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희 작가의 추억의 뜰] 산수(傘壽)를 거친 범부(凡夫)의 짧은 고백

1941년 최성일

김경희 작가 승인 2024.04.08 15:25 의견 0

각혈(咯血)하듯이 살아오지는 않았지만 전쟁과 현대사의 파도를 넘나드는 역사의 소용돌이 한편에 나의 호흡도 품을 더했다. 산업역군으로도 36년의 세월 속에서 작은 이름을 남겼다. 지금 나의 안락한 삶이 세상과 맞선 전리품이 아니기를 바란다. 세상의 무수한 유혹과 탄식들에서 지켜진 나의 삶이 승자가 획득한 전리품이기보다 묵묵히 인생길을 걸어온 凡人의 열매이기를 바란다.

전망 좋은 우리 집에서 바라보이는 저 멀리 강변과 철길을 지나는 열 칸짜리 열차들. 매일 다른 모습으로 우리의 사계는 또 다른 형상을 만들어낸다. 우리는 가을 단풍, 겨울 산, 봄의 매화, 그리고 여름 신록의 시간에 이르기까지 값없이 우리에게 내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탄할 뿐이다.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 당나라 시성 두보(712~770)의 시 ‘곡강이수(曲江二首)’에 나오는 시구절로 인생에서 70세를 산다는 건 드물다는 뜻을 노래했다. 이제 고희(古稀) 산수(傘壽)를 다 거쳐 지금에 이르렀고 ‘오늘’은 여한이 없다.

잔설(殘雪)이 눈길이 가지 않은 길모퉁이에, 산자락 끝에 홀연히 존재를 지키고 있어 우리는 지난겨울의 이야기를 기억한다. 나의 인생도 사계절을 다 지나왔다. 다시 붉은 진달래의 향연으로 호사를 누릴 봄맞이를 할 수 있을지 여부는 하나님만 아시지만 회한도 슬픔도 응어리도 남지 않은 것은 순종의 여정 속에서 살아온 귀한 열매이기도 하다. 이제 여한이 없다는 말을 건네준 앞선 이들의 말의 진위와 깊은 속내를 알 것 같다.

지난 80년의 이야기 중 먼저 학창시절 짧은 추억담 하나 들려드리지요.

1941년 서울에서 5남 2녀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최성일이라는 이름은 항렬에 맞는 돌림자와 첫째라는 의미로 부모님께서 지어주신 이름이지만 돌아보면, 살아오며 겪는 모든 일에 한마음으로 최선을 다해서 사리에 맞게 이루며 살아가라는 뜻으로 생각됩니다. 본관은 경주 최가입니다.

부모님께서는 함경북도에서 태어나 사시다가 해방 이후 내려와 서울에 정착하셨습니다. 함경남도 함흥에서 교직 생활을 하시던 아버님은 대대로 양반인 집안의 상당한 지식인이셨습니다.

특유의 꼿꼿한 성정과 현명함으로 이주 초기의 어려움을 극복하셔서 내가 태어날 즈음에는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편이었습니다. 물론, 모두가 어려운 시절이었으니 상대적이긴 하지요.

방앗간 집, 인정을 허기를 채워주다

직원이 30여 명에 이를 정도로 엄청나게 넓은 쌀 창고를 포함, 꽤 큰 규모의 도정공장(방앗간)을 운영하시던 아버지 덕분에 어린 시절은 남들이 모두 겪는 배고픔과 곤궁함을 겪지 않아도 됐습니다. 사업을 운영하시는 한편으로, 부족한 교육 시설을 대신하는 야학의 선생님으로도 활동하시던 아버님은 주위의 존경을 받으셨습니다. 굶주린 이웃을 모른 체하시지 않았을뿐더러, 지역 사회의 크고 작은 일에 적극적으로 나서 많은 선행과 활동을 베푸시는 어른이셨지요. 그 덕분에 어린 저와 형제들도 별다른 어려움 모르고 자라는 한편, 자연스레 이웃을 생각하는 마음과 배려하며 사는 공동체 정신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자식에게 헌신적인 어머니는 어떻게든 사회에 이바지하는 사람이 되게 하려는 한마음으로 공부를 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1938년생인 큰 누님이 사범학교를 나와 교사 생활을 하셨지요. 그리고 어머니는 당연한 듯, 나에게 두세 개의 도시락을 매일 싸서 들려주셨습니다. 혼자 먹을 수 없는 도시락이었습니다. 점심시간이 되면 보이지 않는 아이, 맹물로 배를 채우기도 하는 친구들의 도시락을 함께 챙겨주신 것이지요. 나 또한 우쭐하지 않고 나눠 먹는 것이 이치이듯이 친구들과 함께 점심을 먹었어요. 남의 자식까지 챙기는 어머니의 깊고 따뜻한 마음은 흉내조차 낼 수 없어 온통 그리움으로 남았습니다.

