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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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9.09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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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이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
자연, 즉, 풀을 의인화 한 글이다. 풀 하면 잡초가 연상되고 잡초는 또 갈아엎어도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끈질긴 생명체다. 이러한 잡초를 민중이라 의인화하기도 하는데, 동풍은 주로 봄가을에 부는 바람으로 감기에 걸리기 쉽다. 비와 바람 또한 억압의 세력으로 풀과 대치하며 암담한 현실을 몰고 오는 대상이다. 이 시의 시대적 배경은 군사독재의 시절이다. 풀은 압제 당할 수밖에 없는 민중의 모습. 그러나 억압의 바람 가운데서도 무엇보다 빨리 일어나는 것 또한 풀이다. 바이러스와 홍수에 고달픈 민초들, 그러나 분연히 일어설 것이다.
김수영
1921-1968 서울
<풀이 눕는다>, <거대한 뿌리>, <김수영 전집>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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