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일의 시평] 선인장 꽃기린 / 유정이

박승일 승인 2023.09.06 16:42 의견 0

꽃이란 꽃은 모두 스스로 쥐어짠 상처라는군

꽃이 웃고 있다고 믿는 건 오해라는군

가만히 보면 곧 울어버릴 것 같은 게

꽃의 얼굴이 아니냐구!

만개하는 울음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서둘러 입을 닫느라 몸에 돋은 가시들

그 상처의 소리 들리네

누군가 남겨 놓고 간

쓰디쓴 서약을 아직도 삼키고 있지

온 몸 가득 수천 개의 달이

떠오르다가 지고

길을 따라 느리게 걸어 온 날들이

꽃으로 피면

아무도 모르게 오래 앓고 난

푸른 글씨의 엽서를 쓴다네

혼자 지은 집 담벽이 붉고 붉네

고난의 깊이를 간직한 꽃. 그럼에도 일 년 내 꽃을 피우는 그러므로 꽃은 피는 게 아닌 만개하는 울음. 온몸 가득 수천 개의 달이 뜨고 지는 혼자 지은 담벽이 붉고 붉은, 즉 고통 없이는 꽃을 피울 수 없다는 선인장 꽃기린 시인의 깨달음이다.

유정이
시집 <내가 사랑한 도둑>, <선인장 꽃기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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