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중공업 황규관 대표이사 “대한중공업이 하면 무조건 됩니다!” 마이너 없는 메이저는 없다!

변화와 창조로 최고의 어태치먼트 생산, 최선의 서비스

정여림 작가 승인 2023.03.07 14:22 | 최종 수정 2023.03.08 13:09 의견 0

2011년 7월 서울 우면산 산사태가 발생했을 때, 대한중공업의 어태치먼트는 수습현장에서 맹활약했다. 산 정상에서 폭우로 유실된 흙과 갖가지 토사물이 도로에 쌓이고 가로막혀 아수라장이 된 수해 현장. 굴삭기에 장착된 이 회사의 다양한 집게 어태치먼트는 토사물을 파거나 추리고 제거하는 수습작업에 최적화된 실용 장비였다.

대전 유성구에 자리 잡은 건설기계 어태치먼트 제조업체인 ‘대한중공업’은 설립 20여 년이 넘은 유망 강소기업으로 굴삭기(포크레인) 연결 어태치먼트 전문 생산으로 이름 높다. 황 대표는 기계 분야의 높은 국가 자격을 두루 획득한 고급기술인으로서 직장을 다니다 마침내 기업을 설립했다. 사장실에 있기보다 부속 연구실에 머무는 시간이 더 편안하다고 밝히는 그는 제품 연구설계제작에 직접 참여하고 해외 전시장을 넘나드는 집념의 연구원이기도 하다. 아이템 개발로 연구실에서 밤을 지새운 적이 부지기수라는 그의 성공 이면에 숨은 땀과 인내의 시간을 취재했다.

대한중공업 황규관 대표이사

대한중공업 황규관 대표이사

대한중공업 연혁

1997년 대한중공업 설립 / 건설기계 어태치먼트 생산
2000년 굴삭기용 어태치먼트 개발
2004년 중소기업 우수업체 지정
2006년 각종 특허출원 6종 획득
2007년 ISO 9001 품질경영 시스템 인증 / ISO 9001 환경경영 시스템 인증
2009년 유럽인증 시스템 CE인증
2010년 부설연구소 개설
2015년 100만불 수출의 탑 수상
2017년 테크노벨리 신사옥 이전
2019년 어테치먼트 관련 특허 및 실용신안 6종 특허 획득
2020년 대전광역시 매출의 탑 수상
2021년 산악 크레인 개발
2022년 국내외 어태치먼트 생산 및 15개국 해외 수출

어태치먼트(attachment)란?

산업현장에서 지게차, 크레인, 기타 건설기계의 일부를 떼어내고, 다른 장치를 부착하여 효율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쓰이는 특수한 부속 장치 전반. 지게차의 예를 들면, 작업하는 짐의 종류나 성질에 따라 지게차의 포크 대신 각종 집게류, 즉 다양한 어태치먼트가 선택돼 사용된다.

굴삭기 업체나 개인굴삭기 사업자는 굴착기에 기본적으로 연결돼 시판되는 ‘버킷’ 외에 각종 집게나 회전 링크 등 작업에 효율을 기할 수 있는 어태치먼트(부속장치)를 대개 추가로 구비한다. 어태치먼트가 다양할수록 나무 작업, 돌 작업 등에 최적화되고 자동으로 처리돼 기사가 운전석에서 내리지 않고 연속 작업이 용이하여, 어태치먼트를 많이 보유한 사업자가 경쟁에서 유리하다는 추세다.

■ 진정한 자신감은 반복된 연습과 훈련에서… 대한중공업, 2021년 분리형 산악크레인 개발

‘내일부터, 다음부터가 아니라 오늘부터, 지금부터다. 내일은 또 다른 일이 기다리고 있으니.’
‘진정한 자신감은 반복된 연습과 훈련에서…….’

