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일의 시평] 마경덕 / 신발론

박승일 승인 2024.02.06 14:49 의견 0

2002년 8월 10일
묵은 신발을 한 무더기 내다 버렸다

일기를 쓰다 문득, 내가 신발을 버린 것이 아니라 신발이 나를 버렸다는 생각을 한다 학교와 병원으로 은행과 시장으로, 화장실로, 신발은 맘먹은 대로 나를 끌고 다녔다 어디 한 번이라도 막막한 세상을 맨발로 건넌 적이 있었던가 어쩌면 나를 싣고 파도를 넘어 온 한 척의 배 과적過積으로 선체가 기울어버린. 선주船主인 나는 짐이었으므로,

일기장에 다시 쓴다

짐을 부려놓고 먼 바다로 배들이 떠나갔다


생각해보니 내가 신발을 버린 게 아니라 신발이 나를 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이는 시인의 인식 즉 발상의 전환이다. 단순히 닳고 닳은 신발이 아닌 ‘나’라는 과적 화물을 싣고 다니다 기울어져 버린 한 척의 배 여기에 ‘론(論)’을 붙여 철학으로 재인식한, 이게 시다.

마경덕
<신발론>, <글러브 중독자>, <사물의 입>, <악어의 입속으로 들어가는 밤> 등

저작권자 ⓒ 시사저널 청풍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