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일의 시평] 극빈 / 문태준

박승일 승인 2023.01.06 15:19 의견 0

열무를 심어 놓고 게을러

뿌리를 놓치고 줄기를 놓치고

가까스로 꽃을 얻었다 공중에

흰 열무 꽃이 파다하다

채소밭에 꽃밭을 가꾸었느냐

사람들은 묻고 나는 망설이는데

그 문답 끝에 나비 하나가

나비가 데려온 또 하나의 나비가

흰 열무 꽃잎 같은 나비 떼가

흰 열무 꽃에 내려앉는 것이었다

가녀린 발을 딛고

3초씩 5초씩 짧게짧게 혹은

그네들에겐 보다 느슨한 시간 동안

날개를 접고 바람을 잠재우고

편편하게 앉아 있는 것이었다

설핏설핏 선잠이 드는 것만 같았다

발 딛고 쉬라고 내줄 곳이

선잠 들라고 내준 무릎이

살아오는 동안 나에겐 없었다

내 열무 밭은 꽃밭이지만

나는 비로소 나비에게 꽃마저 잃었다

지독한 가난은 아름다움 혹은 가진 것에 대한 집착마저 잊게 한다. 꽃의 주인이었다가 그 꽃마저 나비에게 건네주고는 결국 빈손이 되고 마는 가난의 극한 아름다움.

문태준 | <아침은 생각한다>, <가재미>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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