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일의 시평] 저기 희게 빛나는 것이 / 김박은경​

박승일 승인 2023.11.27 13:29 의견 0

너무 좋아 죽을 것 같은 사랑이 죽이고 싶은 사랑이 어쩌다 죽어버리기라도 하면 다시 그리워지는 그런 게 사랑의 기적이라면

뜨겁던 것이 미지근하던 것이 차가워지는 일이 살아갈 방도를 찾는 사랑의 미덕이라면 수승화강이라 불행 중 다행이 된다면

차갑던 것이 미지근하던 것이 다시 뜨겁게 그렇게 지긋지긋하던 것이 못 견디게 아쉬워서 후회가 가장 큰 후회로 몰아쳐 살아남는 다행이 불행과 다르지 않다면

모두들 돌아오는 저녁에 오지 못하는 단 한 사람 생각에 이제 좋은 일이란 다시없을 것 같아 골목에 선 채 울고 있는 자가 그 사람인지 나인지 묻고 있다면

떠나가기 위해 돌아오는 거라면 끝내기 위해 시작되는 거라면 우연을 만들기 위해 운명을 풀어놓는 거라면 누군가 돌아볼 때마다 익숙한 환청이 떠돌고 있다면

손바닥 위로 어지러이 엉킨 실금 사이로 외등 불빛이 낮게 고여 찰랑찰랑, 늦은 비가 내리기 시작하는 저기 희게 빛나는 것이 있다면

‘있다면’, ‘이라면’ 등 이 가정법들은 살아오며 가장 허무하거나 소용없는 후회일수 있다. 내가 내게 바라던 치열한 혁명과 변화의 바람들, 그러나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그리고는 외등 불빛 낮게 고여 찰랑찰랑 늦은 비 내리기 시작하는 가운데 저기 하나 희게 빛나는 것 있음이여……. 하여 그 또한 막심한 후회를 유발할 조짐이 아닐까?

김박은경 | 서울 출생
시집 <온통 빨강이라니>, <중독>, <못 속에는 못 속이는 이야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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