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연자의 추억의 뜰] ‘절망의 고비마다 주님의 은총이’ - 송화자 어르신

이연자 작가 승인 2020.07.10 13:12 의견 0

청산의 신비한 아이리스 송화자

지도는 영토를 뜻하는 게 아니다. 각자 자신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곳이다. 세상살이에서 단순하고 쉬운 것은 하나도 없다. 인간관계도 그렇고, 드러나는 결과를 단 하나의 이유로 단순하게 설명하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결과의 원인이 전부 나의 잘못이라거나 다 남의 탓이라고 단 한 줄로 정의할 수 없는 게 인생살이라면, 나의 인생 마침표는 사랑과 감사이다.

 

송화자 어르신


욕망을 놓은 그대여 행복하여라

나는 1966년 청산국민학교 양호교사 근무를 계기로 종로보건소와 성동보건소에서 근무한 후에 1974년에 창덕여고 교련교사를 시작으로 1999년 8월 31일까지, 24년 11개월 동안 교직에 몸담으며 사랑을 실천하였다. 나의 세 아들과 성장통을 겪고 함께 시간을 보낸 것은 말할 수 없는 축복이었다. 하느님이 허락하신 기회라고 믿었기에 60세에 미련 없이 명퇴를 신청했고 오직 감사함 하나만 남긴 채 조용히 끝맺음했다. 인생은 60부터라고 하지 않았는가. 남편 고향인 청산으로 내려가 내 인생의 새로운 페이지를 열어야겠다. 갑자기 찾아온 정적과 많은 시간들이 내 몸과 화합하지 못해 나는 먹고 잠자기만을 반복하며 지냈다.

이 세상 부귀영화가 지나고 보면 한 줌 흙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버지는 나를 낳으신 본부인과 19세 나이에 사별하고 두 번째 부인과 이복동생들을 고향에 버려둔 채 첩엄마와 세 번째 살림을 차렸다. 아버지는 세 번의 낙선 끝에 1961년 7월, 네 번 만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5대 국회의원에 당선됐지만 9개월 만에 5·16 군사정변으로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국회가 해산되고 말았다. 내게 아버지는 공포와 분노와 원망, 때로는 측은함 등 복잡한 감정을 주는 존재였다. 우리는 가족이지만 서로를 어떻게 사랑하는지 몰랐다.

 

 

오 참으로 놀라워라. 누가 나를 이끌었을까?

나는 어떻게 이 세상에 나왔으며, 나는 왜 그토록 힘든 주변 상황 속에서도 공부에 대한 열망과 끈을 놓지 않았을까? 1959년 3월 18일. 공납금과 기숙사에 내는 쌀 10말이 밀렸고, 4천 원이 드는 조산원과 간호원 면허증도 받지 못해서 고등학교를 외상 졸업하였다. 절망도 실망도 낙담도 비관도 불행감도 내 삶의 한 부분이기에 절망에 함몰되지 않을 것이다. 나의 소망은 자립하여 여성으로서 자존감과 지성을 갖춘 고귀한 인격체가 되는 것이다. 단 한 번뿐인나의 소중한 삶을 후회하지 않도록 매 순간 내 영혼이 기뻐하도록 노력해야겠지.

그 인생에 대한 꼬리표를 달기 전에 나의 잘못이라고 혼자서 자책하며 허우적거리지 말 일이며, 모두 다 내 주변, 혹은 남의 탓이라고 화내고 분노하고 원망하며 비난의 화살을 바깥으로 돌리며 책임을 전가하고 싶지 않다.

 

간호장교 시절


간호장교 시험에 합격하다

1960년 7월 1일에 마산 군의학교에서 필기시험과 순결검사를 받은 후 합격한 60명은 8주 동안 훈련에 들어갔다. 잔인하게 더운 퀀셋 건물에 기숙하며 급식은 쌀벌레 섞인 정부미에 주먹만 한 돼지비계만 둥둥 뜨는 국이 나왔다. 급수차로 실어오는 물은 항상 부족해서 숙소 뒤뜰엔 제대로 헹구지 못한 면생리대가 마치 만국기가 펄럭이는 것 같았다. 나는 소위임관 직후 전주 98육군병원에 배속됐다. 기숙사 생활을 했지만 야간대학에 진학했다.

