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연자 작가의 여행이야기] 그대, 아루나찰라로 초대합니다. -5-

이연자 작가 승인 2020.12.10 17:01 의견 0

스리 라마나 마하르쉬는 진아(the Self) 탐구 수행방법을 물었을 때 이렇게 대답했다.

“오던 길로 가라!”

14. 산려소요(散慮逍遙) ― 걱정을 흩어버리고 한가로이 거닌다

이제 내게 벌어진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 한 가지만 남았다. 2주 동안 나는 거의 매일 하루에 1~2시간 정도 자고, 먹는 것은 밥 반 공기 정도랄까, 아루나찰라의 에너지가 나를 움직인 듯하다.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아서 오후의 프라닥시나가 자연스럽게 새벽의 프라닥시나로 바뀌었다.


다나의 베란다에서 아루나찰라 산을 한없이 바라본다. 전망이 좋아서 그의 방은 다음 차례 외국인에게 예약되어있다. 단정한 산의 흐릿한 실루엣 위로 버터 횃불은 조용하게 깜박인다. 온 우주가 조용하다. 처음에 왔을 때 만월은 하현 반달로 점차 이지러지고 있다. 깨끗하게 어두운 하늘에는 별들이 반짝인다. 정말로 아루나찰라는 지구의 심장이며 홀로 깨어서 저 멀고도 머언 우주의 어느 성단에 존재하는 그 어떤 별과 교신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저 모습은 수행자의 모습이런가.

고독하고 고귀하고 스스럼없이 아름다운, 단순하게 솟아오른 검은 산이여.

‘오 아루나찰라’ 하고 다나가 내는 소리는 때로는 탄식처럼 때로는 기도처럼 들렸다.

오 아루나찰라.

그렇게 몇 시간이고 산을 바라보다가 새벽 1시쯤에 우리는 길을 나섰는데 그날은 이상하게 더웠다. 시골길로 접어들며 길 양쪽으로 수없이 많은 템플들을 지나친다. 그동안 프라닥시나의 경험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나 혼자 오후 네 시에 프라닥시나를 했을 때 적선도 하고, 구경도 하고, 어떨 때는 꼬마들의 자전거를 5분씩 얻어 타기도 한다. 어떤 때는 안장이 다 찌그러져서 고도의 집중력으로 기우뚱하게 있어야 운전하는 아이와 밸런스를 맞출 수 있다. 친구들에게 아이의 으쓱하는 모습이 내게도 전달된다.


때로는 사두들 여섯 명이 나란히 앉아있는 어느 양지바른 다리 난간 위에 한참 앉았다가 나는 ‘아루나찰라’ 라고 인사한 후 헤어진다. 재미있는 모양도 봤다. 그날 구걸한 것을 나누어 가지는 듯, 한 사두가 주르륵 동전을 분배한다. 일반인은 짜이 값이 4루피이고, 사두는 짜이 값이 2루피란다.


시골길을 지나갈 때 길에서 자는 모습들을 바라본다. 사두들은 낮에 몸에 둘렀던 천을 얼굴까지 뒤집어쓰고 홑겹이불 두르듯 하고 자고 있다. 어느 곳에서는 두 명의 사두와 두 마리 개새끼까지 몸을 동그랗게 하고 한 식구처럼 나란히 정겹게 자고 있다. 남부라서 그런지 구걸도 집요하지 않다. 몇 번 적선을 요구하다가 깨끗이 돌아선다.

얼마 전 프라닥시나 중에 시내 쪽에서 아루나찰라 산을 올려다보았는데 왼쪽 산허리 3분의 2 높이 지점에서 정상의 버터 횃불보다도 더 큰 하얀 불이 빛나고 있었다. 전등불(이 있을 지점이 아님)도 아니고, 별빛이나 비행기 불빛치고는 지나치게 고정되어서 의아했다. 며칠 후에 수냐가 그 불빛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불기둥이라고 묘사하던데, 나도 그 불빛을 보았다고 맞장구쳤다.

오 아루나찰라.

그날은 지나치게 고요하였다. 시골길에 접어드니 사람들이 아무도 없었다. 인도 특유의 24시간 언제나 들끓어대던 사람들이 전부 잠이 들었나 보다. 디팜이 끝나갈 때라선지 순례객들도 전혀 없다. 하늘은 새까맸고 어둑새벽 아래 길조차 새롭게 보였다. 시골길 양쪽에 늘어선 가로수의 웃자란 이파리들이 터널을 만들어 무한히 뻗어있다. 드문드문 켜있는 가로등이 희부옇게 명도를 드러낼 뿐. 하늘에서는 북두칠성이 가만가만 이동하고 있다.


그때였다. 사두(sadhu, 깨달음을 얻기 위해 고행하는 행자)가 뒤에서 홀연히 나타나더니 타밀어로 된 찬송을 시작한다. 그의 목소리는 쉰듯하나 날것(rare)으로 청아하고 챈트의 단조로운 곡조는 묵직하게 울려 퍼진다. 우리는 점점 걸음을 늦추어 뒤따라 오던 그와 자연스레 보조를 맞춘다. 그토록 많고 많은 템플 앞에서 그는 일일이 걸음을 멈춘 후 머리를 가린 숄을 내리고 인사를 한다. 중간 중간 아루나찰라가 잘 보이는 곳에는 멈춰 서서 인사를 드린다.

그렇게 한 시간도 넘게 찬송을 부르며 같이 길을 걷는다. 상상해 보라. 고요함 속에서 우아하게 곡선을 그으며 가로수 터널 속에 뻗어있는 그 길을… 낮은 조도의 가로등과 별빛과 달빛이 만들어내는 긴 그림자를 밟으며 터벅터벅 걷고 있을 때, 이국의 언어로 찬송하면서 아루나찰라 산에 경배하며 어둑한 새벽길을 걷는 모습을. 저 멀리 단순한 실루엣의 아루나찰라 산 정상은 버터 불빛이 홀로 타오르고 있는데….


