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희 작가의 추억의 뜰] 김영심 1936년

만선처럼 채집했지만 한여름의 午睡(오수) 같던 날들

김경희 작가 승인 2023.05.09 16:42 의견 0

구순이 가까운 어머님은 기품 있고 아름다우셨다.

“나 할 얘기도 없는데…….”

유년의 기억부터 조곤조곤 되짚어 주시는 어머니는 철학자셨다. 기억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고 추억 하나하나에 그리움을 담아내셨다. 인정 많던 친정 오라버니의 죽음을 말씀하실 때 끝내 울음을 터뜨리셨다. 가련한 사람들이 너무 많던 세대라 간간이 떠올리기 싫은 기억들 때문에 지난 시절 이야기를 꺼내기가 두렵다고 하셨지만 이제 그리움이 되어 삶을 지탱하는 버팀목이 되고 있다고 자조하셨다. 우리 삶의 무게는 평생을 통틀어 본다면 비등비등하지 않을까 단언하시며 그래도 인생은 살만하다고 후배들을 격려하시는 어머니.

그리 억울해하지도 말며 너무 크게 기뻐하지도 말라고 하셨다. 어머니께 또 한 수를 배웠다.

오늘 기쁨이 나를 찾아왔다고 내일도 그러하다는 법이 없으며 오늘 슬픔이 나를 옥죈다 한들 내일도 내 목을 조르라는 법이 없으니 일희일비하지 말며 나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자가 진정한 인생의 승리자라고 일침을 놓아주셨다.

50년 전 친구들과

■ 가족의 죽음은 비극이 아닌 견뎌내기 힘든 마음의 폐허

부잣집은 아니었지만 두 끼는 너끈히 먹고 입성은 초라하지 않았다.

나는 7남매 막내딸로 태어났지만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우리는 4남매로 성장했다. 산에 냉이 뜯으러 갔다가 산불에 치마가 홀랑 타버린 언니는 치마를 벗어 던지지 못하고 그 불이 붙은 치맛자락을 붙들고 집으로 달려오다가 화상을 입고 어린 나이에 부모님 가슴에 대못을 박고 떠났다. 나는 그날의 언니를 기억한다. 희미하게……. 선명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가슴을 쓸어내린다. 언니의 모습이 내 기억 속에 또렷이 남았다면 나는 아마 평생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 겨우겨우 살아내야 했을 것이다. 언니는 그날 치마만 벗어 던졌어도 목숨을 구했을 텐데 그 무명치마가 뭐라고 어머니한테 혼날까 봐 그 치맛자락을 붙잡고 울면서 집으로 달려와 온몸에 불이 붙어 명을 달리했다. 나의 가장 오래된 어린 기억의 끝에서 본 비극적인 장면이다. 다섯 살쯤 되었나 보다…….

공부를 제법 잘했던 나는 사범학교를 나와서 청주에서 초등학교 선생님을 하면서 고등학교 교사인 남편을 만났다. 남편은 만학도가 되어 박사를 마치고 대학에 교수가 되었다. 일본으로 유학을 가서 남들 6년 만에 하는 박사과정을 2년 반 만에 마치고 귀국했다. 남편 말로 세 시간씩 자고 페이퍼를 많이 써서 학위를 일찍 받았다고 한다. 남편은 장학생으로 대학을 다녔다. 내가 일본을 가볼 수가 있나 남편이 여비가 풍족해 나올 수가 있나, 우리는 청주에 집을 얻어서 나는 교사생활을 하면서 우리 5남매를 키웠다. 교사월급으로 5남매를 키울 수 없어서 학교를 그만두고 오빠 사업을 도왔다. 여장부 기질이 있어서 교직에 대한 미련 없이 사업가로 변신했다. 한창 석재 산업이 호황을 누릴 때 나도 산업현장에서 드물게 볼 수 있는 여성 사업가였다.

