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태 칼럼] 12월에 읽는 시

김형태 박사 승인 2024.01.09 15:53 의견 0

기독교 신앙인이라면 매일은 몰라도 1주일에 서너 번은 주기도문을 암송할 것이다. 기도를 가르쳐달라는 제자들의 요청에 대해 예수님이 직접 가르쳐 준 기도문이다. 그 신학적 심오함 또한 팔수록 깊다. 가톨릭 교회는 더 많은 기도들이 성문화 돼 있지만 기독교인들은 사도신경과 주기도문과 십계명을 다 외운다. 그런데 오늘은 색다른 주기도문을 소개하려고 한다.

① “온갖 문제를 짊어지신 채/세속의 보통 사람처럼/오만상을 찌푸리는/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더는 저희를 생각하지 마소서//문제를 해결하지 못해/괴로워하시는 걸 이해합니다./당신께서 세우시는 것을 부수면서/악마가 당신을 괴롭힌다는 것도 압니다.//악마는 당신을 비웃지만/저희는 당신과 함께 눈물 흘리오니/깔깔대는 악마의 웃음소리를 괘념치 마소서//불충한 천사들에 둘러싸여/어딘가에 계시기는 하는 우리 아버지/진심으로 더는 저희 때문에 고통받지 마소서//당신은 아셔야 합니다./신들도 때로는 잘못을 저지르며/저희는 모든 것을 용서한다는 것을.” (니카노르 파라/주님의 기도)

마태복음 6장에서 본보기로 알려주신 주기도문이 있는데 파라의 이 기도문은 치열한 안티정신으로 무장한 엇박자의 기도문이다. 그는 “시만 빼고 모든 게 시”라고 했단다. 기독교 유일신의 하나님은 지고지선(至高至善)하고 무소불능(無所不能)하시다. 그런데 여기서 파라는 “하나님이 지고지선하고 못 하시는 게 없다면, 왜 이렇게 세상이 부조리하고 비참하게 두고 보는가?” 묻고 있다. 신은 지선하지 않거나 전능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신을 원망하거나 비난하는 대신 신과 인간의 자리를 바꾸어 놓는다. 무능한 신이 너무 가엽다고, 다 이해한다고, 모욕적인 발언을 하고 있다. 신들도 때로는 잘못을 저지른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미 신의 무능을 용서했다고 말한다. 전통적인 기독교인으로서는 공감도 수긍도 할 수 없지만, 세상의 많은 사람 중에는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 하나는 참고해야 되겠다.

② “과거는 토굴이었고, 손바닥엔 언제나 더러운 때가 끼어 있었다./이사를 다닐 때마다 친구들의 당돌한 악수가 무서웠다./학교에선 숙제를 안 해온 벌로 손바닥을 맞고/아이들은 입을 가리고 웃는 나를 계집애라고 놀렸다./그 손이 늙은 것이다./쩌릿쩌릿 경련도 오고, 각질이 모래처럼 일어난 손이/남에게 싹싹 빌던, 터져나오는 울음을 막기 위해 입을 가리던/내 손이 곁에 누워 나를 쓰다듬는다./사랑얘기, 때려치운 직장 얘기, 성경책을 찢어버린 얘기도/하고 싶은 눈치였으나 나는 토닥토닥 내 손을 두드린다./이 손으로 남은 생애동안 밥이나 퍼먹다 갈 것이다./손 위에 바지랑대처럼 근심을 괴어 놓고/바람 좋은 날엔 어머니의 헐렁한 속옷이라도 널어야 한다./남은 게 고작 손 하나 뿐이라는 걸 알았을 때/손은 슬며시 반대편 손을 잡아 가슴팍 위에 얌전히 올려놓았다./처음부터 이런 순간을 알고 있었다는 듯/심장이 뛰는 소리, 보일러 도는 소리, 창밖엔 눈이 내리고/눈을 감으면 어둠이 사분사분 속삭이는 소리/나야, 나, 나야.” (최금진/나의 손)

③ “문풍지 우는 겨울밤이면/윗목 물그릇에 살얼음이 어는데/할머니는 이불 속에서 어린 나를 품에 안고/몇 번이고 혼잣말로 중얼거리시네//오늘 밤 장터의 거지들은 괜찮을랑가/소금 창고 옆 문둥이는 얼어 죽지 않을랑가/뒷산에 노루 토끼들은 굶어 죽지 않을랑가//아, 나는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 낭송을 들으며/잠이 들곤 했었네//찬바람아 잠들어라/해야 해야 어서 떠라//한겨울 얇은 이불에도 추운 줄 모르고/웬지 슬픈 노래 속에 눈물을 훔치다가/눈산의 새끼노루처럼 잠이 들곤 했었네.” (박노해/그 겨울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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