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의 세계관을, 사찰을 넘어 세상 속으로 마이산 탑사(塔寺)주지, 진성(眞聖) 스님

‘이갑룡처사의 정신세계를 잇는 진성 스님의 행보, 갑룡장학재단 설립
봉사 단체 ‘붓다’를 통해 지역주민들과 아름다운 소통‘

김경희 작가 승인 2024.05.08 15:46 의견 0
진성 스님

사양저수지에 반영된 마이산 벚꽃의 장관을 기억하고 있다. 해마다 4월이면 사양저수지에 반영되는 마이산 벚꽃이 감탄을 불러왔는데 올해 봄은 그 장관을 놓쳐 아쉬움만 뒤로 했다. 그 아쉬움을 달래기라도 하듯 마이산을 지키는 탑사의 주지 스님과 상봉했다. 탑사의 영험함과 탑사 돌탑을 쌓아 올린 이갑룡 처사로부터 내려오는 나눔 공덕의 정신세계를 나누며 벚꽃이 펼치는 장관 이상의 보은을 입었다.

불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마이산의 돌탑(자연탑)은 뭇사람들로 하여금 감탄을 불러왔다. 이갑룡 처사의 땀방울들이 모여 한 계단 한 계단 쌓아올려진 그 정신에 감동하고 거센 비바람이 함께 한 무수한 시간 속에서 건재한 자연탑의 힘에 감탄한다. 병풍처럼 드리워진 마이산 품에 안긴 자연탑이 그려놓은 아름다운 풍광에 또 탄복한다.

마이산 돌탑의 발원자, 이갑룡 처사의 정신이 깃든 탑사

마이산 탑사의 종단은 태고종이다. 쉽게 풀어내면 자식을 낳아 대를 이을 수 있는 종단이다. 마이산 탑사의 현 주지 스님은 이갑룡 처사의 4대손이다. 정보가 없던 이들에게는 신비스러운 탑사의 또 다른 이면으로 다가온다. 대물림이 된 터라는 생각에서 머물면 탑사의 존재는 더 신비스럽고 아름답다. 이갑룡 처사는 세인들에게는 마이산 탑사를 쌓아올린 도인(?)으로 인식되기도 했다. 1억 년의 시간을 품은 마이산, 그 아래 무수한 이들의 염원과 수행의 결정체들이 모인 돌멩이로 쌓아올린 신비의 돌탑. 이갑룡 처사는 돌 하나하나를 쌓아올리며 나라의 독립과 백성의 구제를 염원했다. 그 발원의 시발점이 100년의 세월 속에서 오늘의 탑사를 이루었다.

마이산 탑사 창건 축조인 이갑룡 처사

돌탑을 향해 흔히 묻는 질문의 요지는 “탑들이 어떻게 쓰러지지 않고 보존될 수 있을까?”이다. 이갑용 처사가 ‘그저’ 쌓지 않았다는 방증이다. 바람의 각도, 바람이 내려오는 방향, 돌아서 올라가는 방향을 인지하고 돌탑을 쌓았다. 살아있는 과학이며 자연의 섭리가 고스란히 반영된 자연 탑이다.

이미 탑을 쌓은 원리부터 그 정신세계를 가늠할 수 있다. 1917년 완성됐을 당시 국운은 하강하고 민초의 삶은 나락으로 떨어진 형국이었다. 그 어려운 시절을 겪고 발원이 모여 지금의 시대까지 이어졌다. 한 사람의 발원으로 시작된 자연탑의 둔중한 힘이 수만 명의 염원을 담고 시대를 거슬러 왔다. 시멘트 한 점 없이도 돌과 돌 사이는 견고하다. 큰 돌 작은 돌을 켜켜이 쌓아 올려 100년이란 시간을 무색하게 한다. 지난 세월의 낡은 흔적보다 맑은 정기를 뿜어내며 뭇 사람들에게 희망의 통로로 자리 잡았다. 이미 그 정신은 미래로 향하고 있음을 예고한다.