다나는 짜이 한잔을 대접하고 싶다고 했고, 나는 몇 루피라도 보시하고 싶다고 했는데, 갑자기 그가 어느 캄캄한 집으로 휙 들어가 사라졌다. 우리는 답례를 하지 못한 것에 아쉬워하며 길을 계속 걷는다.

믿을 수 있는가? 갑자기 그가 자전거를 타고서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난다. 반가운 마음에 짜이를 한 잔 대접하겠다고 말한다. 그가 앞서고 쾅쾅쾅! 어느 주막집(참, 짜이 집이지)을 두드리며 주모를 깨운다. 시골 아지매는 졸린 눈을 비벼대며 짜이를 끓인다.

그는 사두인줄 알았더니 그 동네 사는 총각이다. 하기사 곧 사두가 되겠지. 그 동네에서 태어나고 자라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했지만 테일러를 하는 양복쟁이란다. 사십이 넘은 그와 형도 동생도 몽땅 총각이란다. 저녁 일찍 가게 문을 닫고 한숨 자고 새벽 1시에 깨어서 찬송 프라닥시나를 20년이나 계속 하였단다. 그리고 다시 잠들어 새벽에 일어나는 그 생활을, 생활이 신앙이고 헌신이었다. 정답긴 하나 생경하게 보였던 힌두교의 템플들과 링감들이, 이들과 어우러져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것으로 그제사 이해되었다.

그때였다. 짜이를 마시던 재봉사가 갑자기 길 쪽을 가리킨다. 가게 건너편에 하얀 옷을 입은 남자가 바삐 지나가고 있다. 재봉사는 그가 라마나스라맘 아쉬람 총재(president)로 20년 동안 아쉬람을 새벽 1시에 출발해서, 이 짜이집 앞을 새벽 2시~2시 15분 사이에 날마다 지나간다고 증언한다. 가슴이 서늘해졌다. 오 아루나찰라

‘걱정을 버리고 한가로이 거닌다’는 이 글의 소제목은 그래서 틀렸다.

15. 헌신자들(devotee)―중독의 삶

다나의 친구 중에 루파라는 이태리 여성이 있다. 나이는 오십 정도이고 3번 정도 결혼해 본 전직 화가이다. 그녀는 락슈와미 게이트에 오기 위해 하루에 3번씩 목욕재계를 한단다. 이태리 남자인 로베르토는 팽이를 깎아서 팔기도 한다. 나는 주황색 팽이에 초록색 아루나찰라 산을 그려달라고 했다. 로베르토는 집세 전기세 식비 등 모두 포함해서 한 달에 4천 루피(한화 10만 원)가 든다고 했다. 인도 비자가 6개월이니, 반년은 이태리로 돌아가 막노동으로 돈을 모아서 다시 인도로 돌아온다. 로베르토는 이런 생활을 14년째 하고 있으며 앞으로 이곳에서 뼈를 묻을 작정이란다.

다나는 이렇게 강조한다. 헌신이 수행보다 우선한다.


나는 로터스와 만나 잠깐 이야기를 한다. 로터스는 며칠 전부터 내 신경계가 풀어지고 있으며 머리 꼭대기 차크라가 기진맥진 다 소진되었다고 이런저런 설명을 하였다. 속 안의 슬픔이 정화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라. 과거의 것이기 때문에 흘려버려라. 현생이 벗겨지면 그 이전 생이 계속 정화되는데, 슬픔을 슬픔으로 보면, 다시 속으로 쌓인다. 인간은 그냥 태어나서 없어지는 그런 유한한 존재가 아니다.

며칠 전 우리 셋이 게이트로 오던 도중에 락슈와미와 암마가 타고 나가는 차를 만나게 됐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스승을 만났기에 그 자리에서 다나도 울었고 로터스도 울었다.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울음소리는 얼마나 적나라한 것인지, 나는 그들의 울음에 같이 울컥 울음이 솟구쳤다. 나 같은 초짜들은 암마의 시선을 그대로 받아도 되지만, 그들은 1000배 상승의 기운을 받는다. 두 번째 시선을 그냥 받으면, 그대로 폭발해버릴지도 모르기에 두 번째는 암마가 시선을 거두어버린다. 이렇게 자신의 근기대로 생존해탈자와의 시선 한 번으로 자신을 점검하는 진검승부의 세계

나는 다나에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성경에서 포도원에 일하러 오는 인부들 중에 포도밭 문이 닫히기 직전에 들어온 아주 운이 좋은 일꾼이라고 말이다. 다나는 나의 카르마가 좋기 때문이란다.

다나는 성경해석이 아주 명쾌하다. 기독교는 ‘나 이외의 신은 섬기지 말라’는 계명의 유일신으로 하느님을 옹색하게 만들었다고 말한다. 시바신은 ‘저 하늘에게나, 땅에게나, 그 밖의 모든 것들에게 경배하는 것이 바로 나에게 그대로 하는 것’이라고 포괄적이고 포용적인 신의 개념을 가진다고 설명한다.

라마나 마하르쉬는 진아(the Self) 탐구 수행방법을 물었을 때 이렇게 대답했다.

“오던 길로 가라!”

이러한 역설(paradox)을 다나는 오던 길은 업을 뜻하며, 이때까지 쌓아온 모든 업을 하나씩 하나씩 벗겨내는 것이라고 설명해준다. 하나씩 지워나갈 때 남는 하나가 바로 진아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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