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희 작가의 추억의 뜰] 1942년 정옥순

전쟁터의 꽃이 아닌 영웅, 별이라도 달아드려야 하는 훈장 같은 날

김경희 작가 승인 2023.07.11 15:16 의견 0

그녀들은 전쟁터의 꽃이 아니었다. 매 순간 목숨을 담보로 나라를 지켜낸 영웅들이었다. 별이라도 달아드려야 하는 훈장 같은 날들이 계속 되던 영웅의 이야기다. 치매가 시작된 정옥순 중령님. 일상의 기억은 사라지고 있지만 간호장교 시절의 애환과 사명감은 박제되어 기억을 뛰어넘었다.


■ 전쟁터, 내 삶의 변곡점이 되다

1965년 월남전에 참전해서 나트랑에 도착했다. 습기를 잔뜩 머금은 공기에 피비린내가 섞여 막사에 도착하자마자 똥물까지 다 토해내며 신고식을 해버렸다. 눈앞이 깜깜했다. 어머니가 식음 전폐 하면서 말린 월남 행이었다. 무모하다는 말로도 딱히 모면할 수 없는 행보였다. 나는 1965년 7월부터 이듬해 9월까지 파월 의료지원단으로서 아비규환의 베트남 전장에서 부상 장병들을 치료했다.

3일째 되는 날

앞마을은 폭격으로 아비규환이 되었다. 죽음의 공포가 밀려와 24세의 나는 정신 줄을 놓지 않으려고 내내 내 뺨을 후려쳤다. 계속 되는 구토와 어지럼증으로 하루하루 버텨내기가 너무 힘들었다. 겨우 정신을 차릴 즈음 다시 나를 마음의 死地(사지)로 몰아넣었던 그날을 잊을 수가 없다.

부상병들은 연일 속출했지만 그 청년은 내 인생에 가장 충격적인 날로 기억될 그 날의 장본인이었다. 악! 비명소리가 몰고 온 죽창에 허리를 찔려 온 몸이 피범벅이 된 스무 살 청년! 동공이 풀린 채 병원으로 이송 된 병사는 게릴라 작전을 펼치던 베트콩들에게 무차별 공격을 당하고 목숨만 겨우 붙은 채로 실려 온 것이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그 병사가 온몸이 썩어가면서 죽어가는 모습을 5일내내 고스란히 지켜본 후 열흘 동안 아무것도 먹을 수 없었다. 남동생 또래의 그 청년이 숨을 거두는 것을 지켜보고 오열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 죽음을 지켜본 후 나는 내 정신이 아니었다.

6개월간 생리도 하지 않았다. 나약한 내 자신에게 환멸의 오명을 덮어씌울 즈음 내 앞에 나타난 박 대위님.

얼굴이 하얀 그 남자는 작은 키의 다부진 남자였다. ROTC 3기였던 박 대위는 병사들에게도 형님 같은 분이라 월남에 온 갓 스무 살의 청년들에게 그보다 큰 위로가 없었다. 우리 간호장교들 또한 그 분의 존재만으로도 위로가 되고 힘이 되었다. 청춘 남녀들이 모여 있는 전쟁터,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사랑이 싹트리라고는 짐작도 할 수 없었는데 내가 그 짐작 할 수 없는 러브 스토리의 주인공이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매일 쏟아지는 부상병들, 그리고 부상으로 고통 받다 결국 죽음과 만나던 군인들이 내가 만나는 세상의 전부였다. 돌이킬 수 없다면 나는 그 전쟁터에서 살아남아야 했고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고 덜 고통 받게 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어느새 내 의식 속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상당히 고무적인 현상이었다. 마음의 중심이 사명감으로 옮겨가는 잣대는 박 대위님이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그 남자는 그렇게 나에게 다가왔고, 우리는 그 포탄이 작열 하는 그곳에서 서로 위로가 되고 그 위로가 발아되어 사랑으로 가지를 뻗고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나는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그가 내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

■ 파국, 아, 고엽제

베트남은 연중 습한 날씨로 무더위와 싸워야 하는 어려움에 직면했다.

후덥지근한 날씨가 연일 계속 되던 때 어느 날 시원한 빗줄기가 막사위로 떨어지면서 다들 비를 맞으러 나갔다. 두두둑 빗소리가 유난히 거칠다고 생각했다. 우박인가 하고 손으로 받아보니 손바닥에 얕게 고인 빗물이 섬뜩했다. 그때는 이유를 몰랐다. 나는 곧 막사로 돌아왔다. 밀림에 들어가 작전 중이던 군인들은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우박을 고스란히 맞고 다시 막사로 돌아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날의 우박을 맞았던 군인들이 고통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피부에 반점이 생기고 호흡도 거칠어지면서 부대 안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바로 고엽제!

밀림을 초토화 시켜서 게릴라 전법으로 우리를 괴롭히던 베트콩들을 몰살하겠다는 분노가 고스란히 우리들에게 피해로 돌아왔다. 50년 전의 그 한줄기 우박이 한 사람을 사지로 몰아넣고 다시 그 가족까지 피폐하게 만든 전쟁이 낳은 비극의 신호탄이었다.

