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학자 경당 박정규 선생, 유학의 종자라도 전하려고 옛 의관을 고수

정다은 기자 승인 2021.08.06 16:25 | 최종 수정 2021.08.06 16:26 의견 0

교과내용이 인륜을 중심에 두지 않는다고 비판해 선비들은 자녀를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그때 유학자들은 당시 학교 교육이 지속되면 세상이 이렇게 변해간다는 걸 알고 있었다.

경당 박정규 선생

“당시 유학자들은 이것을 천운으로 생각했어요. 그렇지만 본인들이 지켜나가야 할 것은 지켜나가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천운이 비록 옮겨가지만 사람 마음은 옮겨가서는 안 되고, 인심이 비록 변하더라도, 내 마음이 변해서는 안 된다’라는 사상을 가지고 살았어요.”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에는 경당 박정규 선생께서 옛 의관을 고수하면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청풍 정다은 편집장은 무더운 날 지인 몇 분과 함께 경당 선생을 찾아 경당 선생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Q. 유학의 경전을 읽고, 또 옛 조선의 의관을 고수하면서 살고 계신데,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으신 말씀이 일반인들과는 다를 수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을 사자성어로 하나 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A. 일반인들은 저와 같은 사람들을 보면서 고리타분하다고 말해 왔어요. 하지만 이제 그렇게 말씀하신 분들이 주도권을 잡은 지 이미 70여년이 흘렀습니다. 이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도 이미 폐단을 도출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현대인들도 자신들을 돌아볼 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법구폐생(法久弊生)이라는 사자성어를 말하고 싶습니다. 좋은 법도 오래되면 폐단이 생긴다는 의미인데, 이제는 현대인들이 어떠한 폐단이 있는지 돌아보고 바꿔야할 시기가 되었다고 봅니다.

현대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바로 들추기보다는 조선시대를 예로 들어 말해보겠습니다. 고려말기에 고려 500년의 폐습이 극에 달하던 시기였습니다.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지만, 그 중에 부부유별이 심각하게 무너져 있었어요.

남편은 조강지처도 모르고, 그냥 이웃 집 아낙이라도 예쁘면 아내를 삼았어요. 이웃집 아낙도 옆집 남자가 세력이 강하면 남편 버리고 이웃집으로 시집가 사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어요. 당시 폐습이 이처럼 심각했기 때문에, 사대부가에서 뜻있는 선비들이 성리학을 대안으로 제시했던 것 같아요.

조선 초기에 황희 정승에게 법을 만들게 했는데, 이에 대한 대안으로 서자와 서손은 백대가 지나도 과거를 보지 못하게 했어요. 조강지처와 적자를 보호하기 위한 강력한 법이었지요. 만약 숨기고 합격을 했을 경우 나중에 발각이 되면 중벌로 처벌을 받았지요. 그래도 고려 말의 문란한 풍속은 오랫동안 바뀌질 않았어요.

그러다 조선의 이러한 법이 백년 정도 흐르니 고려 말의 악습이 바로 잡아졌지요. 문제는 이쯤 되면 적서의 차별을 살짝 풀어줘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어요. 서자서손은 아버지에게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했지요. 또, 동생에게 말을 놓을 수 없었고, 양반들과 사귈 수가 없었어요. 아무리 잘 난 인물도 혼인을 할 수가 없었어요. 이러한 악습은 시간이 흐를수록 심해져만 갔지요.

그래서 율곡 이이 선생이 선조에게 “인재라면 서자서손이라도 등용을 해야 합니다”라고 건의한 내용이 경연일기에 나와요. 하지만 이러한 건의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요.

시간이 더 흐른 후, 우암 송시열 선생과 효종대왕이 과부에게 개가(재혼)를 허용하고, 서자서손도 벼슬을 할 수 있게 법을 바꾸려고 했어요. 두 분의 합의 하에 조정대신들을 모아놓고 그러한 의사를 표명하니, 극렬한 반대에 부딪쳤어요. 삼사와 유생들까지 들고 일어나고, 사방에서 상소를 올려, “예의의 나라 조선을 금수의 나라로 만들려고 한다”고 떠들어댔어요. 이에 효종대왕이 우암 송시열 선생에게 “언젠가는 시정을 해야 하지만, 잠시 보류하자”고 했다는 겁니다.

조선 초에 적서차별을 한 법률을 제정한 것은 당시 상황이 어쩔 수 없었어요. 하지만 시간이 흘러 이에 대한 폐습이 생기면 다시 바꿔줘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어요. 법이라는 것은 때에 따라 상황에 따라 바꿔줘야 합니다.

