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일의 시평] 둥근 발작 / 조말선

박승일 승인 2024.06.10 15:55 의견 0

사과 묘목을 심기 전에

굵은 철사줄과 말뚝으로 분위기를 장악하십시오

흰 사과꽃이 흩날리는 자유와

억압의 이중구조 안에서 신경증적인 열매가 맺힐 것입니다

곁가지가 뻗으면 반드시 철사 줄에 동여매세요

자기성향에 굳어지기 전에 굴종을 주입하세요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성장억제입니다

원예가의 눈높이 이상은 금물입니다

나를 닮도록 강요하세요

나무에서 인간으로 퇴화시키세요

안 된다 안 된다 안 된다 부정하세요

단단한 돌처럼 사과가 주렁주렁 열릴 것입니다

하지 마 하지 마 하지 마 억누르세요

빰이 벌겋게 달아오를 것입니다

극심한 일교차가 당도를 결정한다면

극심한 감정교차는 빛깔을 결정합니다

폭염에는 모차르트를

우기에는 쇼스타코비치를 권합니다

한 가지 감상이 깊어지지 않도록 경계하세요

나른한 태양, 출중한 달빛, 잎을 들까부는 미풍

양질의 폭식은 품질을 저하시키는 원인 입니다

위로 뻗을 때마다 쾅쾅 말뚝을 박으세요

열매가 풍성하도록 꽁꽁 철사 줄에 동여매세요

자유와 억압의 이중구조 안에서 둥근 발작을 유도하세요


누군가 내 몸에서 자유를 떼 간 듯 몸이 자유롭지 않다. 그리하여 억압 이중구조 철사줄 굴종의 굴레 안에서 나는 기어코 발작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것도 유머러스하게.

좋은 길 봐두고 자갈길 걷는, 곧 죽어도 반항하는 이게 시인의 심보다. 하여 조말선은 명령 같으나 명령 같지 않은 문장으로 부조리한 세상을 비난하는 동시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조말선
<매우 가벼운 담론>, <둥근 발작>

저작권자 ⓒ 시사저널 청풍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