대한중공업 사옥 정문의 표지석에 새겨진 문구들이다. 황 대표는 출퇴근 시 매일, 이 글귀를 읽고 머릿속에 아로새기며 정신 무장을 하는데, 회사 임직원 모두에게도 이 문구를 접하며 기술인의 마인드를 재무장하길 주문한다.

굴착기 관련 어태치먼트 전문 생산으로 한 우물만 파온 대한중공업은 2021년 신선한 성과를 냈다. 분해조립이 가능한 ‘산악크레인’을 국내 최초로 개발해, 산지에 대형 철탑 건설 작업 시 획기적인 효율을 도모했다는 평이다. 고도가 높은 산지에서 높이 200m의 대형 철탑을 설치하려면 모든 장비를 헬리콥터로 산지까지 이송해야 하는데, 이 ‘산악크레인’은 분리가 가능해 각기 부품들을 헬기를 통해 여러 번에 걸쳐 이송하고 산악지역에서 조립해 작업하고, 다시 분리해 헬기로 이송하는 원리다. 최근 들어 원전 복원의 가능성이 커지고, 철탑 공사가 많아져 이 ‘산악크레인’의 활용에 대해 회사는 계속적인 기대를 걸고 있다.

대한중공업

대한중공업 이전개업 테이프 커팅식

■ “미래 먹거리 개발에 항상 고민, 미래형 기계를 개발하는 것이 꿈”

황 대표는 기업의 오너로서 기업이 영속할 수 있는 미래 먹거리 개발에 항상 고민하고 미래형 기계를 개발하는 것이 꿈이다.

“기업이 R&D에 계속적으로 투자하지 않으면 도태된다. 굴지의 대기업들도 마찬가지로 밀가루, 설탕 공장으로 시작해 보험, 전자, 자동차 등으로 계속적으로 뻗어나갔다. 지금 대한중공업도 철 제조업을 하지만 좋은 아이템이 있으면 언제든지 업종 전환을 준비해야 한다. 미래 먹거리를 위해서는 뭔들 못하겠나? 최근의 기계 트렌드는 아이템들 원격 조정될 수 있게 개발하는 것이다. 여러 복잡한 기술력이 따라줘야 한다. 미래의 기계는 수중, 공중, 지하를 망라해 인간이 접근하기 힘든 공간에 다가가게 하는 것이 시장의 요구다. 최근 튀르키예 지진 현장을 보면 갖가지 위험성이 커 구조대원들이 접근하기 힘들다. 이런 시스템이 탑재된 제품이 절실히 필요할 때가 많다.”

■ 사장실이 아닌 ‘연구실’에 있을 때 가장 편안한 사람, 연구원들과 설계 디자인 직접하고, 해외 전시회 누비며 선진기술 벤치마킹

“회사가 현재 생산하고 있는 품목은 100여 종으로 복잡하다. 일례로 블록 집게는 수출하는 국가마다 그 규격이나 모양이 다 다르다. 그 나라의 환경에 따라 쓰이는 용도가 틀리니 회사에서는 구매자의 의도에 맞게 맞춤식으로 제조해 준다.”

황 대표는 기술인답게 회사에서 생산하는 100여 종의 제품에 대한 지식이 해박하고 상세하다. 그가 회사에 있는 시간 대부분은 사장실이 아닌 부속 연구실이다. 연구실에서 컴퓨터로 도면을 보고 분석하고 제품 기술을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몰입해 있는 황 대표를 직원들이 보는 것은 다반사다.

“사장실에 혼자 있으면 뭐합니까? 연구실에서 큰 제작 아이템은 제가 주도하고 구상한다. 이런 실무적인 일에 부딪히며 전념하는 시간이 저는 가장 편안하고 흥미롭다. 어쩌다가 운동이라도 나가게 되면 바쁘게 일하는 직원들 보기가 미안해진다. 내게는 연구원과 같이 기술 공유하고 토론하는 과정이 가장 흥미롭고 알차다. 제품이 완성되면 그 성공쾌감은 대단하다.”

