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희 작가의 추억의 뜰] 1940년생 김성수

자연과 더 긴밀해지는 시간 앞에 서다

김경희 작가 승인 2024.05.10 14:10 의견 0
1940년생 김성수

내 인생 마지막 해외 여행지는 대만이 되었다. 2023년 10월에 대만 타이루거 협곡에 무사히 다녀오면서 해외여행은 마침표를 찍었다. 더 이상 장시간 비행기에 앉아 물맛, 입맛 다른 곳에서 여유 있게 즐길 수 있는 컨디션과 체력이 아니다. ‘걸을 수 있을 때 여행 다녀라.’라는 말의 의미를 이제야 알 것 같다. 50보만 걸어도 숨이 차는 그 시절을 나도 만나고 말았다. 돌아보면 인생은 이미 끝이 결정됐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 해석은 우리가 산을 보면서 숲만 바라보는 자세다. 나무 한 그루 한 그루가 잘 성장해야 숲이 튼튼하고 보기도 좋은 것은 거론의 여지가 없다. 그래서 85년도 귀하지만 하루하루가 더 거룩한 시간이다.

대자연 앞에서 작은 나의 존재를 발견하다

꿈에 그리던 그랜드캐니언은 다음 생에 가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한창 일할 나이에는 자식 키우고 살림 일구느라 꿈에만 그리던 곳들, 은퇴하고 이것저것 정리하면서 다음에 다음에 하다 보니 정작 때가 왔을 때는 다리가 후들거려 갈 수가 없다. ‘버나드 쇼’의 묘비명 번역 글이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해학적인 묘비명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대만 협곡은 거두절미, 심산유곡이라는 말로 정의할 수 있는 곳이다. 깊은 산은 그윽한 물을 품고 있었다. 깎아지른 듯한 절벽 아래 좁디좁은 대리석 협곡이 자로 잰 듯이 서 있었다. 수만 년에 걸쳐 물과 바람의 힘만으로 이토록 가파르고 좁은 협곡이 탄생했다. 그 시간의 폭과 길이를 짐작하기도 어렵다. 길어야 100년을 사는 우리로서는 가늠조차 되지 않는 아득한 시간이다. 경이로운 협곡 앞에서 수천, 수만 년의 시간을 떠올리며 한없이 작아지는 나를 발견했다. 사람은 바닥으로 내려가 봐야 나를 투명하게 들여다볼 수 있고 요동치지 않는 자연 앞에 서봐야 우리가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 깨닫고 교만한 태도를 반성할 수 있다. 그래서 인류가 말하는 수많은 진리 중에 ‘세상은 공짜가 없다’와 ‘자연은 위대하다’라는 말이 양대 산맥을 이룬다고 생각한다.

보행기 타던 갓난쟁이가 40대 중반이 되었다

우연을 가장한 필연, 인생의 만남들

우리 부부는 서울에서 살다가 딸아이 육아를 돕느라 세종에 내려왔다. 세종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하는 딸, 대전에서 학교 교사로 근무하는 사위. 맞벌이 부부의 고단함을 방관할 수만은 없어서 나이 든 우리가 보탬이 되려나 하는 마음에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세종에 내려왔다. 세종과 대전을 놓고 정주지를 선택하느라 고민하는 시간도 있었지만 10여 년 전 근교 벚꽃길을 지나며 아내는 세종으로 정주지를 정했다. 누군가 마지막 여생을 보낼 터전을 고르는데 성의가 없다고 훈수 둘 수 있겠지만 어쩌면 우리 인생은 다분히 즉흥적이고 우연에 바탕을 두고 있다. 심사숙고가 반드시 인생 전반에 통용되는 이치는 아니다. ‘운명’이라는 정해진 액자 안에서 각자의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 부부의 처음 만남 또한 우연처럼 다가왔다. 나는 수원 사람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공무원 생활을 하고 있었다. 주말이면 남산을 오르내리는 게 썩 좋은 낙이었는데 어느 날 마음에 드는 아가씨를 발견했다. 무더운 여름날 레이스가 살랑거리는 분홍색 양산을 들고 걸어가는 뒷모습을 처음 보았고 얼굴이 궁금해 잰걸음으로 그녀 앞을 앞질러 걸었다. 힐끗 쳐다보니 소박하지만 깔끔하고 영리해 보이는 인상이 마음에 쏙 들었다. 이후로 그녀와 남산 산책길에 말없이 눈인사를 여러 번 했다.

