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기 칼럼] 가을단상-삶이란 무엇인가?

이창기 총재 승인 2022.10.12 13:40 의견 0

사람은 왜 사는가?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보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는 이유는 양면적이며 다양하고 복잡하다. 그래서 법륜스님은 왜 사는가에 대한 질문에 ‘그냥 태어났으니까 사는 거다’라고 일갈한다. 그러면 사람은 무엇을 위해 사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도 수많은 선현들과 지식인들이 다양한 답을 제시하고 있다. 이를 정리해보면 첫째로 노예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오로지 먹기 위해 산다. 노예는 자유도 사랑도 추구할 수도 없고 추구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통제에 익숙해져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고 나의 안전과 생존 이외에는 관심이 없다. 그들에게서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나 사랑을 기대할 수 없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인간에게는 본성과 본능이 존재하는데 하늘이 인간에게 주신 착한 본성이 있다면 오로지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는 동물과 같은 본능이 있다고 설파하셨다. 그러므로 노예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오로지 본능에 충실할 뿐이다. 둘째로 자유만을 갈구하는 거지와 같은 삶을 추구하는 사람도 있다. 거지는 먹는 거야 쓰레기통을 뒤져서 적당히 끼니를 해결하면 되고 무엇으로부터도 자유롭게 살기를 원한다. 거지에게는 가족도 필요 없고 이웃에 대한 사랑도 없다. 심지어 노숙자들을 쉼터에 데려다 놓으면 뛰쳐나가서 다시 노숙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게 아닌가. 셋째로 사랑을 먹고 사는 사람들이 가장 보편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일 것이다. 공자가 말하는 인(仁)도 사랑이요 부처가 말하는 자비(慈悲)도 사랑이며 예수는 사랑을 으뜸으로 여겼다. 심지어 성경책 구약과 신약을 한 단어로 요약하면 사랑이라고 하지 않던가. 사랑은 네 가지 의미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하느님이 종족 번식을 위해 주신 본능적인 에로스적 사랑, 부모가 자식을 위해 베푸는 무조건적인 희생을 의미하는 아가페적 사랑, 예수와 제자 사이에 존재하는 우정 같은 필리아의 사랑, 가족 간에 끊을 수 없는 스토르게 사랑 등이 있다. 물론 보봐르와 샤르트르와 같은 정신적인 사랑을 의미하는 플라토닉 러브도 있긴 하다. 어쨌든 사랑은 인간이 추구하는 최고의 가치임에 틀림없다. 먼저 나를 사랑하고 내 가족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고 더 나아가 지구 저 반대편에서 고통받는 알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보내는 것도 사랑이다. 성경에도 예수가 제자 베드로에게 한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는 말의 뜻은 네 자신에 머물지 말고 심지어 네 가족을 넘어서서 세상의 모든 이를 네 가족으로 삼고 그들의 행복을 위해 그물을 던지라는 사랑의 메시지였다. 일찍이 영국의 철학자 버트란트 럿셀은 “착한 삶이란 지식에 의해 인도되고 사랑에 의해 고무되며 연민으로 완성된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이처럼 살아가는 데 있어서 필요한 세 가지 덕목은 죽을 때까지 모르는 것을 깨우치기 위해 학습하는 것이고 나와 내 이웃들에게 사랑을 나누면서 기쁨을 얻고 나보다 더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에게 베풀고 나누는 가운데 보람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100세를 넘겨 살고 있는 김형석 교수도 행복이란 강의에서 “100년을 살아보니 행복이란 진리에 대한 그리움, 겨레를 위한 마음, 그리고 어려울 때 사랑이 있었기에 행복했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가치 없는 대상까지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라는 얘기는 아니다. 불의와 부정한 것까지를 사랑해서는 안 된다. 수잔 울프는 ‘진정한 삶이란 가치 있는 대상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충고를 좌시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따라서 행복한 삶이란 바른 지식을 사랑하고 나와 내 가족을 옳게 사랑하고 이웃을 고르게 사랑하는 것이라고 작은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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