그는 자사 제품을 국내외 전시회에 계속해 출품하고 바이어들에게 마케팅하며 제품 설명회를 열기도 한다. 또한 세계적 트렌드나 신기술을 읽기 위해 국내외의 관련 회의나 전시회도 많이 다니는데, 카메라를 항상 들고 다니며 선진기술이 나 특별한 아이템을 만나면 놓치고 싶지 않아 수없이 셔터를 누른다.

“해외 전시회는 세계 유수의 기계산업 관련자들이 다 모여든다. 워낙 규모가 큰데 독일 뮌헨 바우마 전시, 미국 라스베가스 전시는 느린 걸음이 아닌데도 이틀 동안 돌아다녀도 다 못 보는 수준이다. 코로나 때문에 최근에는 많이 못 갔는데 1년에 여섯, 일곱 번은 간다.”


대한중공업


■ 고객과 소통하는 회사… 작업 비수기 고객초청, 견학행사 열고, 경품행사도 벌여

건설업계는 관행적으로 관리자 체제를 두고, 세부 공정별 토목공사, 콘크리트 작업, 아스팔트포장 등은 하청을 주는 경향이 대부분이다. 그러니 회사의 제품은 기업에 납품도 하지만 하도급받는 경우도 있는데 이를테면, 굴삭기 개인사업자 같은 직접 소비자에게 제공하는 일이 잦다.

대한중공업은 소비자를 향해서 ‘한 번 고객은 평생고객’이라는 경영이념으로 최고의 제품을 만들고 최선의 서비스를 제공한다. A/S가 접수되면 24시간 이내에 처리하는 시스템을 갖추어, 산업현장에서 자사 장비 가동이 안 되어 불평을 겪는 일이 없도록 만전을 기하고 있다

“과거 대한중공업이 업계에서 점차 명성을 높이며 인지도를 올리게 됐다. 서비스의 질도 좋다는 입소문이 나자 동종업계에서 대한중공업 로고를 사칭하는 일도 생겨났다. 애프터서비스를 열심히 해도 고객 불만은 항상 생겨날 수 있다. 진심은 통하기 마련이라 트러블이 생기면 신속하고 성심껏 대응해 다행스럽게 지금까지 큰 문제된 것은 없다. 서비스가 좋아지니 자동적으로 재구매력도 올라갔다. 어태치먼트는 4, 5년을 쓰면 바꾸는 경향이 높다. 제품 업데이트를 하게 되면 중고를 회수하고 판매를 진행하기도 한다.”

12월~1월 건설기계 비수기면 고객초청 간담회 및 공장투어를 실시한다. 지방 건설기계 업체는 관광버스를 제공하는데 업체 가족들은 소풍 나오는 기분으로 회사를 견학하는데, 식사를 제공하고 기념품은 물론 온천 사우나권까지 제공한다. 또한 고객 경품행사를 연 1회 여는데 상품이 소형 승용차, 냉장고, TV 등으로 푸짐해 고객에게 기쁨을 선사한다.

■ 황규관 대표, 그의 성공 이면에 어린 땀과 인내의 시간을 둘러보다

1. 10여 년 기술직 직장 생활 접고, 개인 사업자로 나서는 모험을 감행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에서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모님은 농사를 지었는데 가난을 벗어나긴 힘들었고, 어린 시절 그는 물건을 빼곡이 진열해 파는 슈퍼마켓 주인과 풍성한 과일을 수확하는 과수원 농장주를 부러워하기도 했다. 당시 그가 가장 많이 듣던 말 중에 하나가 ‘기술을 배워 놓으면 먹고 사는 데는 문제없다.’는 말이어서 그는 장래 희망에 항상 기술자를 적어 넣었다. 집안 친척이나 선배 중에도 엔지니어가 많았고, 기술자의 꿈을 가졌던 그는 대전에서 전문대를 다니며 기계공학을 접했다. 야간에는 직업훈련원(폴리텍대학)에서 기계와 설계를 전공하며 밤낮으로 기술인이 되기 위해 몸부림쳤고 결실도 따랐다. 국가기계가공자격증 분야의 기능사보, 선반기능사 2급, 정밀 가공기계기능사 2급을 획득했으며, 국내 최초로 시행된 기계가공 1급 가공사 선발시험에 합격하는 영예도 안았다. 이 시험은 그 당시 전국단위 선발에 단 4명만 이 합격하는 어려운 국가고시였다.

