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일의 시평] 작은 연가 / 박정만

박승일 승인 2023.12.07 16:02 의견 0

사랑이여, 보아라

꽃초롱 하나가 불을 밝힌다

꽃초롱 하나로 천 리 밖까지

너와 나의 사랑을 모두 밝히고

해질녘엔 저무는 강가에 와 닿는다

저녁 어스름 내리는 서쪽으로

유수와 같이 흘러가는 별이 보인다

우리도 별을 하나 얻어서

꽃초롱 불 밝히듯 눈을 밝힐까

눈 밝히고 가다가다 밤이 와

우리가 하나의 어둠이 되어

또는 물 위에 뜬 별이 되어

꽃초롱 앞세우고 가야 한다면

꽃초롱 하나로 천 리 밖까지

눈 밝히고 눈 밝히고 가야 한다면


한 시절 군부 권력이 한 인간의 생을 송두리째 망가뜨렸다. 지독한 고문 가운데 어찌어찌 풀려난 후 남은 기력을 쥐어짜 수백 편의 글을 남긴 시인은 가고 없으나 그의 생과 글은 우리의 가슴 꽃초롱 하나로 광활한 우주 밖까지 길을 밝히게 한다. 시방도 그 꽃초롱은 꺼지지 않은 걸까?

박정만 (1946~1988)
<잠자는 돌>, <맹꽁이는 언제 우는가>, <무지개가 되기까지는>, <서러운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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