이갑룡 처사가 세상의 유혹을 벗어나 낮에는 돌을 옮기고 어둠이 내려앉으면 돌탑을 쌓은 시간이 30여 년이다. 한 세대를 돌탑을 쌓는 데 인생을 바쳤다. 이갑룡 처사의 ‘돌탑보기를 황금처럼’이라는 명언 속에 돌탑의 존재 의미와 세상을 향한 가르침이 내재되어 있다.

물론 이갑룡 처사가 작정하고 불교에 귀의한 승려는 아니었지만 중생구제와 국운 상승에 간절함을 갖던 그 정신이 모여 자연탑이 생성된 것은 틀림이 없다. 구한말의 격동기를 지나는 그 시대에 힘없는 민초였지만 정신세계는 가히 범접할 수 없는 분이라 생명을 잃어가는 어머니에게 당신의 손가락 피를 수혈하고 어머니를 살렸다. 훗날 상복을 입고 3년간 시묘살이를 하며 끝없는 부모 사랑을 몸으로 실천한 분이다. 그 정신이 중생과 국가로까지 이어져 산신제를 드린 후 모여진 축원금을 독립자금으로 보내는 시대의 선각자였다.

진안 결사대 6·25 전쟁 당시의 기념 사진

이웃을 돕고 쇠락해가는 나라를 살리려는 몸부림은 간절했지만 당신 스스로는 세속적인 안위에서 등을 돌렸다. 25살에 마이산으로 들어가 기도와 수행으로 평생을 보냈다. 1956년 돌아가시기 전까지 20년간 솔잎생식으로 수행했다. 기기묘묘한 자연탑을 쌓은 도인으로 인식되었던 이갑룡 처사는 진정한 애국자요, 중생구제의 바람을 몸으로 실천한 분이었다. 수행의 길도 그 정신에서 비롯됐다.

그 정신을 며느리에게 잇고 며느리는 아들과 손주에게 이었다. 진성 스님이 할머니와 혹한의 눈밭을 기어오르며 산신제에 동행했던 그 기원이 이갑룡 처사의 수행으로부터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100년을 이어온 나눔 공덕의 정신이 지금의 진성 스님의 모태가 되었다. 사찰에서 머물지 않고 세상으로 들어가 봉사와 나눔을 실천하는 진성 스님의 면모가 마이산 탑사의 정신과 닮았다.

할머니와 산신제 길에 오르던 이갑룡 처사의 4대손 ‘재동(진성 스님)’

이갑룡 처사의 며느리인 진성 스님의 할머니는 산신제에 오를 때면 재동(진성 스님)을 앞세웠다. 할머니와 정월 초하루 상봉 기도 때 눈밭을 기어올라 암마이봉 정상에서 남북으로 광목천을 깔고 공양물을 올리고 기도를 올렸는데 그 자리에 진성 스님도 곁을 내었다. 어른 처사들도 한 짐씩 제물 보따리를 이고 지고 거친 숨을 내몰아 쉬며 오르던 길이다. 어린 재동이 그 길을 묵묵히 따르며 성장하는 모습 속에서 할머니는 소리 없이 승려의 길을 예견했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순종하며 할머니를 따라다니던 그 제단이 이제 진성 스님의 발자취로 더 견고해졌다.

할머니와 동행했던 산신제 행이 훗날 승려의 길로 들어설 것이라는 것을 어린 나이에는 확정할 수 없었지만 스님은 결국 탑사를 지키는 4대손이 되었다. 승려의 길이 고행을 동반하지 않는다면 거짓이다. 진성 스님은 1985년 스무 살에 출가를 하게 된다. 고교 시절 클라리넷 연주자가 되고 싶은 꿈을 갖고 있었지만 운명은 스님을 연주 무대에 올려놓지 않았다. 세상에 나가 나누고 베푸는 ‘붓다’의 정신을 공유하는 길에 그를 세웠다.