그런대로 양식 걱정 없는 친구들도 한결같은 꽁보리밥에 신김치 몇 쪽, 어쩌다가 도시락 밑바닥에 아침에 꺼낸 달걀부침 하나 깊숙이 넣어 다니던 시절에 고기반찬, 콩자반 등을 반찬으로 싸 와서 학교 옆 삼층석탑 주위에서 굶기를 밥 먹듯 하는 친구들과 나누어 먹었지요.

지금 생각해도 나름 뿌듯하고 마음 부른 시절이었어요. 인정이 살아있던 시절이라 궁핍한 일상을 겪으면서도 마음이 폐허가 되지 않았습니다. 지금에 비하면 견줄 수 없이 마을은 초라하고 입성과 먹거리 또한 부족한 시절이었지만 친구들을 비롯한 이웃들의 심성은 순박했고요. 하……, 그리운 시절입니다.

스스로 밝히기 좀 뭣하지만, 학교에서 가르치는 모든 과목이 무척 재미있어서 성적도 늘 좋게 나와 집에서도 믿음직한 장남의 싹수가 있다고 칭찬을 받았습니다. 정확하게 바뀌는 계절마다 빛깔과 색감을 바꾸는 자연과 더불어 꿈처럼 어린 시절이 흘러갔지요. 동족 간의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는요.

전쟁의 상흔, 지옥을 엿보다

두말할 필요 없이 전쟁은 무섭고 참혹한 것이었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인 나에게도 당혹스럽고 두렵기만 했으니 제 아래로 연이어 매달린 동생들은 물론이고, 어린 자식들을 건사해야 하는 부모님의 심정은 더 말할 나위 없이 애끓었습니다. 저마다 몸에 지닐 수 있는 살림살이를 이고 지고 문경새재 고개를 넘어 경상북도 화산(의성군)까지 피난길에 올랐습니다.

자산가이며 교육자 출신의 지식인인 아버지께서는 더 멀리 부산으로 혈혈단신 떠나시고요. 모두가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식구 많은 피난 가족의 하루하루는 참으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했습니다.

그야말로 비렁뱅이 신세가 되어 그나마 장남인 제가 동생들을 이끌고 문전걸식을 일삼아 다녀 찬밥 몇 덩이, 나물 한두 가지를 얻어 굶주린 배를 달래가며 3개월 동안의 피난 생활을 하다가 다시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을씨년스러워지긴 했지만, 다행히도 서울 집은 온전해서 다시 발 뻗고 살 수 있었지요.

아버님이 돌아오신 날은 식구들 모두 부둥켜안고 통곡을 했습니다. 돌아가신 아버님이 살아오신 것처럼 감격이 밀려왔습니다. 매일이 살얼음판이라 생과 사를 넘나드는 일상이 먼 이야기가 아닌 그날그날의 숙제였습니다.

여든 넘은 노인의 과거사가 뭔 의미가 있겠냐고 폄하될 수도 있지만 우리의 ‘하루’가 그토록 귀하고 아껴야 한다는 말을 후대에 전해주고 싶습니다. 우리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낸 대한민국, 그래서 좀 더 간절하게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들이 모이기를 바랍니다.

70년 전의 하루가 엊그제처럼 또렷합니다. 살면서 터득한 나 나름의 진리를 다음번에 들려드리고 싶습니다.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우리 노인들이 살면서 체득한 섭리와 이치라 버릴 것이 없습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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