마음속의 어머니

■ 풍파 없는 인생이 있던가. 때로는 휩쓸리고 때로는 넘어서며 걸어가는 길

교사 시절 우리 별난 아들 막내 홍식이는 열 살쯤 인가. 저녁 무렵이면 같은 시간에 돌아와야 하는 엄마가 안 온다고 가로등 불빛 하나 없는 마을 길을 쏜살같이 달려오다 논두렁 배수로로 떨어져 죽다 살아났다. 그날은 학교에서 회식이 있어 조금 늦었는데 그 새를 못 참고 나와서 그 칠흑 같은 밤에 3m 아래로 떨어져 죽을 위기를 겨우 모면했다. 엄마 젖에 손을 얹지 않으면 4학년 때까지 잠을 안 자던 막내 녀석이다. 마을 어귀에서 집으로 들어가는 길, 아무리 깜깜해도 내 새끼는 알아보는 게 엄마다. 어린아이가 기절한 채 쓰러져 있는데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세상에나 우리 홍식이가 아닌가. 얼른 들쳐업고 집으로 달렸다.

한동네 살던 오빠가 그 밤에 병원에 갈 수도 없어서 군에서 위생병으로 복무했던 돌팔이 경험으로 우리 아들을 수술했다. 수술이란 말이 가당키나 하나. 그저 터진 살을 꿰매서 철철 흐르는 피를 잠시 멈추어 놓은 것이다. 아들은 정신을 잃고 기절한 상태라 천만다행이었다. 불에 칼을 소독하고 꿰매서 피는 간신히 멈췄다. 한참 지나서 병원에 데리고 갔다. 첫 손길이 엉망이었던 터라 다시 병원에서 손을 써도 이마의 흉터는 어쩔 수가 없었다. 우리네는 각자 자기 삶의 훈장이 있다. 우리 홍식이는 예순이 넘었는데 아직도 이마를 슬쩍 가리고 다니는데 그때 외삼촌이 돌팔이 의사 흉내 내면서 꿰맨 자국이 흉터로 남았다. 엄마 사랑이 유별났던 홍식이의 훈장이다. 볼 때마다 50년 전의 우리 막내가 떠올라 작년에 할아버지가 됐지만 지금도 막내아들 같다. 환갑이 넘은 아들이지만 팔십 중반의 나에게는 여전히 살가운 막내아들이다.

홍식이를 살려준 오빠는 산에 벌초하러 갔다가 피곤한 길에 잠시 산소 옆에서 누웠는데 그날 밤 집에 와서 오한에 시달리고 식은땀을 흘리면서 사경을 헤맸다. 겨우 진정시켜서 다음 날 병원에 갔지만 오빠는 의식을 잃고 말았다. 들쥐가 옮긴 유행성 출혈로 오빠는 먼저 이승을 떠났다.

오빠 상여가 나가던 날은 마음의 지옥을 고스란히 맛본 날이었다. 요령잡이의 구슬픈 소리, 어머니의 통곡 소리, 아버지의 울음은 소리조차 삼켜버려 신음 소리만 가슴을 후벼 팠다. 아버지의 울부짖음을 보면서 나 또한 절규했다. 아버지는 상여 나가던 날, 아들을 보낸 슬픔을 이길 수 없는 나머지 통곡하시며 주먹으로 흙 담벼락을 치면서 애간장 끊어지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하셨지만 도리가 없었다. 담벼락 한 귀퉁이가 무너져 내리고 아버지의 피투성이가 된 주먹을 보면서 그 슬픔이 조금은 와 닿았지만 아버지의 깊은 속내까지 헤아릴 수 없었다. 아버지는 오빠 돌아가시고 시름시름 앓다가 1년 후에 선산의 아들 옆에 나란히 자리했다. 죽은 자식에 대한 그 애통한 마음을 달래지 못하시고 생을 마감하셨다. 우리 가족 모두 통곡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애처로운 죽음이 너무 많던 시절이다.

홍식이는 인정 많은 아이라 자신을 살려준 삼촌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는지 발을 동동 구르며 울부짖었다. 가족의 죽음은 슬픔이라는 형언할 수 없는 비극이다. 이 모든 일들이 남편이 일본에서 유학 중에 벌어진 일이라 나 혼자 감당해야 하는 몫이 너무 컸다. 편지로 슬픈 사연들을 보내면서 눈물로 편지지를 흠뻑 적시고 또 적셨다.

