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령 3대째 가업 이어오는 정통 남포벼루의 장인 ‘김진한’

보령이 낳은 무형문화재 (6호) 김진한의 삶과 그 발자취를 찾아가 보았다.

이기인 기자 승인 2019.12.10 15:28 | 최종 수정 2019.12.10 16:38 의견 0

| 무형문화재 김진한은 누구인가?

벼루 만들기로 無形文化財(6호)가 된 김진한은 할아버지 때부터 3대째 가업을 이어오는 정통 남포벼루의 장인이다.

아버지 김갑용은 1940년 제도 이전의 인간문화재로 인정받던 남포 벼루의 대가로 그의 뛰어난 기술과 줄기찬 노력이 남포벼루의 재인식과 생산에 활기를 불어 넣었음은 물론 보령출신의 많은 벼루장인과 향토사가도 함께 인정하는 바다.

김진한은 어려서 성주산을 올라다니며 백운사에서 좋은 벼룻돌을 선별하여 캐어 아버지에게 가져다 드리며 어떤 돌이 벼룻돌로 가장 뛰어난 것인가를 정확하게 가늠하는 안목을 갖추었다.

아버지로부터 전수받은 전통적인 조각솜씨를 터득한데다가 벼루로서 가장 좋은 석질을 한눈에 알아보는 감식안을 갖추었으므로 그가 만드는 남포벼루는 창의적이며 다양하고 섬세한 조각 기술이 어우러져 오늘날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기술로 아름답고 먹이 잘 갈리는 한국 벼루의 대표 자리에 우뚝 서있다.

▲백운상석의 문헌을 살펴보면

벼루라면 한국 사람은 우선 시꺼먼 벼루를 떠올릴 만큼 흔한 것이 보령 남포석 벼루이다.

요즘 백운상석은 천연석 그대로를 살려서 만든다.

“林園十六志”를 쓴 徐有?도 그의 저서에서 저자거리나 시골 서당에서도 남포돌이 아닌 벼루가 없어서 사람들이 귀히 여기지 않으나 그중에서 좋은 벼루는 중국의 단계나 흡주석에 뒤지지 않는다 했고, 이규경 ‘남포보령의 화초석’은 우리나라 제일이라 칭송했으며 丁茶山 도 ‘남포의 수침석’을 첫째로 꼽았다. 따라서 제일 흔한 것도 남포벼루요, 제일 귀한 것도 남포벼루라는 데는 딴 말이 있을 수 없다.

영조에서 현종 대에 걸쳐 살았던 실학자 성해웅도 “금성이 흩어져 있는 남포석 벼루는 그 덕이 구슬과 같고 한번 숨을 내쉬면 이슬이 맺힌다”고 했다.

지금 보물 547호로 지정되어 있는 추사 김정희의 벼루 세 개중 두 개가 남포벼루임을 보아도 남포석의 석질의 얼마나 뛰어난 것인가를 미루어 알 수 있다.

▲남포벼루의 어제와 오늘

조선조 이후 벼루 공급의 70% 정도로 차지해 온 남포석은 서당의 서당벼루에서 부터 조선조의 문화를 주도한 사대부의 문방 필수품으로서의 벼루를 공급해 왔으므로 조선의 문화는 남포석 벼루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보령 남포의 벼룻돌을 캐내는 주산(主山)은 성주산(聖主山)이다.

보령의 미산면과 청라면의 경계에 솟아 있는 성주산은 높이가 680미터로 주위에 성태산, 문봉산, 옥마산, 봉화산, 진미산 따위의 자잘한 산들을 거느리고 있는데 이곳은 벼룻돌로 알맞은 수성암(水成岩)지대이다.

서유구는 ‘임원십육지’중 동국연품(東國硯品)대목에서 “남포석중 은사문(銀絲紋)이 다음이요, 화초문(化草紋)이 다음인데 단단하고 매끄럽되 먹을 거부하지 않고 체묵(滯墨)이 되지 않으면 좋은 돌이다. (중략) 남포현 성주산 아래 석갱(石坑)이 있는데 그 중에 화초석은 금빛으로 화초 모양을 이루었으며 돌이 온윤하고 발묵이 좋아 단계나 흡주석에 뒤지지 아니하고 또한 알동 자석과 구욕안(구욕새 눈알처럼 생긴 돌눈)이 박힌 것이 있어 매우 귀하고 얻기 어렵다”고 했다.

실학자 성해응도 그의 저서인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에서 “내가 어릴 적부터 벼루 모으기를 좋아해서 좋은 것을 많이 모았으나 우리나라 것으로는 남포돌중에서 최상의 백운상석을 따를 것이 없고 특히 화초석이 좋다.” 라고 적고 있다.

남포벼루 제작용 상석

남포석들의 석질을 상, 중, 하 세 가지로 나눈다면 상은 백운상석, 중석, 하석은 잡갱의 돌과 조선시대부터 좋은 벼룻돌을 캐낸 두멍골돌과 최상급인 금사문, 은사문, 화초석 돌이다.