이렇게 오랜 시간 파국을 몰고 올 지 어쩌면 그들도 짐작하지 못했을 수도 있겠지만, 밀림을 초토화시키는 그 엄청난 파괴력의 고엽제가 연약한 사람을 사지로 몰아넣을 거라는 생각을 못했다면 그 또한 인간이 얼마나 진인한지 속살을 드러내는 결과물이다.

고엽제로 인한 후유증이 있거나 의심이 되는데도 정부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끙끙 앓다가 돌아가시는 분들을 보면 가슴 아픈 기억을 넘어 통탄 할 수밖에 없다. 전쟁의 희생양이라는 말은 그 분들의 죽음과 고통을 전혀 달래주지 못하고 아픔만 배가 시키는 말이다.

헬기에서 사정없이 뿌려대는 고엽제는 피아(彼我)를 가리지 않고 무방비로 확산됐다. 간호장교들이 아군·적군을 가리지 않고 치료에 나섰지만 역부족이었다. 고엽제의 비극은 당대를 넘어 후대에 까지 대물림되는 고통을 고스란히 감수해야 한다.

60년 전 전쟁터에서 시원한 소나기처럼 쏟아졌던 고엽제, 아직도 끝을 내지 못한 숙명 같은 과제가 되었다.

■ 간호장교의 싹, 아픈 사람이 항상 나의 관심사였던 유년시절

파월에서 만난 나의 구세주 박 대위는 훗날 나의 남편이 되었고 우리는 전쟁터에서 꽃피운 사랑이 열매를 맺고 3남매를 낳았다.

남편은 베트남에서 내가 힘들어 할 때마다 바로바로 알아차리고 손 편지를 써서 나한테 슬며시 쥐어주곤 했다. 꼬기작 꼬기작 접혀있던 종이를 펼치면,

‘힘 내세요.’, ‘끼니 거르면 안 돼요.’, ‘힘들면 잠시 쉬어요.’

라는 글씨들이 적혀 있었다. 내 눈에는 내용은 다르지만 모두 ‘사랑합니다.’라고 쓰여 있어서 한 마디 한 마디 내가 견디는 힘이 되었다.

나는 1년7개월 간 베트남에서 근무하고 먼저 서울로 돌아와 국군통합 병원에서 또 다시 현장 업무를 계속 하게 되었다. 숨 한번 제대로 쉬기 힘든 전쟁터는 아니었지만 지뢰사고를 당한 군인들을 보면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사명감은 또 다시 불타올랐다. 남편도 본국으로 돌아오고 우리는 결혼이라는 아름다운 결실을 맺었다. 막내아들이 아버지의 대를 이어 ROTC로 임관해서 경기도 연천에서 대령으로 근무 중이다.

우리 인생의 변곡점이었고 고단한 날들이었지만 그 속에서 우리는 사랑을 키우고 우리 사랑의 열매인 아들도 현역장교로 근무하고 있는 군인가족이다.

베트남은 내 청춘의 아픔이고 슬픈 기억을 갖고 있지만 아름다운 추억도 같이 소장할 수 있게 만들어준 전쟁터이기도 했다.

학창시절에도 간호사의 꿈이 있어서 마을에서 놀다가 무릎이 까져 피가 나는 친구들을 보면 먼저 뛰어가 손수건으로 무릎이라도 먼저 묶어주던 아이였다.

명절 다음날 어김없이 내내 채소만 먹던 뱃속이 고기며 기름진 전을 만나 배탈이 나는 건 연중행사 같은 서민들의 일상이었다. 나는 배탈 났던 가족들에게 간장 종지그릇에 매실을 부어서 꼭 마시게 했다. 따로 배운 건 아니지만 매실이 복통이나 소화에 좋은 역할을 할 것 같아서 내 나름의 비방처럼 식구들에게 주곤 했다. 식구들은 다들 속이 편해지면서 나보고 의사 선생 되라고 한마디씩 거들곤 했다.

집안 형편상 의대에 진학은 못했지만 간호사관학교에 입학하게 된 작은 단초가 됐고 그런 추억들이 나를 간호장교로 이끌고 월남전까지 가게 만든 건 부인할 수 없는 인생 행보다.

인생의 총체적인 그림은 점으로 연결되어 있다. 내가 뿌린 씨앗들이 발아하는 과정이 우리 인생의 한 축 한 축을 지탱하면서 삶의 궤적이 쌓인다. 우리 삶의 씨앗 한 톨도 함부로 심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오늘 뿌려진 씨앗이 훗날 어떤 열매로 우리 곁에 설지 자못 궁금하다.

여름이면 60년 전 그 습하고 무더웠던 베트남의 기억이 피부에 고스란히 묻어난다.

전쟁터로 내내 기억됐던 베트남을 가족들과 여행 장소로 다시 만나면서 아름다운 이면을 볼 수 있었다. 우리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나 또한 오열하면서 환멸을 맛보았던 그 전쟁터가 남편을 만나는 가교가 되었고 내 삶의 변곡점이 되었듯이 우리 인생은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다. 우리는 매일매일 최선을 씨앗을 뿌리고 아름답게 발아하기를 바라면서 또 최선의 노력을 구가하는 것이 우리가 인생을 대하는 책임감 있는 자세다. 고통 또한 다 지나가고 그 속에서 우리는 인생의 참 맛을 또 배우게 된다. 누군가 내게 전했던 과한 칭찬이 유난히 기억되는 날이다.

“별이라도 달아드려야 하는 훈장 같은 날들을 사셨어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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