이후 대기업에 입사 시험을 쳤는데, 어이없게도 불합격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가 획득한 화려한 자격증 이력으로 쉽게 퇴사할 것으로 예측한 회사가 미리 떨어뜨렸다는 후문을 접했다. 사실 그도 창업의 꿈을 가지던 때라 대기업보다는 현장경험을 두루 할 수 있고, 기술의 전반적인 조합을 배울 수 있는 작은 기업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에, 미련 없이 중소기업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그의 기술력과 성실성은 직장에서도 거듭 인정받았고 그의 꿈은 더욱 선명해졌다. 중소기업에서 제조업의 전반적인 업무를 체득한 지 10여 년이 넘자, 그는 과감히 사표를 내고 1997년 개인사업자로 홀로 섰다. 시작은 대전 동구의 네 평짜리 작은 공업사였다.

대한중공업 사훈

2. 전세금 빼 장비 마련… 명실상부한 제조업으로 성장시켜, 15개국에 어태치먼트 수출

“가진 것 없이 타향살이를 시작했고, 급여로 생활하기 빠듯하던 시절이라 저축된 돈도 없었다. 살던 집의 전세금을 빼 장비를 처음 마련했고, 돈이 좀 모아지면 또 다른 장비를 하나씩 하나씩 구입했다. 일자리 구하기 쉽지 않았을 때라, 자칫 실패하면 길바닥에 나앉아야 해 배수진(背水陣)을 친 격이라 절실한 마음으로 일했다. 워낙 내 사업을 해보고 싶다는 일념이 강했고, 열정이 컸기에 가능했다.”

개인사업자가 되어 사업장에 의뢰가 들어오는 주문은 험한 일, 궂은일을 가리지 않고 모두 받았다. 기계 가공, 산업 기계 제조, 건설중장비 수리 등 작업도 다양했는데, 맡은 일은 피나는 노력을 거듭하여 고객에게 최선의 만족을 주려 했다. 점점 매출이 올라가고 자신감이 붙자 단순 임가공업으로 소박하게 시작한 사업을 명실상부한 제조업으로 키워가겠다는 포부도 점점 자리 잡아 갔다.

이후 사업은 점점 성장했고, 2004년에는 중소기업 우수업체로 지정됐다. 각종 특허를 출원하고 ISO 9001품질경영 시스템 인증, 유럽인증 시스템 CE 인증도 받았다. 2010년 부설 연구소 개설과 이어 2017년 대전 테크노밸리의 넓은 신사옥으로 이전했고, 이후로도 성장은 멈추지 않아 현재 대한중공업의 영어 이니셜 ‘DH’ 상표를 단 어태치먼트가 해외 15개국으로 수출되는 성과를 거두고 있다.

3. 임가공업에 부품대리점까지 병행… 대리점 큰 성과 냈지만 반납, 제조업 가능성에주력, 해외 선진 기술 도입·연마의 세월

임가공업을 하던 중 그 가능성을 잘 봐온 관련자의 도움으로 경기도의 모 중공업의 특장차 판매 대리점을 겸하게 됐다. 믿고 맡겨준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발바닥이 닳을 정도로 뛰어다닌 결과 회사 매출의 10%를 그의 대리점에서 만들어 내는 성과를 냈다. 대리점과 병행하며 자신의 임가공 사업도 놓지 않았기에 그는 시간을 쪼개가며 일했고 일한 만큼의 대가는 정직하게 돌아왔다.