아내는 나팔바지에 블라우스를 입고 작은 핸드백을 어깨에 메고 있었다. 머리는 고슬고슬 말아 올려 제법 멋쟁이였다. 용기 내서 말을 걸고 아내도 내가 싫지 않았든지 거절하지 않았다. 누군가가 나에게

“두 분은 어떻게 만나셨어요?”

라고 물으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오다가다 만났어요.”

라고 한다.

상대방은 웃어넘기지만, 틀린 말이 아니다. 정식으로 매파가 중신을 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서 조금 벗어나면 우리는 다들 ‘오다가다’ 만나는 것이다. 우리 인생 자체가 우연의 모습으로 찾아와 필연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여자와 남자라는 이름으로 ‘차별’하던 혹독한 시절

결혼할 당시 내 나이 29살, 아내 나이 23살이었다. 책 읽는 것을 너무 좋아하는 아내에게 결혼 프러포즈 선물로 셰익스피어 전집을 사주었던 기억이 희미하게 남아있다. 책 읽기를 좋아하는 아내와 결혼하고 근 40년을 독서 한번 제대로 못 하게 만들었다.

외손주들 봐주느라 세종에 내려와서 살면서 그나마 몸은 힘들어도 마음이 평화로운지 아내의 손에서 책이 떠나지 않는다. 결혼하고 열세 식구를 건사했던 아내. 명동 한복판에서 한눈에 눈에 띄던 그 곱던 아내가 이제 열 손가락 모두 전류가 흐르는 것 같다면서 고통을 호소한다. 50년의 세월 속에서 아내의 몸은 부서졌다. 그 마음이 나에게도 전달되지만 고맙고 미안하다는 말 외에는 달리 위로의 말이 없어 내가 몹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내는 시집오자마자 시할머니 병시중을 시작으로 시누들 다 시집보내고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다. 공무원이 나도 박봉에 근근이 살아가다 보니 뾰족한 수가 없어서 때론 삶이 너무 피폐하기도 했다. 아이들 4남매가 착하고 반듯해서 우리 부부에게 기쁨이 되기도 했다. 지나고 보면 그리운 추억으로 남지만 당시를 지날 때는 인생과 힘겨운 싸움을 해야 한다. 결국 승전고를 울렸으니 지금 여기에 와 있겠지만 우리의 삶은 필시 전쟁터와 다르지 않다. 매 순간 무언가를 선택하기 위해 고민해야 하고 매일 같은 일을 반복하고 표시도 나지 않지만 또 다음날 그 일을 해야 한다. 그게 인생이라고 말하면 좀 서글프려나?

인생의 말미에 ‘세종’이라는 친구가 가르쳐준 이치

75년을 수원과 서울에서 살다가 세종에 내려와서 그것도 외손주 육아를 돕는 생활 했으니 아내나 나나 답답한 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손녀들 크는 재미에 힘든 것도 모른 채 오늘까지 왔다. 이제 우리 손길이 크게 필요하지 않은 10살, 12살 귀염둥이들. 결국 우리 부부가 살면서 이룬 열매들이 몇 개 있다면 그중 으뜸은 손녀들의 성장이다.