혜명 스님(진성 스님의 아버지)은 청년 재동을 정읍 다천사(茶泉寺)로 보낸다. 당시 운명처럼 혜명 스님도 ‘재동’도 인생의 나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혜명 스님은 시한부 임 선고를 받았고 ‘재동’은 손가락을 다치며 클라리넷 연주가의 길이 무산되었다. 승려의 길을 권면하는 혜명 스님의 부탁을 거절할 명문을 찾을 도리가 없었다. 1985년 스무 살의 나이에 ‘진성(眞聖)’이라는 법명으로 승려의 길에 들어섰다.

유년시절부터 작은 손으로 탑사의 이런저런 일들에 손을 보태던 경험은 갖고 있지만 다천사에서의 수행은 녹녹하지 않았다. 세상의 허무와 무상이 빚은 번뇌를 극복하고자 걸은 수행의 길이었다면 받아들이는 과정이 조금은 수월하지 않았을까. 아버지가 권면한 출가가 주는 중압감부터 정체성을 회복하기까지 그 또한 고행의 시간이었다.

몸으로 맞서야 하는 힘겨움은 오히려 견디기 수월했지만 정신적인 고뇌는 시간을 담보로 하는 여정이라 피 끓는 청년에게는 가혹한 시간이었다.

그 몸부림이 지금의 진성 스님을 낳았다. 탑사의 주지 스님이라는 선입견이 나이 지긋한 고승(高僧)을 연상하게 하지만 동자승의 해맑은 눈웃음을 잃지 않은 진성 스님의 면모는 이미 청년 시절 수행한 그 시간에서 건져 올린 자애로움이었다.

탑사를 찾는 불자들만을 위한 기도만으로도 스님의 24시간은 턱없이 모자란다. 그럼에도불구하고 이갑룡 처사의 정신을 이은 스님의 중생구제는 세상 깊숙이 들어와 부처님의 자비를 이웃들과 나누고 있다.

나눔 공덕 봉사 단체 ‘붓다’를 통해 지역주민들과 아름다운 소통

2011년 탑사 주지를 맡았지만 붓다의 정신을 사찰을 넘어 세상 속에서 펼치게 된다. 지역주민과의 소통을 통해 붓다의 정신을 생활 속으로 옮겨왔다. 단순히 ‘포교’에 목적을 두지 않았기에 세상과 호흡하려는 진심은 바로 관통했다. 나눔 공덕은 지역을 넘어 해외로까지 전파되었다.

매년 어르신 생신상 차려 드리기, 백미·연탄나눔, 홍삼 고추장·김장축제를 열어 지역주민들과 붓다의 정신세계를 나누고 있다. 스님은 2013년에 한 시절의 꿈이었던 클라리넷 연주 대신 색소폰을 연주하며 탑사 음악봉사단 ‘탑밴드(Top Band)’도 창단했다. 정신적인 고통을 받고 있는 신도들에게 악기 연주는 훌륭한 치유 방편이 되었다. 난타와 색소폰을 가르치며 치유의 힘을 나누었다. 탑밴드는 작은 공연도 해낼 정도로 역량을 키웠고 전북지역 군부대·양로원에서 위문공연을 하고 산사음악회에도 출연하고 있다. 2010년에 구호단체 (사)나누우리 설립을 이끈 스님은 봉사단장을 맡아 해외 아이티 지진피해 복구, 라오스 초등학교 교사(校舍) 건립, 캄보디아 우물관정, 베트남 식수대 설치, 사할린 영구귀국 동포 돕기 등의 국제구호 활동도 활발하게 진행하고 있다. 종교지도자 그 이상의 사회 활동가로 역할의 범위를 넓혔다.

그 외에도 2003년부터 사형수 옥바라지를 하며 전주교도소 교정협의회장과 귀휴심사위원, 법무부 교정중앙협의회 불교분과위원장을 맡아 교정교화에 불심의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2007년 전주교도소 교정협의회에서 교정 활동을 시작한 후 헌신적인 교정교화 활동을 펼쳐왔다. 연인원 2만 명에 육박하는 재소자들의 수형생활에 도움을 주는 한편 일대일 멘토링과 자매결연을 통해 500여 명에 이르는 재소자들이 새로운 삶을 찾을 수 있도록 물심양면 지원도 아끼지 않고 있다.

