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홍철의 아침단상] 진정한 소통은 상대방에 대한 존중에서 시작된다

염홍철 새마을운동중앙회장 승인 2021.11.10 14:04 의견 0

세종대왕은 “소통하지 않는 정치는 이미 정치가 아니다.”라고 주장했지요. 세종은 ‘소통의 리더십’을 통해 선정을 베풀고 특히 한글 창제와 과학기술 발전 등 조선시대 최고의 치적을 남겼습니다. 세계 최고 갑부 중 한 명인 워런 버핏 역시 소통의 귀재로 유명합니다. 워런 버핏의 소통 방식은 손에 잡히게, 상대가 아는 이야기로 대화를 한다는 것입니다. ‘가령’과 ‘예를 들어’ 등을 말머리로 끌어내어 상대의 경계심을 늦추고 객관적임을 암시하는 용법을 쓴다는 것이지요. 이렇듯 소통은 자신의 의지와 마음가짐뿐만 아니라 표현하는 방식이나 요령도 중요한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갈등은 오해와 불신에서 비롯됩니다. 노사 간·세대 간·상하 간뿐만 아니라, 평소 가까운 가족이나 친구 간에도 사소한 오해가 걷잡을 수 없는 갈등으로 번지는 경우가 많지요.

언젠가 전 직장에서 한 직원이 저에게 이메일로 ‘이유 있는’ 항의(?)를 해온 적이 있습니다. “엘리베이터에 같이 탔는데 전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거시더니 오늘은 저한테 한마디도 안하시더군요. 그래서 많이 서운했습니다.”라는 요지의 메일이었습니다. 물론 저는 그 직원에게 아무런 선입견이 없었고 누구인지 얼굴도 모릅니다. 그런데 아마 그 직원과 엘리베이터를 탔을 때 다른 생각에 골몰하여 표정이 굳어져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사정이야 어떻든 저의 배려 부족임에 틀림 없었고, 소통으로 오해를 해소할 수 있었습니다.

소통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지요. 정책의 이해를 위해서는 시민과 공직자가. 직장의 사기를 위해서는 직원과 간부가. 노사 화합을 위해서는 노동자와 사용자가, 또 가정의 화목을 위해서는 부부사이, 부모와 자녀사이에도 소통을 해야 합니다.

공익을 위해서는 ‘소통은 곧 양보’가 아니기 때문에 대화의 과정에서 원칙을 지키면서 오해를 풀어주는 한편, 타당성에 대한 반복적이고 섬세한 부분까지의 설득 노력이 필요합니다. 소통의 리더십을 가진 세종대왕은 한글 창제, 황희 정승 발탁 시 반대하는 신하들이 많았는데도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세종은 그들을 하나하나 설득하고 다독이며 밀고 나갔지요. 만일 당시에 세종이 신하들의 반대와 만류를 그대로 받아들였다면, 오늘날 세계 최고의 문자 한글은 만들어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목표를 정할 때까지는 끊임없이 의논하고 토론하나, 결론을 내면 끝까지 밀고 나가는 세종의 리더십은 우리에게 큰 교훈이 됩니다.

위에서 얘기한 세종대왕이나 워런 버핏이 소통의 달인이라 할지라도 ‘기술’만으로 소통을 원활히 했던 것은 아니었겠지요. 진정성과 상대에 대한 존중이 깔려있지 않았을까요? 따라서 소통의 전제조건은 역지사지의 자세와 쌍방향 대화의 작동에 있습니다. 내가 필요한 것만 선택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소통을 가로막는 저해 요인일 것입니다. 입장의 차이는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이라는 인식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생각의 숫자는 지구촌 총인구의 숫자와 같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사람들의 생각은 제각각 다를 수 있고, 생각 자체가 변할 수도 있습니다. 원활한 소통 과정을 통하여 알게 모르게 상대방의 생각과 주장을 일부라도 수용하게 된다면 이는 자연히 합의의 실마리가 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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