나중에는 임가공 자체 아이템 사업 매출이 크게 성장했고 그 사업에 전력하고자 대리점의 고정적이고 큰 수수료 수입을 과감히 포기해 선택과 집중을 취했다. 그는 임가공 사업에 멈추지 않고, 산업 기계를 직접 설계제작해서 제품화시키기 시작했다. 선진기술을 도입하고 연마하기 위해 미국독일프랑스 등 해외시장으로 분주히 발품을 팔았다. 해외 산업기계 전시회를 다니며 벤치마킹하고 자사 제품 홍보를 위해 바이어를 만나 설득했다. 각고의 노력 끝에 성장세를 타니 대리점 반납으로 줄어든 매출액을 자체 사업으로 메꿀 수 있었다.

“사업의 기로에 서 있을 때마다 감행했던 그 결단이 주효했다. 기술에 대한 자신감이 기본적으로 있었고 뭐든 노력하면 된다는 가능성이 있는 시기였다. 지나온 과정 면면을 돌아봐도 내 결정에 후회는 없다. 내가 해보고 싶었고 꿈꾸었던 내 길을 한길로 선택했고 묵묵히 그 길을 걸어 왔다.”

대한중공업 황규관 대표이사

4. IMF로 인원 감축, 뼈아픈 결단을 감행해야 했던 시절, 아이템 개발위해 밤을 지새운 적은 부지기수

창업 후 꾸준히 성장하면서도 IMF라는 큰 파도를 만나 뼈아픈 결단을 해야 했다. 눈물을 삼키며 직원 감축을 감행해 가족 같은 사람들을 내보낼 때는 너무나 가슴 아팠다. 동종업계나 후발업계의 견제나 추격도 녹록치 않았는데, 곤혹스러운 노이즈마케팅으로 마음고생하며 보낸 세월도 많다. 회사가 눈에 띄게 성장세를 보이며 주목받자 업계에서 악성 루머를 퍼뜨리는 일이 생겨났다. 함께 기업하는 입장에서 그런 공격을 받으면 너무나 안타깝고 평상심으로 견디기 힘들었지만 두 주먹 불끈 쥐며 업무에 더욱 매진했다.

“모든 기업가가 마찬가지겠지만 20여 년 사업을 일구어오면서 굽이굽이 거친 난관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글로벌 금융위기 등 어려운 시절도 많았다. 하지만 끊임없는 연구개발로 아이템을 개발해 그 어려움을 타파해보고자 밤을 지새운 적이 부지기수다. 연구실에서 노력 끝에 만든 제품을 막상 현장에서 가동해 보고자 하면 조립이 잘 안 되거나, 작동이 계획대로 되지 않을 때가 허다하다. 그런 날이면 시제품 앞서 혼자 밤을 지새웠다.”

유망중소기업 표창 수상


■ 제조업계에서 20여 년, 전하고 싶은 말은?

“제조업, 기술 배우는 젊은이 없어 앞으로 심각하다”

제조업계가 3D업종이라는 낙인으로 인력난이 심한데, 대한중공업도 예외는 아니다. 현장 기술을 배우는 젊은이가 갈수록 줄어들어 향후 회사 운영에 또 다른 고민으로 다가온다는 황 대표다.

“직원을 모집하면 예전에 비해 지원자가 현저히 줄어 저희들도 사실 난감하다. 나중에는 현장 기술자를 외국인으로 모두 채워야 되는 것이 아닌가 걱정이다. 현재 현장직원 평균연령이 40대다. 20대는 두세 명, 30대도 소수다. 향후 인력을 어떻게 관리할까 고민인데, 용접 경력자들을 대체할 수 있는 로봇을 도입해 볼까 해 주문을 생각하고 있다. 현장 업무가 단순 작업보다는 세밀한 고급 기술력이 필요한 일이다. 일반 근로자에 비해 임금도 많고 작업 환경도 과거에 비해 많이 달라졌다. 훌륭한 인재가 회사에 많이 지원해서 서로 상생하면 좋겠다.”

