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태 칼럼] 9월의 시어(詩語)

김형태 박사 승인 2023.10.12 15:04 의견 0

김형태 박사(한남대학교 14-15대 총장)

덥지도 춥지도 아니한 삽상한 9월. 하늘은 한껏 드높고, 모든 곡식은 충분히 영글고, 모든 과일은 마지막 단맛을 저장하는 축복의 계절에 어찌 시를 쓰고, 시를 읽는 일이 없을 수 있겠는가? 몇몇 계절 시를 통해 우리들의 정서를 더 따뜻하게, 더 부드럽게, 더 아름답게 다듬어보자. 사람은 등 따숩고 배만 불러선 만족할 수 없는 존재다. 눈을 들어 하늘도 보고 짓푸른 바다도 보며 때때로 색깔이 변하는 숲의 변화도 느낄 수 있어야 하는 존재다.

① 나 하나 꽃피어/풀밭이 달라지겠냐고/말하지 말아라/네가 꽃피고 나도 꽃피면/결국 풀밭이 온통/꽃밭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나 하나 물들어/산이 달라지겠냐고도/말하지 말아라/내가 물들고 너도 물들면/결국 온 산이 활활/타오르는 것 아니겠느냐 (조동화/나 하나 꽃피어)

② 여름은 다 보내고/차갑게/천천히/오시는군요//사람과 삶에 대해/대책없이 뜨거운 마음/조금씩 식히라고 하셨지요?//이제는/눈을 맑게 뜨고/서늘해질 준비를 하라고/재촉하시는군요//당신이 오늘은/저의 반가운/첫 손님이시군요 (이해인/가을비에게)

③ 하늘 향한 그리움에/눈이 맑아지고/사람 향한 그리움에/마음이 깊어지는 계절//순하고도 단호한/바람의 말에 귀 기울이며/삶을 사랑하고/사람을 용서하며/산길을 걷다 보면//톡, 하고 떨어지는/조그만 도토리 하나//내 안에 조심스레 익어가는/참회의 기도를 닮았네 (이해인/가을편지Ⅰ)

④ 주여, 때가 되었습니다/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해시계 위에 당신의 긴 그림자를 드리우시고/들판 위엔 바람을 놓아주십시오//막바지의 열매들이 영글도록 명하시고/이틀만 더 남녘의 날들을 허락해주십시오/영근 포도송이가 더 완숙하도록 이끄시어/마지막 단맛을 더하게 해주십시오//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지금 혼자인 사람은 오래도록 홀로 남아서/잠들지 않고, 글을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그리고 나뭇잎이 떨어져 뒹굴면/초조하게 가로수길을 헤맬 것입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을날)

독일 시인 릴케(Rainer Maria Rilke/1875-1920)는 1875년 12월 4일 당시 오스트리아 영토였던 프라하에서 태어났다. 20대에 프라하와 뮌헨에서 미술사, 문학사와 역사 철학을 공부했고 평생 동안 유럽 각지를 전전하며 삶의 본질(사랑, 고독, 죽음)의 궁극을 파고들었다.

⑤ 9월이/지구의 북반구 위에/머물러 있는 동안/사과는 사과나무 가지 위에서 익고/대추는 대추나무 가지 위에서 익고/너는/내 가슴 속에 들어와 익는다//9월이/지구의 북반구 위에서/서서히 물러가는 동안/사과는/사과나무 가지를 떠나야 하고/너는/내 가슴을 떠나야 한다 (나태주/9월이)

⑥어제까지는 일렁이는/초록 물결인 줄만 알았는데//오늘은 누런 잎들이/간간히 눈에 띈다//쉼없이 흐르는/세월의 강물따라//늘 그렇듯 단 하루가/지나갔을 뿐인데//하룻밤새 성큼/가을을 데리고 온//9월의 신비한 힘이/문득 느껴진다 (정연복/9월 첫날의 시)

⑦ 향긋한 커피 한잔을 타서/볕이 잘 드는 창가에 앉아/푸른 산을 바라보며//이른 아침의 고요함을 느껴본다//푸른 산에서는/산새들 소리 요란하고/하늘에는 흰구름이 두둥실/땅에서는 가을의 서늘함//달콤한 빵 한 조각에/고운 미소가 흐르고/슬며시 황홀한 기분에/행복한 마음이 된다//9월의 아침은 싱그러움이 넘치고/입가에 맛있는 음악이 흐르고/음악처럼 아름다운 선율에//오늘 하루도 행복하다 (조미경/9월의 아침)

나는 2016년 한남대학교 총장직을 마치면서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고, 강물은 강을 떠나야 바다에 이른다.”며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공수신퇴(功遂身退)를 되뇌었다. ‘떠날 때는 말 없이’를 생각하며 퇴임식도 하지 않고 임기 끝나는 날 일과 끝내고 집으로 퇴근하고 끝냈다. 마치 계절이 소리 없이 바뀌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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