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길동 선생의 47년 ‘천하제일 먹 이야기’

세계최초로 길이 80cm, 너비 10cm, 두께 4.5cm의 초대형 3kg 먹 생산

정다은 기자 승인 2020.12.10 15:58 의견 0

“초등학교도 못 다녔지만 먹과 함께한 내 인생, 먹에 대해서는 최고라고 자부하고, 남에게 피해주지 않고 최선을 다해 정말 열심히 살았습니다.”

‘먹’ 그 빛은 경건하여 천 년을 비추고, 그 향은 겸허하여 천 리를 간다.

옛 선비들은 나를 문방사우 중 으뜸으로, 한낱 물건이 아닌 고결한 정신을 가진 인격체로 여겨서 정신 수양의 매개로 삼았었다.

벼루 위에 나를 세우고 온 마음을 모아 혼탁한 정신을 갈아내면 내가 닳아지는 만큼 선비의 정신은 정갈해지고 맑아져서 마침내 높은 경지로 고양되고, 그 고양된 영혼이 나를 통해 글로, 그림으로 승화되는 것이다. 선비의 붓에 묻혀지는 순간의 나는 단순한 먹물이 아닌 정신 수양의 결정체이며 드높이 고양된 인간 영혼의 분신인 것이다

하나의 먹으로 태어나 인간의 정신 수양의 매개로서, 고양된 영혼의 분신으로서 그것을 쓰고 그려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할 수 있으니 나는 참으로 행복하다. 고난 속에 살아온 지난 세월을 생각하면 꿈만 같은 일이다.

배길동 선생이 47년전 최초로 만든 먹


배고픔과 굶주림으로 고통 받던 열일곱 살의 소년 배길동은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대전 천동에서 먹과 인연을 시작하여 47년을 먹과 함께 외길을 걸어왔다. 현재 금산군 복수면 구례리에서 지금은 사용이 줄어든 먹 대신 먹물을 만들고 있는 배길동 선생의 47년 먹 이야기를 들어봤다.

배길동 선생


Q. 먹의 생산과정을 말씀해 주세요.

A. 먹을 만들기 위해서는 먼저 아교를 물에 끓입니다. 그 다음 카본(그을음)과 섞어서 롤러에 곱게 내리고 섞은 후 손으로 뭉칩니다. 뭉친 반죽을 저울에 달아서 금형 틀에 넣어서 압축을 한 다음 10분에서 30분 사이에 먹을 금형에서 빼냅니다. 그보다 빨리 먹을 빼면 먹이 반듯하지 않습니다.

먹은 아주 민감한 제품입니다. 공기가 직접 닿아도 갈라지고 온도가 높아도 먹에 금이 가며 서예하시는 분들에게 들어가기까지 최소한 3개월 이상 걸립니다.

아무리 먹을 잘 만드는 사람이 만들어도 불량이 많이 나옵니다. 먹은 한날한시에 만들어도 품질은 각기 다릅니다. 우리나라 먹은 가장 큰 것이 (생산 시 무게 기준)500g 정도, 일본은 400g정도 되고 중국 것도 그 이상 큰 것은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저는 세계최초로 길이 40cm, 넓이 7cm, 두께 4cm, 무게 1400g의 초대형 먹을 생산하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이 먹은 처음 생산해서 불량률이 98%나 되기 때문에 생산성은 없으나 세계최초로 만들었다는 자부심이 있으며 불량률을 감소하며 성공률을 높여 수출할 생각입니다. 이 먹은 크기가 큰 만큼 건조에 드는 시간만도 6개월 이상이 걸립니다.

※ 먹이 크면 반죽을 비비지 못하고 먹의 표면이 곱게 되지 않아서 제대로 만들 수 없습니다. 먹이 크면 표면이 먼저 마르고 속은 마르지 않기 때문에 갈라지고 금이 갑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생산을 하지 못합니다. 금형의 무게만 해도 70kg정도가 나가서 작업이 쉽지 않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Q. 먹에 대한 설명 부탁드립니다.

