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일의 시평] 불쑥, 불혹 / 유정이

박승일 승인 2022.12.09 13:48 의견 0

길 안쪽에 엎어졌는데

몸 일으키니 길 바깥이었다

어디로든 나갔다 생각했는데

둘러보니 부엌이었다

밥물은 끓어 넘치는데 아이들은

밖으로 나가는 열쇠가 없어

울고 서 있었다

생각을 일으켜야겠는데

오래 입은 옷들이

발을 걸었다 호호호

내가 네 엄마가 맞단다

어서 문 열어주렴 꽁꽁 닫힌

문 속으로도 언제나 불쑥

들어와 있던 엄마가

베란다 바깥 허공을 따고 있었다

밖으로 나가는 엄마를 붙잡아야겠는데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엄마가 내 소리를 파먹은 게 분명해

거실에 넘어졌는데

눈 뜨니 부엌이었다

밥물은 끓어넘치는데

오래 입은 옷이 열쇠를 흔들며

호호호 웃고 있었다 돌아보니

마흔이었다

세상의 길은 모두 바깥을 향했는데 내 세상은 오로지 집 안과 부엌. 어디로든 나갔다 생각했는데 둘러보면 케케묵은 유령들이 나를 사로잡고 있을 뿐, 한정된 일상과 관습을 벗어나기 어렵다는 자조와 더불어 어느새 불혹.

저작권자 ⓒ 시사저널 청풍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