 두 아들의 교사로, 그분 연주회도 가고, 그분 아내와도 친분을 나누며 지내다 양쪽이 이사하며 잊혀졌다.

부부합송 시낭송

세월이 흘러 김 교장선생 남편이 병환으로 영면하시고, 김 교장선생은 홀로 10여 년간을 보내고 있었다. 어느 날 김 교장선생이 속해있던 합창단 단원들이 베풀어준 김 교장선생 생일 파티에서 우연히 그 훤한 의사(지금의 남편)를 만나 부부의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 사이 그 의사도 상처하고 외롭게 지내다 서로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상황에서 서로 부부의 연을 맺게 된 것이다. 하늘이 점지해준 인연인 셈이다.

김 교장선생도 의사인 남편도 아들만 둘씩, 합 아들 넷이다. 남편의 두 아들은 김 교장선생을 선생님으로, 어머니로 자연스럽게 김 교장선생님을 받아주고 따라주었다. 김 교장선생의 두 아들도 남편을 존경하며 잘 따른다. 큰아들은 정형외과 의사로, 수재였던 둘째는 유능한 회사원으로, 셋째는 공무원으로, 넷째는 호주 브리즈번에서 토목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다. 우연하게도 아들 넷이 모두 같은 중·고등학교 동문이라 그 또한 가정의 중요한 결집 요소가 되고 있다.

연주회 전 대기실에서

네 명의 아들이 각자 독립하고 나름대로 자기의 삶을 잘 꾸려 나가고 있어서 김 교장선생 부부는 다소 자유로운 편이다. 남편은 현직 외과 의사로 근무하면서 독창회를 8번이나 할 만큼 정열적인 아마추어 성악가로 활동하고 있고, 7~8년 전부터는 시낭송에도 열정을 쏟는다. 김 교장선생은 남편이 시낭송을 함께 하자고 제안했고, 성악도 배우기를 권해서 사실 이번 대충가곡연주회에서도 첫 연주를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아이들에게 꽃씨 심는 방법 알려주는 김 선생님

특히 아침에 시를 낭독하는 것은 한 편의 시로 감정을 적실 수 있어서 좋다고 한다. 합송시는 부부가 나이 먹어 무덤덤한 시간을 공유하며 창조해 나갈 수 있어서 무척 좋은 것 같다고 강조했다. 노래 연습할 때면, 초등학교 때 김 교장선생을 데리고 다니시면서 우리 딸이 노래를 잘한다고 합창부 활동을 부추기던 부친이 떠오른다며 남편이나 아버지나 자신을 성장하도록 돕는 사람이라고 했다.

김 교장선생은 앞으로 계획은 “봉사활동과 취미활동을 열심히 하자!”는 것이다. 10여 년간 활동했던 극동방송의 운영위원, 임원으로서 극동방송의 복음이 세계만방에 퍼져나가도록 돕고 싶다. 시낭송, 그리고 가곡 부르기의 기량을 높이는 것 또한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김 교장선생 막내아들이 호주에서 자리 잡고 살고 있어도 가보지 못해서 참으로 미안했는데, 퇴직 후에는 아들 내외와 함께 지내보고 싶다고도 했다. 학교 때문에 그동안 엄마로서 못다 한 정을 아들 내외에게 맘껏 주고 싶어서다.

김 교장선생의 인터뷰를 하는 내내 ‘행복’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행복한 생활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 교장선생이 불렀던 가곡 ‘그대가 꽃이라면’, 김 교장선생이 ‘하얀 민들레’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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