경당 박졍규 선생(왼쪽)과 장헌 조득상 선생(오른쪽)

Q. 그런데, 선생님도 때에 맞추어 안 사시고, 옛 의관을 고수하고 계신데요?

A. 요즘 세상에 유학의 종자가 없어지게 생겼어요. 그러니 유학의 종자라도 전하려고요. 이러한 의관을 하고서, 자동차를 만들겠어요? 논에 가서 일을 제대로 할 수 있어요? 요즘 세상과는 맞는 것이 없어요. 혼자서 옛 것이 좋다고 이러고 있는 것은 유학의 종자를 전하고자 하는 겁니다. (※필자 주석: 유학의 맥을 잇는 것으로 본인의 사명을 삼았음을 이렇게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제가 7남매를 뒀습니다. 하루는 7남매 모두 모였는데, 나더러 “때에 맞지 않게 살면서 고집만 부린다”고, 첫째가 얘기하고 둘째·셋째까지 모두 한마디씩 하니, 대답을 할 수 없어서 가만히 듣고만 있었어요.

그때 막내딸이 초등학교 3학년이었는데, 나서더라고요. “내가 나서지 않으려고 했는데 안 되겠네. 소학에 말했잖아. ‘세상이 어떻게 변해도 어버이를 사랑하고 형을 공경하는 등 그런 것은 세상이 어떻게 되든지 변함이 없다’고 하잖아. 근데 왜 언니들은 그런 것도 몰라?” 막내가 그렇게 말하니, 모두들 할 말이 없다고들 합니다.

Q. 선생님 어린 시절 광주에서의 이야기 좀 듣고 싶습니다.

A. 낮에는 밭에서 일하고 밤에는 글을 꼭 읽었어요. 읽기 싫어도 읽어야 했어요. 율곡 선생의 격몽요결 첫 마디에,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학문을 하지 않으면 사람이 될 수 없다’고 했어요. 그래서 그때는 글을 안 읽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아무튼 그때는 열심히 글을 읽었어요.

저는 할아버지 밑에서 한문을 배우고, 학교를 다니지 않았습니다. 당시 할아버지께서는 학교의 교과 내용이 인륜을 중심에 두지 않는다고 비판했고, 이에 대한 반발로 자신의 손자들을 학교 보내는 것에 반대했어요. 그렇게 우리 할아버지 같이 생각한 사람들이 한개 군에 두세 분 정도는 있었어요. 그래서 그분들끼리 서로 교류를 하고 지냈지요.

저도 어쩌다 초등학교 책을 봤는데 ‘철수야 가자, 영희야 놀자, 바둑아 가자.’ 라고 되어 있었어요. 어린 나이에 이게 무슨 교육이냐는 생각을 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유학자들은 당시 학교 교육이 지속되면 세상이 이렇게 변해간다는 걸 다 알았어요.

당시 유학자들은 이것을 천운으로 생각했어요. 그렇지만 본인들이 지켜나가야 할 것은 지켜나가야 한다고 생각했지요. ‘천운이 비록 옮겨가지만 사람 마음은 옮겨가서는 안 되고, 인심이 비록 변하더라도, 내 마음이 변해서는 안 된다’라는 사상을 가지고 살았어요. ‘살아도 이 사상을 갖고 살고, 죽어도 이 사상을 갖고 죽는다.’ 라는 생각이었지요.

한학자 경당 박정규 선생

Q.그때(어린 시절)도 상투를 하셨어요?

A. 21세에 머리를 길렀어요. 그전에는 옷은 한복을 입었지만 머리는 일반인들과 같았어요.

제 고향은 광주의 무등산 아래에 있는 조그마한 시골 동네였어요. 할아버지께서는 20세부터 훈장을 하던 분이라, 당시 제가 서너 살 되던 때에도 인근 마을 아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쳤지요. 그러다 보니, 손님이 많이 찾아 왔어요. 할아버지도 손님들도 의관을 갖추고 있었는데, 그러다가 피곤해지면 살짝 옆으로 누웠어요. 그것을 당시에는 가침(살짝 눕다)이라고 했어요. 그러다가도 겨우 서너 살인 제가 들어가면 연로하신 분들이 다 일어났다가 다시 누우셨어요. 나이 어린 아이라도 상대를 공경하는 의미가 있었지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바로 예의였어요.

이전 어른들 품행은 지금과는 달랐어요. 아기들 베개를 장난하면서 던지기도 하잖아요. 제 할머니는 못 던지게 하셨어요. 아기가 베고 자다가 깜짝 놀란다고 해요. 그리고 방에 개어둔 아이들 옷도 넘어가지 말고 돌아가라고 하셨어요. 나이가 들다 보니, 그때 어른들 하시는 것이 맞는 것 같아요. 당시 어른들은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정신이 있었어요. 지금 사람들은 그런 것을 모르는 것 같아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러한 것들이 진짜 교육이었어요. 이러한 교육은 할아버지 할머니하고 같이 삶으로써 자연스럽게 배웠어요. 그런데, 그러한 이야기라도 해줄 수 있는 할아버지 할머니를 안 모셔본 사람들은 어떻게 알겠어요? 어린이를 잘 키워야 합니다. 지금 세상에 어린이 교육과 관련하여, 학부모도, 학교 선생님들도 걱정 안 하는 사람들을 보지 못했습니다.

