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태 칼럼] 역사의 강물이여

김형태 박사 승인 2022.10.12 13:41 의견 0

강물은 끊임없이 흘러간다. 한번 흘러가면 되돌아오지 않는다. 강물을 거슬러 연어의 고향을 떠올려 볼 수도 있고 강물을 따라가 바다를 그려볼 수도 있다. 역사의 흐름을 따라가 보자. 태산을 만나면 돌아가고, 폭포를 만나면 곤두박질도 치면서 기름진 벌판을 누려보기도 한다. 우리 민족의 한 많은 역사를 강물 따라 살펴보기로 하자.

“우리들에게도/생활의 시대는 있었다.//백제의 달밤이 지나갔다,/고구려의 치맛자락이 지나갔다,//왕은,/백성들의 가슴에 단/꽃.//군대는, 백성이 고용한/문지기.//앞마을 뒷마을은/한식구,/수레로 노동을 교환하고/쌀과 떡, 무명과 꽃밭을/아침 저녁 나누었다.//가을이면 영고, 무천,/겨울이면 씨름, 윷놀이,/오, 지금도 살아있는 그 흥겨운/농악이여.//시집가고 싶을 때/들국화 꽂고 꽃가마,/장가가고 싶을 때/정히 쓴 이슬 마당에서/맨발로 아가씨를 맞았다.//아들을 낳으면/온 마을의 경사/딸을 낳으면/이웃마을까지의 기쁨,//서로, 자리를 지켜 피어나는/꽃밭처럼,/햇빛과 바람 양껏 마시고/고실고실한 쌀밥처럼/마을들은 자라났다.//지주도 없었고/관리도, 은행주도,/특권층도 없었었다.//반도는,/평등한 노동과 평등한 분배,/능력에 따라 일하고/필요에 따라 분배,/그 위에 백성들의/축제가 자라났다.//늙으면 마을 사람들에 싸여/웃으며 눈감고/양지바른 뒷동산에 누워선, 후손들에게/이야기를 남겼다.//반도는/평화한 두레와 평등한 분배의/무정부 마을/능력에 따라 일하고/필요에 따라 분배,/그 위에 청춘들의/축제가 자라났다.//우리들에게도 생활의 시대는 있었다.//언제부터였을까,/살림을 장식하기 위해 백성들 가슴에/달았던 꽃이, 백성들 머리 위로 기어올라와,/쇠 항아리처럼 커져서 백성을 덮누르기/시작한 것은//언제부터였을까, 산짐승과 유한약탈자/쫓기 위해 백성들 문밖 세워뒀던 문지기들이,/안방에 기어들어와 상전노릇 하기/시작한 것은,//이조 5백 년의/왕족,/그건 중앙에 도사리고 있는/큰 마리낙지.//그 큰 마리 낙지 주위에/수십 수백의 새끼 낙지들이 꾸물거리고 있었다/정승배, 대감마님, 양반나리, 또 무엇//지방에 오면 말거머리들이/요소요소에 웅거하고 있었다/관찰사, 현감, 병사, 목사,/마을로, 장으로/꾸물거리고 다니는 건 빈대,/봉세관, 균전사, 전운사, 아전, 이속, 관세위원/그들도 벼슬은 벼슬이었다.//벼슬자리란 공으로 들어오지/않는 법,/밑천을 들였으면/밑천을 뽑아야,//그리고 지금이나/예나, 부지런히 상납해야/모가지가 안전한 법,//그래서 큰 마리낙지 주위엔/일흔 마리의 새끼 낙지가,//일흔 마리의 새끼낙지 산하엔/칠백 마리의 말거머리가,//칠백 마리의 말거머리 휘하엔/만 마리의 빈대 새끼들이,//아래로부터, 옆으로부터,/이를 드러내놓고 농민 피를 빨아/열심히, 상부로 상부로올려 바쳤다.//큰 마리낙지는/그럼 혼자서 살쪘나?//오늘, 우리들 책 끼고/출근 버스 기다리는 독립문 근처/상전국 사신의 숙소 모화관이 있었다./지금으로 말하면/무슨 호텔, 아니면 무슨 대사관,//해마다 왕실은/33만 냥의 금은보활,/청나라 황실에 상납./그리고 37만 냥의 돈 들여/상전국 사신, 술과 고기와 계집으로 접대했다. …(이하 생략)”

(신동엽/금강 제6장)

E. H. Carr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정의했고 단재 신채호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가 없다”고 했다. 미래는 주춤주춤 다가오고 현재는 쌕쌕 지나가고 과거는 바로 등 뒤에서 아른거린다. 그래서 통시적인 시간이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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