A. 일반적으로 먹을 제조하려면 다음과 같은 재료가 필요합니다.

① 카본 블랙 N330 ⓶ 아교(젤라틴) ③ 용뇌(지속해서 향이 오래가며 먹에 쓰이는 향), 무스크 암브레트(인조사향, 천리를 간다고 하여 천리향이라고도 한다) 등의 향료. 그 외에도 많은 향이 쓰이지만 먹에는 용뇌와 무스크 암브레트라는 두 가지 향이 주로 쓰입니다.

먹을 제조할 때는 10월 초부터 다음해 3월 초까지 생산하며 이때 만든 먹은 ‘작품먹’이라고 하여 좋은 먹을 만들 수 있습니다. 이때 작품먹에는 아교 4근 반(16kg), 카본 20kg, 물의 양은 40kg 정도가 들어가는데 큰 고무대야에 붓고 삽으로 골고루 섞습니다.

아교의 함량은 좋은 먹을 만드는 데 큰 비중을 차지하며 카본 20kg에 아교 20kg으로 1대 1 비율까지 할 수 있는데 작업하는 데 드는 힘은 곱은 더 듭니다. 이 비율로 반죽하면 거의 생고무와 같이 변하여 먹을 만드는 사람의 기술과 힘이 동반되지 않으면 반죽할 수 없게 됩니다.

연습용 먹은 아교 2근 8kg, 물 40리터가 들어갑니다. 작품용과는 아교가 들어가는 비중에 차이가 있습니다. 연습용 먹은 4월부터 9월까지 만들며 비교적 쉽게 만들 수 있지만 작은 먹밖에 만들 수가 없습니다. 아교가 생물이기 때문에 부패가 될 수 있고 온도가 높아 먹이 곱게 쪼개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Q. 먹 반죽은 어떻게 하나요?

A. 먹 반죽을 할 때는 아교를 잘 끓여서 고무통에 붓고, 그 다음 카본을 붓습니다. 삽으로 골고루 섞어야 하는데, 분진과 섞을 때는 정말 힘이 듭니다. 믹서나 다른 기계로는 섞을 수 없고 반드시 삽과 사람의 손으로만 반죽할 수 있습니다. 눈을 껌뻑거릴 때 여성들이 눈 화장을 한 것처럼 눈 주위가 새까맣게 되며 온몸은 연탄장수와는 비교할 대상이 아닐 정도로 새카맣게 됩니다. 반죽 모양이 고무 덩어리 같이 되는데 만지면 생고무와 같은 촉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것을 떡집에서 떡을 찌는 것처럼 시루와 스팀을 이용해 먹을 충분히 쪄낸 다음 반죽 롤러에 4번 내리면 빛깔이 번쩍이는 먹 반죽이 됩니다. 그것을 다시 찌고 다시 내리고, 70도에서 100도 정도 되는 뜨거운 반죽을 맨손으로 향을 넣고 잘 뭉쳐 먹의 크기만큼 저울에 달아 가래떡마냥 둥글고 길게 매질을 해 나온 것들을 금형틀에 넣고 압축을 합니다.

어린시절 배길동 선생


Q. 먹을 건조하는 방법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A. 먹은 건조가 생명입니다. 먹을 잘 건조하지 못하면 먹이 잘 깨지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2~3만 원 하는 먹을 건조하려면 매일 뒤집어 주고자리를 매일 바꿔주고 뒤집어줘야 하는데 이때 공기가 닿으면 먹 표면이 갈라지기 때문에 종이로 먹을 덮어둬야 합니다. 보통 6개월에서 10개월 동안 매일 뒤집어주고 다른 자리로 바꾸어주면서 건조를 하며 공을 들여도 불량품이 많이 나옵니다. 불량률을 줄이는 것이 숙제라고 할 수 있지요. 그렇기 때문에 먹은 매년 생산할 때마다 똑같은 품질로 생산하기는 힘이 듭니다.