금사문과 은사문은 금성문과 은성문으로 불리기도 한다.

남포석 옛 벼루에 새겨진 조각은 벼루의 수가 워낙 방대하므로 조각의 다양성도 거의 모든 유형을 망라하다시피 하고 있다. 그만큼 남포벼루에 새겨진 조각의 문양은 한 지방의 특색이거나 단순한 공예의 파원을 넘어서 한국미술의 원형질 내지는 생활정서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조각수법은 극히 일부의 사실성 조각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조선후기로 내려오면서 도식화되는 경향을 보이기는 하나 소박하고 간결한 민화적 조각수법은 우리나라 벼루가 보편적으로 갖는 아름다움을 유감없이 드러내 보인다.

▲무형문화재 김진한의 家業

청라면 의평리 549에 자리잡은 한진공예는 각종 현대식 기계장비를 갖추고 전통적인 남포벼루의 양식에 현대적인 의장을 가미한 아름답고 실용적인 남포벼루를 대량생산할 수 있는 체제를 완비하고 가동 중이다.

현재 ‘전통 한국연개발원’을 설립하여 고연, 재현과 현대 벼루개발을 위한 터전을 마련하고 부설기구로 벼루 무형문화재 전수 교육관, 벼루 체험학습장이 있다.

최근에 ‘한진공예’가 자사소유인 성주산의 연석광구에서 새로 찾아낸 백운상석은 원석 자체에 흰 구름 문양이 박혀있다. 벼룻돌은 부드러우면서도 단단하고 돌결이 윤기와 온기를 고루 갖춰 먹을 갈면 먹이 벼루바닥에 찰싹 들어붙는 느낌의 최상(最上)의 돌이다.

보령시에서 지원을 받아 금년 10월 18일부터 일주일간 서울 종로 백앞 전시실에서 전시행사를 진행한다.

▲ 한진공예에서 하는 일

실용연의 대량생산과 함께 “가보벼루”와 “특수벼루”도 제작하고 있다.

가보벼루는 기계제작을 하지 않고 무형문화재 6호인 김진한씨가 직접 세밀하고 치밀한 손조각으로 제작하여 대물림할 만한 아름답고 내구성 있는 가보벼루를 만들고 있다.

▲ 무형문화재 김진한 명장에게 듣는다

백운 상석(흰구름이 들어 있는 강한 돌), 중석, 하석 중에서 좋은 벼루를 고르는 방법으로 두드려보는 방법이 있다. 백운상석은 두드려보면 쇳소리가 나고 중석, 하석은 둔탁한 소리가 난다. 따라서 강도가 센 벼루가 높은 가치가 있는 상품이다. 석질이 약한 중석, 하석을 사용해 무분별하게 대량생산되어 판매되고 있어 남포오석의 명성에 이미지 훼손과 위상이 흔들리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므로 남포오석 구별법을 숙지하여 구매하시기 바란다.

 

편집 후기

▲ 서예애호가의 바람 1

손글씨를 보면 사람의 품성을 알 수 있고 써진 모양이 정겨워 펜글씨에서 붓글씨에 이르는 모든 글씨를 좋아한다.

붓글씨를 초등학교에서 배웠으니 무려 50년이 되었다. 김진한 명장을 안 지는 32년 되었는데, 벼루 만드는 작업을 하는 그를 보는 마음은 안타깝기만 하다. 그 안타까움 중에는 이미 국가 중요문화재로 활동하며 후진들을 지방문화재와 명장으로 양성해야 할 장인이 오랫동안 머물러 있는 현실이 아쉽기만 하다. 벼룻돌을 60여 평생 만지며 차가운 돌에 생명을 불어 넣어 귀한 중심에 자리하게 하는 그 작업은 마치 임금님이 입을 어의를 바느질하듯 정교한 절차탁마의 여실한 과정이다.

우선 지방에서 명장의 장인정신과 그의 진실한 품격을 널리 이해하고 보령의 명인으로 보호하여 대외에 문화적 경쟁의 가치로 자리해야 한다. 이제는 벼루를 전문으로 하는 장인이 10명 내외로 줄어들었다. 벼루를 만들어 생업을 한다는 것은 어려워졌다. 이수자, 전수자, 조교 모두 한마음으로 벼루 집단단지로 전국에서 부러워하는 벼루마을로 그 장인정신을 전국에 드날려야 한다.

▲ 서예애호가의 바람 2.

우리나라 국민 중 40대 이상은 대부분 초등학교에서 혹은 한문을 가르치는 서당에서 묵과 벼루를 사용하여 붓글씨를 써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때 조그만 벼루에 물을 붓고 먹을 갈면 얼마 가지 않아 금세 먹물이 마르곤 하였다. 그 이유를 이제야 깨달았다. 그때 쓰던 그 벼루가 색깔만 검은 돌 즉 하석으로 만든 벼루라는 것을…….

이제 우리나라에 생존해 계시는 무형문화재 장인의 숨결이 가득한 백운상석 하나쯤 가보로 간직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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