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희 작가의 추억의 뜰] 여든두 해, 자존심을 지켜낸 자화상, 1943년 김옥임

김경희 작가 승인 2023.08.09 14:25 의견 0

무명천에 수를 놓습니다. 보드라운 비단은 아니지만 무명천에 얼기설기 놓인 자수, 목단꽃으로 피어납니다. 한 땀 한 땀 꽃잎을 만들어가는 무명천 위의 꽃 자수.
뒷면은 얼기설기 엉킨 씨줄 날줄로 어머니의 고단한 인생의 단면과 닮았습니다. 간간이 손마디를 바늘에 찔려 아리한 통증으로 따끔합니다. 그 또한 어머니의 삶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렇게 어머니는 긴 세월을 한순간처럼 살아오셨습니다.
무명천 위에 자수로 오롯이 피어난 어여쁜 목단꽃을 피웠내셨습니다.
어머님이 바로 목단꽃입니다.

아홉 살 무렵

■ 식은땀 흘리던 열 살 계집아이

옥분, 옥순, 옥희, 대식, 대철, 옥임, 대국이 우리 부모님 슬하의 한 핏줄이었던 7남매.

얼마 만에 불러보는 이름인지. 여섯째인 나와 막내 대국이만 이 세상 사람이니 긴 세월을 살아오긴 했다. 불어터진 칼국수 서로 먹겠다고 젓가락질해대던 저녁 밥상머리 추억이 엊그제 같은데 내 위로는 다들 이 세상이 사람이 아니다.

없는 살림에 7남매가 하루 한 끼, 쌀밥은 제사 때, 명절 때나 구경했지만 시절을 야속하다 할 수도 없고 가난한 삶이 우리가 사는 인생인줄 알고 살았다.

초등학교 3학년을 다니다가 잠결에 폭탄 소리를 듣고 큰 언니 품으로 숨어 들어가면서 6·25 전쟁을 만났다.

놀란 가슴을 진정할 새도 없이 우리 아홉 식구는 피란길에 올랐다. 할머니는 집을 지키겠다는 신념이 너무 완강하셔서 우리는 대문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뒤를 바라보면서 마을을 빠져나왔다. 뜨거운 여름날 피란길은 아홉 살 여자아이가 무심히 넘기기엔 여간한 고통이 아니었다. 게다가 등에는 막냇동생 대국이를 업었다. 아들 하나 더 본다고 터울지게 낳은 막내라 내내 칭얼거려 전쟁보다 등에서 식은 땀 나게 하는 남동생이 더 고역이었다.

더운 날씨에 포대기로 둘둘 말아놓았더니 네 살짜리는 애꿎은 내 머리만 쥐어뜯으면서 뜨거운 여름날의 행군에 아우성을 했다.

내려놓으면 걷지 않겠다고 칭얼대고 등에 업혀놓으면 내려놓아라 성화다.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 할지 모르지만 하여튼 막내 대국이는 내 몫이었다. 그런데 사람은 또 그렇게 살아진다. 피란길에 다들 목숨 부지하고 집으로 돌아왔더니 할머니는 홀로 집을 굳건하게 지키고 계셨다. 할머니를 부둥켜안고 밤새 울던 아버지 울음의 속내를 알기까지는 꽤 긴 시간이 흘렀다. 아마 시집갈 무렵에 그 울음의 깊이를 알 수 있었다. 부모님과 떨어져 나만의 인생을 새로 시작해야 하는 그 시점이 돼서야 짐작할 수 있었다.

이제 팔순이 넘어 그 시절을 회상하면 ‘어느새 여기까지 왔을까?’라며 나에게 묻는다.

그리고 “여기까지 잘 왔어.”라고 나에게 화답한다. 어느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는 나만 들을 수 있는 화답이다.

그 사이 고인 눈물에는 돌아가신 부모님, 먼저 간 언니 오빠들 얼굴이 보인다.

사람은 또 그렇게 살아진다.

스무 살의 나

■ 서른여섯, 3남매와 세상 한복판에 남겨지다

스무 살에 이모부의 중신으로 스물네 살 남편과 수줍은 만남을 하고 소꿉장난처럼 결혼 생활을 시작했다. 남편은 중학교 교사로 작은 소읍에서 평범함 아버지이며 남편으로 흠 잡힐 일이 없는 심성이 좋은 사람이었다.