나의 하루는 물리적인 24시간이 한없이 미분되어 마치 48시간의 길이를 가진 것 같았다. 사람들은 내게 조그마한 온기라도 나누어주고 은혜를 베풀어주고 용기를 북돋우어주며 내 어깨를 다독였다. 나에게 전환점의 기회를 제공해주고 불씨를 틔워주고 꺼지지 않도록 도와준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렸다. 나는 외로움으로 공중분해되지 않았다. 보잘것없는 나의 삶도 끝까지 사랑을 포기하지 않았고 내가 받은 구원을 언젠가 꼭 필요한 누군가에게 돌려줄 수 있을 것이라는 신념이 나를 지켜왔다. 나는 일찍 자아에 눈을 떴고 내 삶을 당시의 남성들보다 더 주도적으로 헤쳐 왔다.

간호장교 임관 훈련으로 극기를 체험했고, 아울러 측정이나 계량화할 수도 없는 정신적인 영역에서 강함이 나를 이끌어 준 것 같다. 세상의 파도에 마주쳤을 때 파도의 위압적인 힘에 무너지지 않았고 독립적인 주체로 살아남았다는 것이 내게는 기적이었다. 심리적이거나 정서적인 장애가 나를 덮치지 않은 것이 감사할 따름이다.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넋두리이거나 투정이다. 피해의식으로 항상 불평만을 늘어놓으며 인생을 낭비하지 않겠다.

 


그가 나하고 혼인하잔다

명예도 돈도 권력도 내게 중요한 척도는 아니었다. 나의 평범하지 않은 가족사 때문에 오직 한 가지! 변함없이 따뜻하고 거짓 없이 사랑과 정을 나눌 수 있는 상대이면 족했다. 육체적으로 혹은 정신적으로 불구만 아니면 된다. 간호장교인 나와 위생병 박영대 병장은 같은 사무실에 소속되어서 일 년 여 동안 서로를 객관적으로 알았던 사이였다.

측방교류를 통해 나는 화천 제 2이동외과에서 6개월 근무하고 제대 특명을 받았다. 15번이나 선을 보는 것에 지쳐있을 때, 우연히 중매를 통해 박영대 씨와 결혼하였다. 결혼을 위해 첩엄마가 내가 준 돈으로 동대문에서 새색시가 입을 4계절용 싸구려 옷 20벌과 화장대며 호마이카 장롱 등을 화물차로 청산 백운리에 미리 보내서 새색시 옷구경 한 번 하자고 온 동네가 들썩들썩하였다. 하지만 막상 청산에 시집을 와 보니 40대부터 산후풍으로 누워서 대소변을 받아내야 하는 80세 시할머니에다가 시어머니는 장애로 말을 못 하셨고, 이혼한 큰 시누이까지 있었다. 생활비에다가 부식비, 잡비, 땔감비 까지 대야 했는데 돈 나올 곳이 없어서 내가 직접 돈을 벌어야했다.

 

교사 시절 (뒷줄 가운데)


청산 국민학교 양호교사로 질풍노도

청산국민학교에 양호교사로 취직했다. 양호실을 깨끗이 청소하던 그날 밤에 큰아이를 출산했다. 몸조리도 변변히 못한 상태로 바로 출근하였다. 정신없이 공부하고, 어떤 힘인지 모를 나를 이끌어온 힘에 의해 앞으로만 나아갔다. 그것은 바로 교육의 힘이었다. 야간대학 졸업장이 내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는 데 십 여 년의 시간이 걸렸으나, 오늘의 나와 가족을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애쓰고 노력한 결실을 금방 거둘 수도 있지만 오랜 기다림이 필요할 때도 있다는 것을 배웠다.