예다원 공주영 원장(왼쪽), 장헌 조득상 선생(오른쪽 앞)과 함께

예다원 공주영 원장은 “저는 대전에 있는 교육청 소속 강사이기도 해요. 아이들하고 나가서 인성교육 수업을 해보면요, 아이들한테 사서삼경이니, 논어니 어렵잖아요. 간단하게 할 수 있는 것, 아이들은 어렵고 힘들면 안 하려고 하니까요. 유교 경전에 ‘천하 만물의 가운데에 오직 사람이 가장 귀하다.’라는 말이 있잖아요. 그래서 “사람만큼 귀한 것은 없다, 천하 만물 가운데 사람이 제일 귀하다.” 라고 말하면서 아이들한테 가르쳐요. 옆에 있는 친구가 귀하고, 집에 있는 부모가 귀하고, 내 가족이 귀하다. 내 가족·친구·옆에 있는 사람들한테 잘 해야 된다. 그걸 아이들한테 인성교육을 해요. 그렇게 하니까 아이들이 처음에는 조금 의아해하더라고요.

대전에는 효를 가르치는 기관이 있어요. 한국효문화진흥원이라고 거기서 효를 가르칩니다. 소학에 ‘신체발부(身體髮膚)는 수지부모(受之父母)니, 불감훼상(不敢毁傷)이 효지시야(孝之始也)라.’라는 글귀가 있잖아요. 그래서 ‘피부, 머리카락 하나라도 부모님이 주셨기 때문에 상하지 않게, 훼손시키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다’ 라고 말해줘요. 아이들에게 처음부터 ‘효도해라, 효도해라’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얘기를 해줘요. ‘너 몸 다치지 않는 것, 마음 상하지 않게 하는 것, 걱정 끼치지 않게 하는 게 효다’. 그럼 그때는 아이들이 끄덕끄덕 해요.

입신행도(立身行道)하여, 양명어후세(揚名於後世)하여, 이현부모(以顯父母)가 효지종야(孝之終也)라. 몸을 세워 도를 행하여서 후세에 이름을 드날려 부모님을 드러내드리는 것이 효도의 끝마침이다.

지금 오늘 선생님 말씀 들으니까 저도 어렸을 때 아빠 엄마가 ‘머리 위로 지나다니는 것 아니다’, ‘아빠 발밑으로 지나가는 거다’, 그런 얘길 하셨던 게 기억이 나요. ‘아기 베개 던지는 것 아니다’, ‘아기도 위로 넘어 다니지 마라’. 또 어렸을 때 엄마가 ‘아기 위에서 쳐다보지 마라, 아기 눈 사시된다.’ 하셨던 게 기억이 나요.

이에 경당 선생은 “네, 어른들은 다 알고 계셨어요. 그리고 또 아기들 도리도리 잼잼 짝짜꿍 연지곤지 하잖아요. 그게 어렸을 때 엄청나게 운동이 되는 거예요. 이게 아무것도 아닌데, 아이들한테는 운동이에요. 원래는 왕손들한테만 했대요. 도리도리가 뭐냐면, 좌우를 살피고 목의 근육 운동을 하는 것도 있지만 좌우를 살피면서 도리를 지키라고 도리도리래요. 지금은 아기들한테 이렇게 하는 것을 못 봤어요. 그래서 우리 같이 옛 것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걸 우리의 문헌을 뒤지면서 찾아내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기호유학 본산 논산서 선비정신연구회 출범 당시 경당 박정규 선생 강의

Q. 선생님 결혼은 몇 살에 하셨어요?

A. 결혼은 스무 살에 했는데 얼굴도 모르고 만났어요. 그땐 처자들이 바깥에 안 나갔잖아요. 안 보고 한 것이 재미는 더 있어요.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그것도 몰랐어요.

당시 처자들이 머리를 길게 땋고 빨간 댕기를 하는데, 내가 한복을 입고 집을 나서면 다 쳐다봐요. 제 얼굴을 보고 쳐다본 것이 아니라, 그때만 해도 남자들이 모두들 검은 양복을 입었는데, 저는 한복을 입었으니까요.