아교의 종류마다 성질이 다르고 달마다 다른 날씨, 온도에 따라 먹의 성격이 다릅니다. 완성된 먹들도 자세히 보면 조금씩 다릅니다. 작품먹인 경우 스팀을 쓰기 때문에 물의 함량도 달라 똑같은 먹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먹이 곧 사람과 같다는 생각을 하며 먹을 생산했습니다.


Q. 대형 먹 ‘천하제일 먹’을 만드셨는데요.

A. 천하제일의 먹을 만들겠다는 생각을 하고 도전해서 천신만고 끝에 건조해낸 날, 이제 성공했다고 생각했을 때 1년 만에 금이 가는 바람에 그동안 만든 대형 먹을 모두 부수어야 했습니다. 그 후에 다시 도전하여 먹과 같이 먹고 자고, 한시도 관심을 게으르게 하지 않고 보살펴 드디어 천하제일 먹을 건조하게 되었습니다. 성공했다고 느꼈을 때 그 기쁨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좋았지만 누가 알아주지도 않고 팔기에도 곤란한 물건, 나의 모든 것을 걸고 성공한 먹이었습니다. KBS ‘6시 내고향’에 출연한 후 책임을 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먹을 제작하게 되었고, 제작하는 동안 아픔도 있었지만 결국에는 성공했습니다.

천하제일 먹은 생산했을 때 무게가 3kg, 길이 80cm, 너비 10cm, 두께 4.5cm로 금형 무게만 150kg이었습니다. 2002년 건조해 성공한 먹으로 일반적인 먹은 갈아 써서 없어지므로 정성으로 만든 먹이 없어짐을 안타까이 여겨서 소장할 수 있고 후대에 남길 수 있는 먹을 만들 수 없을까 하는 생각으로 3년 동안 수천만 원의 제작비와 수천 번의 실패를 거듭하면서 성공해낸 먹입니다. 지금까지 15년을 건조하면서 끝까지 책임진다는 생각으로 성공한 먹을 보고 있습니다.

불행한 먹장의 마지막 걸작이라고 생각하면서 왜 천하제일 먹이 만들기 어려운가? 보통 작품 먹 중 큰 것이 20cm 미만이지만 먹이 크고 두꺼우면 건조가 어려워 제작에 힘이 들어 쉽게 도전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먹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아교는 생물이어서 부패가 잘 되고 아교의 당기는 힘에 의해 표면이 먼저 마르면 신발 밑창 같이 갈라져버리는 성질이 있다. 표면에 공기가 닿아도 갈라져 버기 때문에 두텁고 긴 먹을 만들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일반 먹은 한 번 건조가 되면 먹이 휘거나 뒤틀리는 현상 없이 건조된 상태로 갈아 쓰면서 서서히 없어진다. 하지만 천하제일 먹은 먹의 길이가 길고 두텁기 때문에 15년이 지난 지금도 변형이 생기는, 그야말로 생명력이 있는 먹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배 선생은 천하제일 먹을 표구하여 공기가 직접 닿지 않게 해 영구 보존할 수 있게 포장을 했다.


깨끗한 손을 가져본 적이 없을 정도로 새까만 그을음 속에 뒹구는 동안 열여섯 살 소년은 어느덧 64세가 되었지만, 선생의 얼굴에선 품격 있는 묵향이 풍겨 나오는 듯하고 선생의 형형한 눈빛은 먹을 닮아있다.

배길동 선생

1958년생

1974년 금불환제 먹사

1982년 삼광제먹사 운영(먹, 먹물)

1997년 먹 민속공예품 지정(금산군 제97-2호), KBS 6시 내고향 출연

2001년 금산군 공예품 경진대회 동상

2002년 비공인 세계에서 가장 큰 먹 생산

2003년 한국산업인력공단 민족 고유 먹 기능 전승지원

저작권자 ⓒ 시사저널 청풍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