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일의 시평] 다시 봄이 왔다 / 이성복

박승일 승인 2023.04.05 13:42 의견 0

비탈진 공터 언덕 위 푸른 풀이 덮이고 그 아래 웅덩이 옆 미루나무 세 그루 갈라진 밑동에도 푸른 싹이 돋았다 때로 늙은 나무도 젊고 싶은가 보다

기다리던 것이 오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누가 누구를 사랑하고 누가 누구의 목을 껴안 듯이 비틀었는가 나도 안다 돼지 목 따는 동네의 더디고 나른한 세월

때로 우리는 묻는다 우리의 굽은 등에 푸른 싹이 돋을까 묻고 또 묻지만 비계처럼 씹히는 달착지근한 혀, 항시 우리들 삶은 낡은 유리창에 흔들리는 먼지 낀 풍경 같은 것이었다

흔들리며 보채며 얼핏 잠들기도 하고 그 잠에서 깨일 땐 솟아오르고 싶었다 세차장 고무 호스의 길길이 날뛰는 물줄기처럼 갈기갈기 찢어지며 아우성치며 울고불고 머리칼 쥐어뜯고 몸부림치면서……

그런 일은 없었다 돼지 목 따는 동네의 더디고 나른한 세월, 풀잎 아래 엎드려 숨죽이면 가슴엔 윤기나는 石炭層이 깊었다

변화 없는 삶, 어쩌면 위기의 시대 이성복은 근거를 잃어가는 듯한 우리의 삶. 서러움, 치욕 등 일상에 절절이 드러난 고통들을 시인이 격투기 선수를 이겨버리듯 내던져버린다. 죽은 나무와 파묻힌 돌들 얼마나 버텨내야 윤기 나는 석탄이 되는 것인가?

이성복(1952~)
<남해금산>, <그 해 여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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