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평용 칼럼] 말로만 하는 ‘민생’은 안 된다

한평용 회장 승인 2023.11.07 13:54 의견 0

정치권은 지금 오로지 ‘민생타령’에 빠져 있다. 여야가 민생이란 단어를 하루라도 하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친 것 같은 형국이다. 대통령도 민생, 야당 대표도 단식투쟁하면서도 민생, 민생 했다.

정말 정치권이 민생을 주업으로 삼은 것인가. 이번 서울 강서구 보선에서 여당 후보가 압도적인 차로 패배한 후 현상이다. 물가는 뛰고 은행이자는 폭등하며 빚에 허덕이는 기업 소상공인들은 미래가 불투명하다.

도대체 민생이란 단어의 정의는 무엇인가. 옛글을 보니 ‘민생이 안정돼야 성군이란 칭호를 얻었다.’고 한다. 봉건국가였던 조선 시대에도 민생이란 용어는 어전의 단골 소재였다.

세종은 항상 어전회의를 하면서 제일 먼저 고난에 처한 백성들의 삶을 주제로 삼았다고 한다. 이는 부왕인 태종이 세자인 세종에게 맡긴 일이기도 했다. 아들에게 임금의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을 가르친 것이다.

지방 관찰사들이 올린 장계(보고서)를 먼저 살폈다. 가뭄이나 수해로 굶주림에 떠는 백성은 없는가, 보따리를 짊어지고 유랑하는 백성은 없는가, 백성들을 수탈하는 탐관오리들은 없는가 이런 문제를 제일 먼저 다뤘다고 한다.

폭정으로 왕좌에서 쫓겨난 연산군, 광해군도 겉으로는 어전에서 민생을 보살펴야 한다고 유시했다. 그러나 연산군은 한양도성 안 초가들이 보기 싫다고 백성들이 눈물을 흘리는데도 수백 호를 모두 헐어버렸다.

광해군도 자신을 왕위에 옹립한 측근 세력 때문에 올바른 정치를 못 했다. 공신들이 국정을 농단하고 뇌물을 수수하며 가난하고 힘없는 백성들을 괴롭혀도 이를 억지하지 못했다. 권신들을 옹호하고 이들의 비위에 편승하다 그만 자리에서 쫓겨났다.

조선 순조 때는 외척인 김 씨 세력이 권력을 잡고 세도정치를 한 시기다. 힘없는 임금은 국정을 바로잡으려 했으나 왕권이 미치지 못했다.

인터넷을 뒤지다 보니 매우 재미난 역사적 사실이 나온다. 당시 영의정이 글을 올려 벼슬을 해임해 달라고 청했다. 순조는 사직 상소를 반려하며 다음과 같이 당부했다.

‘… 민생과 세도(世道)가 모두 수습할 수 없다고 탄식하는데, 영상은 직을 버리고 누구와 함께 다스리겠다는 것인가? 경이 내 말을 외면한다면 실로 평소에 바라던 바가 아니니, 경은 부디 헤아리기 바란다. 좌상이 어제 사직소를 바쳤는데 영상이 오늘 또 해임해 달라고 청하니, 이것이 무슨 일이란 말인가? 내가 부끄러워서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경은 다시는 사직하지 말고 나랏일을 중히 여기기 바란다.’

순조는 세도정치의 폐해로 백성들의 삶이 도탄에 빠져 있는 것을 알면서도 이를 과감히 시정하지 못했다. 올바른 선비들이 모함을 받아 귀양을 가면 모함한 자들의 편에서 분노했다. 이러니 나라에 횡행한 것은 탐관오리와 부정부패 만연이었다. 최고책임자는 측근을 잘 둬야 하며 이들이 경거망동한 일을 하지 않도록 잘 감시해야 한다. 제대로 살피지 못하면 정권이 흔들리고 나라가 위기에 빠진다.

표를 얻기 위해 말로만 하는 민생은 국민을 호도하는 것이다. 실지 국민의 어려운 삶을 살피고 어려움을 해결해주는 구체적인 방법론을 모색해야 한다. 국회가 여야 합의를 못 해 처리하지 못한 민생법안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고 한다. 당리당략에 빠져 국민의 삶을 외면하면서 어떻게 민생, 민생을 외치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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