■ 무탈한 일상은 당연한 것이 아닌 크나큰 감사

남편이 돌아와 대학교 교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우리는 풍족하지 않지만 아이들 육성회비는 밀리지 않고 공부시키면서 평범한 일상을 살아왔다. 겉보기에는 교수 집이라고 그럴 듯해 보여도 사람 사는 이치가 다들 속앓이 하나씩 하면서 사는 거라 나도 풍족하지 않은 삶에 불만은 없었다. 아껴 쓰고 다툼 거리 적은 것으로 감사하면서 살아왔던 인생이다.

나는 오빠의 사업을 돕고 있어서 오빠 사후에 일선에서 물러나 큰아들한테 사업을 맡겼다. 오빠가 하던 사업은 석재사업이라 내가 맡아서 하기엔 약간 거친 일이었지만 난 오빠 사업을 잘 꾸려나갔다. 지금 우리 장남 준식이가 석재 일을 잘 해내고 있다. 지금은 하향사업이지만 오랫동안 해온 일이라 조경까지 더불어 내실 있는 사업가로 잘 해내고 있다. 남편은 청년 시절 일본 유학까지 다녀와서 교수로 정년퇴직했지만 이제 거동도 제대로 못 하는 할아버지가 되었다. 지팡이 없이는 혼자 걷지도 못하는 힘없는 노인의 모습을 보노라면 세월이 무심하고 무상하니 참으로 야속하다.

나도 거울을 들여다보면 얼굴은 골 깊은 주름으로 가득 찼고 손은 수분이 말라 핸드크림을 발라도 쩍쩍 갈라진다. 오빠 석재 일을 맡아서 한다고 나도 여장부처럼 일하느라 손등 거칠어지는 걸 보지도 못했다. 나이 드는 것을 마땅히 받아들이지만 청춘은 참으로 짧다. 곱던 그 시절의 나로 돌아갈수 없어 나는 옛날 흑백 사진을 곧잘 들여다 본다.

이제 할아버지가 된 두 아들

우리 아이들과 찍은 사진 나의 사진, 오래된 흑백 사진이지만 내 마음에 큰 위안이 된다. 고무신 신고 소풍 길에 오른 우리 아이들과 찍은 60년 전의 그 사진이 그리움이 되고 추억으로 남았다. 삶은 달걀, 칠성사이다, 엉성한 김밥. 모든 것이 어설프고 부족했지만 지금의 황홀한 문명보다 그때의 흑백 필름이 더 사람다웠다. 아날로그라는 유식한 말을 쓰지 않아도 그때가 그립고 오히려 삶의 진중함도 더 깊었다. 지금은 넓지만 얕은 세상에 살고 있다. 무엇이 옳다 그르다 논할 수 없지만 그 옛날의 향수에 젖어들면 더 행복해지는 이유만으로도 추억은 그리움이 된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쌍겹벚꽃

다 갖춰졌을 때의 풍족함은 앙꼬 없는 찐빵처럼 왠지 허전하다. 모자란 듯 어설픈 듯, 하지만 깊이가 있던 그 시절이 간간이 그립다. 대문 밖만 나가면 꽃이 절정이지만 내년도 내가 이 꽃 아래서 함박웃음을 지을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저 소망이라면 거동이 불편한 남편, 그리고 기억이 희미해지는 내가 우리 아이들 마음에 상처 주지 않고 말년을 보내다 손잡고 아이들과 웃으면서 굿바이를 할 수 있다면 여한이 없다. 한 가지 소원을 말하라 한다면 겹벚꽃이 절정인 날 그 꽃을 눈에 가슴에 가득 담고 아이들과 작별하면서 한마디 하고 떠나고 싶다.

“너희들 덕분에 소풍은 즐거웠어.”라고…….

햇살이 잘 드는 나무 그늘에 수목장을 해주라 미리 언질을 넣어두었다. 한여름 날 잠시 午睡(오수)를 즐긴 듯 인생이 이리도 성큼 지나올 줄 짐작이나 했을까. 먼 길, 돌아돌아 왔다고 생각했는데 와서 보니 한걸음에 온 듯하다. 가슴 아픈 일들, 내 속이 새까맣게 타던 일들이야 있었지만 남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고 살아온 날들이라 마음이 한결 가볍다. 비록 큰 발자취를 남긴 삶은 아니었지만 내 삶의 단상에 그리움을 채집해 올릴 수 있으니 자존심을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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