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경석의 단상] 추엽상전락춘화우후홍

‘초윤장산’ 소고

홍경석 편집위원 승인 2022.09.08 14:43 의견 0

얼마 전 난생처음 제주도에 다녀왔다. 다른 사람들은 몇 번이나 다녀온 관광지라고 한다. 하지만 나로서는 정말이지 그동안 단 한 번도 제주도 구경을 못 했다. 마음대로 여행을 할 수 없는 이유는 파도처럼 넘실댄다.

비단 코로나 사태의 장기화뿐 아니라 경제적 부분이 가장 크게 작용한다. 가뜩이나 먹고살기에도 급급하거늘 팔자 좋게 무슨 여행이란 말인가. 여행은 보고, 먹고, 즐기는 과정이다. 움직이는 순간마다 돈이 들어간다.

물론 여행을 이렇게 경제적 측면으로만 자로 재듯 따진다면 곤란하다. 그렇지만 현실은 현실이다. 근사하게 양복까지 차려입은 신사가 요릿집 문 앞에서 매를 맞고 있다. 원인은 한 가지, 돈이 없기 때문이다.

들어갈 땐 폼을 내어 들어갔지만 나올 적엔 사정이 180도 달라졌다. 모처럼 배가 터지라 고급 술까지 실컷 먹었는데 요릿집을 나올 방책이 전무하다. 돈이 없어 쩔쩔매다가 궁여지책으로 도출해낸 방법은 36계 줄행랑.

결국 그는 뒷문으로 살금살금 도망치다가 그만 요릿집 관계자에게 잡히고 만다. 무전취식(無錢取食) 혐의로 비 오는 날 먼지 나도록 두들겨 맞는다. 가요 ‘빈대떡 신사’에 등장하는 풍자다.

한 푼 없는 건달은 여행마저 사치다. 그렇지만 ‘여행은 다리가 떨릴 때 가는 것이 아니라 심장이 떨릴 때 가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맞는 말이다. 더 늙어서 거동조차 힘든 상황이 닥친다면 그로부터 여행은 그야말로 화중지병이 되고 만다.

백구과득(白駒過隙)이란 고사성어가 있다. 흰 말이 빨리 달리는 것을 문틈으로 본다는 뜻으로, 인생이나 세월이 덧없이 짧음을 이르는 말이다. 하여간 문인 시상식 행사와 취재가 겹치면서 2박 3일 일정으로 오매불망했던 제주에 들어갔다.

덕분에 각종 산해진미와 멋진 바다풍경까지 흡족하게 즐기니 여한이 없다는 느낌이었다. 9월 8일엔 백로(白露)가 찾아온다. 백로는 ‘흰 이슬’이라는 뜻이다. 이때쯤이면 밤에 기온이 이슬점 이하로 내려가 풀잎이나 물체에 이슬이 맺히기 시작한다.

가을의 기운이 완연히 나타나는 시기라 볼 수 있다. 이와 동격인 추엽상전락춘화우후홍(秋葉霜前落春花雨後紅)은 ‘가을 잎은 서리 앞에서 떨어지고, 봄꽃은 비 온 뒤에 붉음’을 나타내는 말이다.

따지고 보면 계절은 그만큼 빠르다. 우리네 인생처럼 그렇게. 덩달아 초윤장산(礎潤張傘)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밖에 나가기 전 주춧돌(礎)에 습기(潤)가 젖어 있으면 비가 내릴 징조이니 미리 우산(傘)을 준비(張)하라는 뜻이다.

여행이든 인생이든 매사 미래를 준비하면서 빠짐없는 행장(行裝)을 꾸리라는 의미에도 부합된다. 어쨌든 처음으로 경험한 제주 여행은 오늘을 더욱 알차게 충전하는 ‘유쾌 상쾌 통쾌’의 과정이었다.

저작권자 ⓒ 시사저널 청풍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