저도 다른 사람들과 같이 일은 해요. 들에 가서 풀도 뜯고, 논밭에 가서 김도 매고, 그런데 나는 집에 들어오면 얼른 씻고 옷을 갈아입었어요. 방금 지게 지고 들어갔는데, 바로 바깥에 나올 때는 깔끔하게 한복을 입고 나오니까 그것을 좋게 봤던 모양이에요. 어디든지 이렇게 한복 입고 나가면 자기들끼리 저를 쳐다보고 웃고 그랬어요. 그때 상각하면 어렸어요. 돌아도 안 봤지요. 군자는 원래 돌아보지 않는다고 배워서요. 그런 것을 더 좋게 보지 않았나 싶어요.

그때 사람들에게 여기저기 청혼이 들어왔어요. 혼인에는 집안 배경도 중요하니까, 집안 배경을 이야기 해볼게요. 우리 조상들이 조선 초에 서울에서 내려와서 지역에서는 모르는 사람은 몰라도, 뼈대는 있는 집이라고 알아줬어요. 인근에서는 송강 정철 선생의 지실정씨와 충장공 김덕령 장군의 광산김씨가 명문가였는데, 우리 집안은 서울과의 교류가 끊어지지 않았고, 대대로 훈장을 하면서 인근 마을 아이들을 가르쳤기에, 조금 인정을 해줬던 것 같아요.

기호유학 본산 논산서 선비정신연구회 출범 당시 경당 박정규 선생 강의

Q. 현대인들에게 마지막으로 들려주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면, 부탁드립니다.

A. 우리나라가 경제발전과 민주주의에서 세계사적으로 가장 빠른 성과를 내었다고들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러한 성과를 낼 수 있었던 저력이 무엇인지는 간과하고 있어요. 그저 조선 말기의 폐습이 찌든 시기를 언급하며, 모든 책임을 유학에 덮어씌우고 있어요.

저는 우리나라가 경제발전과 민주주의라는 두 가지를 모두 잡을 수 있었던 저력은 조선왕조 500년 동안 유학을 숭상했던 덕으로 봅니다. 한문이 우리말이 아니기에 아주 어렵습니다. 그러한 어려운 한문을 마을마다 안 가르친 곳이 없었어요. 열 가구만 있어도 훈장을 초빙해서 글을 가르쳤어요. 과거를 하든 안 하든 사람이 되려면 글을 배워야 하는 것으로 알았어요.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당연히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고, 배움에 대한 욕망도 강해요. 또, 기본적인 공부 머리가 있어서 신문물을 받아들일 때 다른 나라보다 속도가 빠를 수밖에 없지요. 그러니 자연히 경제발전이 빠를 수밖에 없구요.

민주주의도 마찬가지에요. 민주주의가 발전하려면, 사람이 착하다는 사람의 본질에 대한 믿음이 필요해요. 그리고,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이 필요하지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조상들이 500년간 인의를 가르쳤어요, 그것도 마을마다 안 가르친 곳이 없어요. ‘사람의 본성이 착하니, 착한 마음을 보존해야 한다’, ‘눈 앞에 이익보다는 시비를 가릴 줄 알아야 선비다’. 이러한 인의의 교육이 우리나라 사람들 깊숙이 들어가 유전자가 되어 있어요. 그러니, 우리나라 민주주의가 다른 나라보다 빨리 발전할 수가 있는 거지요.

세상에 평지도출 하는 법은 없습니다. 다 그만한 바탕이 있어야 해요. 알고 보면 유학 덕분에 경제발전과 민주주의를 이만큼 이루었어요. 이제는 유학을 고리타분한 학문이라고 비판만 할 게 아니라 유학의 장점을 인정하고 현대사회의 폐단을 유학으로 바로 잡을 생각을 해야 할 시기가 왔다고 봅니다.

기호유학 본산 논산서 선비정신연구회 출범 당시 경당 박정규 선생 강의


인터뷰를 마치며…

현대는 돈이 양반인 세상이 되어가고 있지만 조선시대 유교사상 덕분에 중국은 우리나라를 해 뜨는 동방예의지국 또는 군자국(君子國)이라 일컬어 왔다. 중국의 공자도 자기의 평생소원이 뗏목이라도 타고 조선에 가서 예의를 배우는 것이라 했다고 한다. 부디 충효 사상이 유교의 덕목이듯이 효는 일찍이 중요한 덕목으로서 높이 평가되고 있었다. 孝가 老와 子로 되어 있는 것으로 알 수 있듯이 효는 노인을 섬긴다는 뜻이다. 즉 자기 부모를 돌보는 것이 효이고 그것은 부모에게 경의를 표하고 부모의 뜻을 존중하고 그것에 따른다는 것이다. 효 사상의 실천을 위해 가족뿐만 아니라 지역 사회, 나아가 국가가 함께 고민하고 해결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저작권자 ⓒ 시사저널 청풍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