황규관 대표이사와 아들 황대민 이사

제조업의 뒤를 잇는 세대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은?
“젊은 세대들, 실패하든 성공하든 일단 시작하면 끝까지 하고, 포기하지 마라!”

저희 직원들한테도 얘기했지만, 요즘 사람들 포기를 너무 빨리 한다. 조금만 더 파면 터널이 완성되는데, 터널을 파다가 말아. 요만큼만 파면 뻥 뚫리는데 99% 노력해놓고, 1% 남겨놓고 포기하는 게 너무 아쉬워. 노력하다 보면 반드시 그 길이 나온다. 설사 프로젝트를 실패해도 얻는 것이 굉장히 많으니 실패의 경험은 많을수록 좋다. 창업이란 건, 젊은 시절에 도전하기 좋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매너리즘에 빠져 도전정신이 희석된다. 젊은 시기의 열정은 두려움이 적다.

지금까지 쌓인 경험치가 있고, 회사를 나름 성장시켜 왔으니 자신감도 붙어 비전도 보이는 시기다. 지금까지 살면서 느끼는 건, 혼자 능력이 안 되면, 주변과 협업하면 뭐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다. 목표가 생기면 일단 부딪쳤다. ‘대한중공업은 무조건 됩니다.’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자주 해왔고 말하는 대로 매사 이루어진다고 본다.

호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아버지 곁에서 경영수업을 쌓고 있는 30대 그의 아들 황대민 이사는 집에서보다 일터에서 아버지와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다며, 같이 일하며 느끼는 배움이 많다고 했다.

“대표님은 그 누구보다 열심히 하시고 매사에 끈기 있게 접근하신다. 보통 우리 세대들은 어떤 일을 시작하고는 벽을 만나면 흐지부지 쉽게 중단하는 부분이 없지 않다. 대표님은 프로젝트를 시작하면 실패하든 성공하든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신다. 말은 쉬운데 쉽지 않은 일이다.”

중공업계 일이 딱딱한 금속 기계를 만지는 험하고 기름진 일이라, 이쪽 업계에 사람이라면 좀 무뚝뚝하거나 말씨가 무거울 것이라는 선입견이 있을 수 있다. 황 대표는 그런 짐작과는 거리가 멀었는데, 업무적인 면에서는 철저하고 엄격한 자세를 견지하면서도 직원들에게 가족같이 살갑게 대하는 인정스러운 말씨를 지녔다. 직원들은 우리 대표님은 다정다감하다는 평을 내놨다. 인터뷰를 마치자 ‘회사 아침 조회에 간식으로 준비했는데…….’라며 묵직한 떡 한 상자를 내밀었다. 상자에는 하얀 콩 백설기가 채 식지 않은 온기로 가득 차 있었는데, 돌아오는 길 뜨뜻한 백설기를 매만지며 그의 기술인으로서의 열정이 묻어나는 한 마디를 상기해 봤다.

황규관 대표 직접 설계·디자인을 하는 모습

“밤낮으로 노력한 결과 제품이 탄생하고, 저희 제품이 국가산업 발전 현장에서 이바지하는 모습을 볼 때 가슴 뭉클하다. 대한중공업 DH로 고를 단 제품이 세계시장에서 애용되고 있는 광경을 맞닥뜨릴 때면, 그동안 제품개발로 힘들었던 땀과 인내의 순간들이 눈 녹듯이 녹고, 가슴 뿌듯한 감동만이 남는다.”

정직한 땀과 노력으로, 연마되고 거듭난 제품력으로, 해외시장에서 인정받는 기술력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디뎌 오늘에 이른 대한중공업. 황 대표이사는 대한중공업의 ‘제1호 수석 연구원’이라는 호칭으로 불러도 참 어울리는 ‘현장형 리더’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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