한 아이가 성장하는 데에는 온 마을이 힘을 보탠다는 아프리카 속담도 있지만 온 마을은 아니어도 할머니 할아버지의 10년의 세월도 보탬이 되었다. 자랑이나 보답을 원하는 것이 아닌 자연의 이치라고 할까. 우리가 생명을 불어넣은 존재에 대한 책임감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10년 전 아는 사람 한 명도 없을 때 만난 나와 처지가 비슷한 서울내기 귀촌자가 있었다. 나보다 두 살 아래였지만 벗으로 지내면서 적적함도 달래고 일상의 희로애락도 같이 나눴는데 건강하던 그이가 2년 전에 먼저 떠나면서 상실감이 아주 컸다. 매일 등산을 다니던 이가 대장암으로 2년간 투병하고 결국 뼈만 남은 몸을 나에게 보이고 숨을 거두었다. 눈물이 앞을 가렸던 마음의 근원지를 찾아보니 의지할 친구가 먼저 떠났다는 슬픔도 컸지만 ‘아 이렇게 누구나 죽는구나’라는 상실감이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형제들이 먼저 저승의 강으로 건너가는 일들을 겪었지만, 벗의 죽음이 주는 상실감을 치유하는 데 제법 시간이 필요했다.

아마도 일상을 공유했던 존재가 사라지는 상실감이 생각보다 컸다. 그렇다면 아내가 먼저 떠난다면 이라는 가정을 해보면서 전율이 왔다. 데이트를 시작하면서 설렜던 마음이 ‘사랑’이었다면 지금은 ‘사랑’이라는 이름의 감정은 사그라들고 전우라고 부르고 싶다. 전쟁터에서 같이 살아남은 전우, 공무원 박봉으로 열 식구가 넘는 가족을 건사하고 가내수공업 부업거리가 있으면 마다하지 않았던 아내, 나는 촌놈이 출세 한 번 해보겠다고 승진에만 몰두하고 가정은 아내에게 턱 하니 맡겨놓고 남의 집 일처럼 방관했었다.

야속할 텐데도 무심히 나를 인정해 주고 ‘내 꼴을 봐주던’ 아내가 그저 고맙기만 하다. 그런 아내가 먼저 내 곁을 떠난다면? 아마도 팔 한쪽을 잃어버린 상실감보다 더 큰 상실감이 밀려와서 내 삶의 질은 바닥으로 곤두박질칠 것이 분명하다.

친구의 죽음을 통해 반면교사 했던 이치는 바로 ‘있을 때 잘해.’라는 세대를 넘나드는 한 줄 명문이다. 일상을 공유했던 친구의 죽음을 통해 얻은 섭리와 이치가 세종에서 얻은 큰 가르침이다. 손녀들의 성장을 보면서 우리가 내려놓았던 많은 것들이 어린 새싹들이 성장하는 자양분이 된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또 한 세대가 가고 다시 한 세대가 오는 자연의 섭리에 우리 부부가 일조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여정이 얼마나 될지 알 수는 없지만 비록 몸은 쇠락해도 당당하게 살았다는 자부심 하나만으로도 서글프지 않다.

세종을 정주지로 선택하게 한 집 근교 저수지의 벚꽃

이제 자연과 더 긴밀해지는 시간 앞에 서다

눈앞에 파리가 왔다 갔다 하는 비문증이 심해져서 신문도 책도 읽기 어려운 때를 맞이했다. 그저 아내가 끓여주는 순두부찌개를 먹고 집 주변을 산책하면서 계절이 지나는 길목을 목격하는 일이 가장 소중하다. 내년에도 우리 동네 벚꽃을 볼 수 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자연과 친구가 되는 시간을 기다리는 지금의 마음이 잔잔한 호수처럼 평화롭다. 봄이 사라지고 있는 시대, 4계절을 모두 즐겨본 세대라는 것도 우리가 받은 축복이다. 지금 나의 몸은 겨울이지만 마음은 봄이다. 자연과 더 긴밀해지는 시간을 보내는 지금이 나의 가장 따뜻한 봄으로 기억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범부(凡夫)의 욕심으로 치부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저작권자 ⓒ 시사저널 청풍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