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희 작가의 추억의 뜰] 이관종 어르신 (1937년~)

수몰지구에서 건져올려진, 촌부의 옷을 입은 성자

김경희 작가 승인 2023.01.09 16:29 의견 0

안내면 관골, 생경한 지명이 새겨진 돌 이정표를 끼고 마을에 들어섰다. 굳이 내비게이션의 도움 없이도 좁은 골목 끄트머리 집이 어르신 댁이라고 바로 알 수 있었다. ‘이관종 정순애 큰 며느리 서기관 승진’이라고 현수막이 붙어 있었다. 산비탈 길에 지어진 작은 집에 걸린 현수막을 보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흐뭇하셨을 어르신들, 부모의 뒷모습을 보면서 열심히 살았을 자녀분을 생각하니 맥락 없이 뭉클해졌다.

순둥이 같은 누렁이가 어슬렁거리는 한적한 시골집, 누렁이는 낯선 사람을 봐도 짖지도 않은 것을 보니 밥값은 제대로 못 하지만 노부부의 성정을 닮은 것 같다. 사랑받고 자란 녀석이라 사람에 대한 경계가 없나 보다. 한낮의 햇살이 보약처럼 온몸에 내리쬐었다. 인기척을 듣고 문이 열리더니 강골인 어르신이 우리를 반긴다.

주름이 그려낸 미소, 왕년의 유명했던 영화배우 율 브리너를 연상시키는 어르신.

소사, 히로시마, 수몰지구, 등사기, 먹지. 어르신이 살아온 이야기 틈틈이 꺼내시는 단어들만으로도 어르신은 이미 살아 움직이는 역사 교과서셨다.

88세 아직도 짱짱하신 우리 이관종 아버님의 인생 이야기도 한 편의 드라마였다.

땅속 깊은 곳에서 파낸 우엉, 속이 꽉 찬 노란 배추를 챙겨주시던 어르신. 튼실한 수확물을 내는 농부였지만 뒷모습은 성자 같았다.

수확의 기쁨


버섯구름 폭탄이 피어오른 히로시마에서 온 미아무라깡

내 고향은 히로시마 구미정이다. 1937년생으로 히로시마에 버섯구름 폭탄이 터지던 날 나는 바닷가 마을에서 겨우 목숨을 건진 채 옥천 안내면으로 살아서 왔다. 때는 초등학교 4학년 1948년. 당시 내 이름은 미아무라깡. 순식간에 일본에서 온 촌놈이 되었다.

아버님은 그 당시 청주농고를 나오신 인텔리였고 어머니와 결혼하기 위해서 일본으로 가셨었는데 해방 후에 다시 돌아오게 되셨다.

아버님은 일본 철공장에 서무계로 들어가서 일을 하셨고 어머니는 일본사람들 하숙도 치면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히로시마 바닷가 끄트머리에 살고 있어서 원자폭탄의 희생양이 되지 않고 살아서 아버님의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천운이라고 해야 하나.

원자폭탄 터지고 일본이 항복하면서 조선 땅에 묻혀야 된다고 서둘러 나왔다. 군북면 이백리에 우리 윗대들이 살고 있었다.

일본에서 들어온 아버지는 살림을 꾸려갈 마땅한 여건이 안 돼서 처가살이를 시작하게 되셨다. 우리는 그때부터 가난과 맞서 싸우면서 생활하게 되었다. 어린 나는 시대의 풍랑을 온몸으로 겪으면서 성장통을 앓았다. 그것도 바닥부터 시작하는 부모의 인생에 덩달아 얹혀서 초근목피 생활도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왔으니 갓 열 살 무렵 고생길에 접어들었다. 가혹했다.