평소에 기침을 유난히 많이 하던 남편은 학교에서 유난히 판서를 많이 하는 선생이라 칠판에 백묵으로 글씨를 많이 써서 그러려니 무심히 넘기고 또 넘겼다.

용각산이 명약인 듯이 용각산을 달고 살았다. 뚜껑 열고 손톱만 한 숟가락으로 가루를 덜어내면 살포시 날리는 가루가 내 보기에는 백묵처럼 보였는데 그것이 암울한 징조였나 보다.

남편 나이 서른아홉 살, 7월 말 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던 날이었다. 마당 한복판 평상에서 저녁을 먹고 수박 한 덩이를 잘라 여섯 식구가 먹었다. 펌프질해서 길어 올린 지하수에 담가놓은 수박이라 시원하고 달달한 맛은 당시 최고의 후식이었다. 다들 포만감으로 기분 좋을 즈음……. 남편이 갑자기 기침을 연거푸 하더니 눈동자가 풀리면서 평상 밑으로 곤두박질쳤다.

우리는 혼비백산하여 어쩔 줄 모르고 있었는데 막내가 옆집 이장님을 모셔왔다. 이장님이 남편을 일으켜 세웠더니 그사이 얼굴이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남편은 병원에 갈 시간도 없이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고 우리와 연을 끊었다. 모질고 야속한 사람……. 우리의 통곡 소리가 옆 마을까지 그 밤을 내내 덮고 말았다.

그렇게 남편은 생의 한가운데 길모퉁이를 돌며 중년의 뜰 앞에서 먼저 고단한 삶과 연의 고리를 떨쳐냈다. 나는 홀로 3남매와 망망대해에 던져졌다.

그 이후로 줄곧 인생의 파도를 헤엄쳐왔다.

폭풍우 쏟아지는 날, 소리 없이 햇살 가득한 날들이 모여 여기 향기로운 꽃이 피었다. 시름에 풀썩 주저앉으려면 어미 뒷모습만 바라보는 딸들, 돌아서면 한 뼘씩 자라는 아들이 나를 일으켜 세웠다. 자식 건사에 손품, 발품 팔기를 망설이지 않았고 같이 울고 웃으며 서로에게 나침반이 되었던 3남매.

가진 것도, 배운 것도 없는 서른여섯 살의 여자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인형공장에서 눈을 끼우고, 만두 공장에서 만두 속을 넣고 돈벌이가 될 만한 건 내 재주가 일천하니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입에 풀칠하면서 육성회비는 한 번도 밀리지 않았다. 나의 자존심이며 우리 아이들의 자존심이기도 했다.

3남매 대학 보낼 형편이 안 돼서 고등학교까지만 가르치고 나는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이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고 하루하루 열심히 남한테 아쉬운 소리 안 하면서 살아왔더니 아이들도 스무 살 이후의 인생은 스스로 길을 만든다고 마음의 다짐을 하고 있었다.

50년 전 우리 가족사진

■ 자존심을 지켜낸 자화상

딸들도 여상 졸업하고 말단 공무원으로 시작하더니 야간대학 다니면서 대학원까지 마치고 서기관으로 은퇴를 했다. 아들도 한전에서 임원으로 은퇴하고 우리 집에서 10분 거리에 살고 있다. 간간이 자식들과 아침 겸상도 하니 내 인생에 이런 늦복이 찾아올 줄은 짐작도 못 했다. 고단한 시절을 보낼 때는 그저 하루하루 살아내는 데 급급해서 하루살이 인생이었다. 이제 자식들이 주는 용돈으로 어디 가든 지갑 열어서 내가 밥값을 내니 외출 준비하면서 꽃가라 블라우스 찾아 입는 맛이 기가 막히다.

자식들 눈가에도 주름이 하나둘 늘어난다. 내 인생의 겨울이 도래했다는 말이지만 살을 에는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따뜻한 뒷심은 지난 삶에 자존심을 지킨 내 자화상이 고왔던 까닭이라고 말한들 흠 잡힐 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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