부처님의 정신과 사회 활동을 통해 얻은 가치 인식의 결실은 봉사가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밑거름이 된다는 확신이었다.

1994년부터 운영해온 ‘갑룡장학회’의 시작은 21년부터 진안군진원봉사센터 이사장직을 맡고 운영하며 지역의 성적우수 학생에게 장학금을 전달했다. 2014년부터 그 폭을 넓혀 진안군 자원봉사센터와 업무협약을 맺고 봉사 잘하는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전달한다. 많은 학생들이 봉사의 가치를 체득할 수 있는 선의의 통로가 되었다. 봉사우수 장학금 전환 후 성수면봉사단, 주천면봉사단, 마령면봉사단, 재난자원봉사단, 사랑의열매봉사단 등이 진안 전역에서 새롭게 만들어지고 미약한 곳은 활력을 찾기 시작했다. 그 결과 2018년에는 연간 자원봉사 참여자가 2만7000명을 넘어섰다. 진안군의 인구 2만6000명을 상회하며 기염을 토했다. 진안군자원봉사센터가 2017년 2018년 행정안전부 주관 자원봉사대상 대통령표창을 연이어 수상하며 ‘한국의 자원봉사 성지는 진안’이라는 타이틀을 획득했다. 사찰과 주민단체의 훈훈한 연대로 이룬 쾌거는 지역사회 봉사활동의 새 지평을 열며 ‘봉사’의 품격을 올려놓았다.

중앙 이갑룡, 오른쪽 아이, 소승의 아버지 이왕선 혜명 스님, 일제시대 천지기도 후 찾아왔다 다녀간, 만주로 보내지는 독립자금 전달책들
열반 1년 전 천지탑 오른 계단에 앉아 있는 이갑룡 할아버지

이갑룡 처사의 정신세계를 잇는 진성 스님의 행보에 주목할 때

진성 스님의 여정을 들여다보면 수행의 환경에 놓였던 유년과 청년기 이후 수행자로 고행의 길을 걸었다. 탑사 대웅전 지하에서 만 6년을 보내며 자문했다. ‘진성 ’스님의 이름이 수행자로 남을 것인지, 보살의 길을 걸을 것인지…….

두 길이 외연은 다를 수 있지만 그 길의 처음과 끝은 닮아 있다. 이갑룡 처사가 구현하고자 했던 ‘억조창생 구제’를 불법(佛法)의 힘으로 성취하겠다는 의지다. 모든 생명은 행복할 권리가 있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세상 속에서 구현하는 것이다. 모든 생명은 존귀하고 행복해야 한다.

이 세상 사람 모두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일생 동안 탑을 쌓은 이갑룡 처사. 그 정신을 잇는 진성 스님. 뭇사람들에게 마이산의 돌탑과 탑사는 경이로운 자연의 경관을 간직한 사찰로 인식되었지만 구도와 정진이 100여 년에 이르는 수행의 장이다. 한 사람의 정신과 실행이 100여 년의 세월 속에서 발휘한 힘을 진성 스님의 행보에서 읽어낼 수 있다.

진성 스님

동자승의 해맑은 미소를 잃지 않은 진성 스님의 발원이 우리 사회에 새로운 지평을 열 것은 자명하다. ‘포교’만을 위한 공덕이 아닌 인류애에 바탕을 둔 스님의 나눔 봉사 실천이 폐허가 되어가는 우리 세대의 정신세계에 작은 염원의 탑 하나를 또 쌓아 줄 것이다.

우리는 세상에 나와 손잡아주는 스님의 손길이 필요한 시절을 지나고 있다.

지금, 사찰 울타리 안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두지 않고 세상 밖으로 나와 ‘사람’들과 연대를 이루며 따듯한 세상 만들기에 기여하는 진성 스님의 행보에 주목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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