내 인생처럼 야무진 곶감


1인 8역은 너끈히 하던 학교 소사로 30여 년

청년시절에 대전 문화동 병기창, 현 충남대병원 맞은편에서 군속으로 원료창고에서 근무했다. 몇 년 근무하다가 부조리가 너무 심한 현장을 목도하면서 이러다 징역 가겠다 싶어 할아버지께서 권유하던 안내중학교에서 소사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당시 소사는 사회적인 입지도 약할뿐더러 학교의 모든 허드렛일을 맡아야 하는 직업이라 꺼리는 직종의 하나였다. 나는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라 학교에서 근무를 하게 됐다.

지금이야 컴퓨터가 있으니 일거리가 적지만 예전의 소사는 정말 학교의 모든 잡무를 다 하는 기능직이었다. 40년 전 안내는 지금처럼 고요한 마을이 아닌 사람들로 북적이던 활기찬 동네였다. 당연히 안내중학교도 학생이 1,500명이 넘던 시대였다. 그리고 그때는 시험도 왜 그렇게 많이 보던지 중간고사, 월말고사 시험 때마다 눈코 뜰 새가 없었다. 시험 때 등사기 롤러 밀어대느라 어깨가 빠질 것 같았다. 겨울에는 난로 떼는 일부터 은행 업무 등 모든 일이 손품 발품을 팔아야 돼서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판이었다. 입금하고 돈 빼 오려면 자전거 타고 비포장도로 털털거리면서 하루 두세 번씩 올라 댕기고 고생은 말도 못 했지만 뒤돌아서면 한 뼘씩 자라는 아이들 보면 하루도 허투루 살 수 없던 때였다.

큰며느리 서기관 승진 현수막


아침이면 4시 30분에 일어나 농사짓는 밭도 돌보고 출근을 했다. 학교에서는 최선을 다하고 쉬는 시간 틈틈이 공부해서 한문을 많이 익혔다. 국어 선생님이 한 날은 나에게 봉투를 내밀며 “아저씨, ○○좀 써 주실래요?”라고 물었다.

선생님이 실력이 모자라 나한테 물은 것이 아님을 안다. 한문에 익숙하지 않은 세대들이 있다. 소사일 보면서도 틈틈이 한문 공부하는 걸 엿보았는지 나에게 부탁해주는 것만도 고마운 일이었지. 국어 선생이 한문 써 달라고 했으니 내가 배운 건 없어도 얼마나 노력하면서 살았는지 알 수 있다. 연습한 만큼 써주고 그런 하루하루가 모여서 구순이 되어가도 당당한 나로 설 수 있는 기틀이 되었다. 배우는 건 즐거웠고 손을 쉬게 하는 것이 죄짓는 것 같던 시절이었다. 내가 악착같이 일하니 우리 집사람도 똑같이 허리띠를 졸라매면서 고단했다. 애들 공부시킬 때 열무 한 보따리씩 짚으로 묶어서 장에 내가 팔았다. 꼬기작꼬기작 전대에 채워진 돈으로 애들 차비를 만들어줬다. 그렇게 고생하면서도 도망도 안 가고 지금까지 곁을 지키는 걸 보니 신랑이 예뻤던 모양이여…….

열심히 일한 흔적들


부부가 아닌 戰友(전우)였던 나 그리고 아내

사는 게 전쟁 같던 시기, 우리 부부는 서로 전우(戰友)였다. 시할머니까지 돌보고 열 식구 불 때서 먹이고 샘에 가서 물질해오느라 골병들은 우리 마누라……. 겨울이면 동네는 온통 하얀 눈으로 덮여 길은 보이지 않고 그 길에서 샘까지 다녀오는 집사람은 나의 전우였다. 나도 지독하다는 말 듣고 살았고 우리 마누라도 지독하다는 소리 매번 들었다.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데 그렇게 살았더니 철마다 수확하고 나눠 먹고 돈 꾸러 다닐 일 없고 주고 싶은 거 있으면 품에 가득 담아서 줄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예전에 너무 어려울 땐 아이들 키우느라 이웃집에 신세도 졌는데 그것도 쉽지 않았다. 없이 사니 뭘 믿고 빌려주겠나. 피고름 짜는 날들이 모였으니 우리 부부뿐만 아니라 우리 자손들도 다들 어려운 시기를 잘 겪어냈다.