추운 방바닥에서 연년생으로 두 아이를 출산하며 미역국 대신 큰시누이가 차려준 국간장 한 종지에 맨밥을 먹었다. 속으로 주먹만 한 눈물이 뚝뚝 흘렀다. 그러나 나는 여성으로서의 환희—자식을 잉태하고 출산하고 오로지 내가 보호하고 키워야 한다는 의무감과 온 우주에서 여성, 암컷만이 생명의 대를 잇고 삶의 숭고한 의지를 전승한다는 기쁨이 나를 둘러싼 온갖 열악한 환경이 주는 고통을 압도하였다. 그래, 내가 누구인가. 나는 신비한 힘을 가진 인생의 깊은 의미를 언뜻 목도한 지성의 아이리스 송화자이다! 나의 아들아. 이 지구별로 온 것을 축하한다. 내가 우주에 닿아있고 정신은 맑았으며, 성품은 강직하고 언제나 긍정의 뮤즈로 살고 있고, 여성들이 대접받고 살아가는 미래를 만들기 위해 시대정신에 앞서서 고군분투했음은 상욱, 지환, 정준, 너희의 유전자에 깊이 새겨져 있을 것이다.

 

삶의 동력이었던 세 아들


세 번째 행운-교련교사 전행고시

나는 순수한 소녀시절도 아름다운 처녀시절도 그냥 관통하고 말았지. 인간으로 태어나 특히 여성으로 성장하면서, 출산을 통해 인간존재를 인식할 때 그래도 나는 슬펐네. 나는 아름다운 영혼을 지녔고 지나치게 총명하였고 공부를 위해 전투적이었다. 한결 같이 벌이는 사업마다 실패하는 남편이지만 나를 사랑하였고 받지 못한 엄마의 사랑을 내게 주었기에 나의 엄마이고 아버지라네. 감사할 뿐이라오.

서울에 올라가서 셋째를 해산했을 때 친구 지영이 전공과목만 보는 교련교사 전행고시가 곧 있을 예정이라고 전화를 했다. 나는 마법에 걸린 것처럼 해산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서류준비부터 하였지만 이미 접수 마감이 끝났다. 나는 퉁퉁 부은 몸을 가지고 구비 서류도 갖추지 않은 채 교육위원회로 달려가서 아침부터 과장책상 옆에 거머리처럼 달라붙어서 제발 시험만 보게 해 달라고 읍소하였다. 지금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다. 세 아들의 어미에다 가장노릇 하는 아내였기에…. 오후 네 시쯤 당황한 과장이 임시접수를 받으며 내일 오전 10시까지 구비서류를 제출하지 않으면 자격상실이라고 엄중히 말하였다. 남편과 택시를 타고 서울지방병무청으로 가서 친척 박효근 씨를 통해 예편한 간호장교들의 병적필름에서 나의 병적기록을 확인 후 병적 확인서를 기적같이 발급받아 제출할 수 있었다. 시험은 무사히 치렀고, 마침내 교련교사 2급 자격증을 받았다.

 

인생은 아름다워라

이제 81세. 그래. 나는 지금 휴가 중이며 여행 중이지. 이제 그만 빡세게 살아도 되는 거지. 남편과 연애하며 사는 거잖아. 희망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평화로 하루를 마감하며 박영대 병장의 품에서 잠이 들지. 창밖에는 폭우이거나 눈이 휘몰아쳐도 그대 든든한 품은 그윽한 봄 향기가 가득하다. 청산 집은 나이 들어서 청소하느라 뼈가 녹아나지 않도록 둘이 살기에 충분한 공간으로 소박하게 지었다.

 

팔순 기념 가족사진


창문을 통해 바라보이는 산과 들은 과하지 않으며, 꽃과 나무는 정갈하게 가꾸어 놓았다. 나무 위로 새 소리, 바람 소리가 쉬었다 가고 높은 하늘에는 구름과 별과 달이 평화롭게 이동한다. 남편은 어느 날 내게 고백하였다. 창밖은 찬란하게 봄이 아우성을 치던 날이었는데 무심하게, 내가 왜 무능하게 살았는지 모르겠다고, 다시 태어나면 벽돌공이 되어서라도 밥벌이를 해서 당신을 먹여 살리겠노라고….

나는 대답 대신 눈을 돌려 창밖에서 후드득 떨어지는 매화꽃을 바라보았지.

나의 남편이 내게 해주었던 언어들이 바로 꽃의 말이라고 나는 고백한다.

내게는 그대 박영대 병장, 나의 존재의 이유이자 완성입니다. 감사드립니다.

저작권자 ⓒ 시사저널 청풍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