아내가 시집올 때 우리 집은 관골에서 제일 못살던 집이다. 밭 한 뙈기 없던 집인데 이제 4천 평 땅에 부러울 게 없는 노인이 되었다. 다 아내 덕분이다. 허리띠 꽉 졸라매고 열무 심어서 머리에 이고 장에 들어나가서 팔고 소사 월급 2만 원이던 시절에 한 푼 두 푼 저축해서 돈 모으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을까. 가끔씩 내가 원자폭탄 떨어진 데서도 살아왔는데 뭐가 걱정이냐고 큰소리를 친다. 그 폭탄 아래서도 살아났는데 못 할 게 무언가 사나이가 말이야!

그런 나를 믿고 따라와 준 아내, 천생연분이라는 말로도 모자란 은인이다.

우리 자손들도 부모 속을 썩이지 않아서 우리가 살림 불리는 데만 신경 쓰면서 살 수 있었다. 배불리 먹이고 좋은 옷 입히지 못했지만 지들 알아서 공부하고 자기 자리 찾아가 준 기특한 자손들이다.


인생 말미의 훈장, 내리쬐는 건 따뜻한 햇살이요 근심이 없네

남아선호사상 때 딸만 셋 나니까 우리 마누라 쫓겨 날 판인데 규화가 태어나면서 우리 집사람을 구했다. 그래도 없는 살림에 고생만 하는데도 도망 안 가고 지금까지 곁을 지켜주는 우리 집사람 정순애 여사, 고맙소!

1979년 안내중학교가 수몰되고 지금 자리로 옮기는 과정에서 벽돌 한 장 한 장 전부 내 손으로 쌓았다. 나중에 교장이 훈장을 줘야 된다고 추천해서 정말 국무총리 훈장을 받았다.

규순, 규만이, 규화, 기동, 기상이 키울 때 아침 먹으면 점심이고 뒤돌아서면 돈 들어갈 곳투성이였지만 농사도 저축도 옹골차게 했다. 이제 땅도 농토도 사놓고 쌀 방아 찧어서 40가마니를 자손들과 나눴다. 차 트렁크에 이것저것 실어 보낼 때 내 인생에도 이런 해 뜰 날이 왔구나 싶어 멀리 사라져가는 아이들 차 뒤꽁무니를 한참이나 바라본다. 무척이나 좋아서…….

고생한 아내 염색해주는 날


시골 마을에 이제 사람이 없다. 우리가 떠나면 이 동네는 적막강산이겠지.

아기 울음소리 들어본 게 언제인지. 우리 아이들 한창 클 때 동네 골목 앞에서 아이들 친구들이 모여서 가방 둘러매고 학교 가던 그때가 고생스러웠어도 지금 생각하니 추억거리다.

세월은 무심해서 하루하루는 고단하기 짝이 없었는데 88년의 세월은 어느새 이리 성큼 다가왔는지 알 수가 없다.

유난히 햇살이 잘 부서지는 우리 집. 어느 날 집사람이 끓여준 된장찌개에 막걸리 한 잔 마시고 창가로 모여드는 햇살에 졸음이 찾아오면 지그시 눈을 감고 아득히 멀리 와 버린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그 꿈속에서 그리운 어머니 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면 그 또한 최고의 훈장이다.

수확을 끝내고 가벼워진 손, 며느리들이 잔뜩 준비해놓은 술안주로 막걸리 한 잔씩 들이켜는 이 맛을 어디에 비할까. 이 또한 내가 받는 훈장이다. 열심히 살아왔더니 막걸리 한 잔만큼 인생이 짜릿하다. 캬! 오늘따라 술맛이 기가 막히다.

지난 추억이 안주가 되니 이 아니 기쁠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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