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기 칼럼]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이창기 총재 승인 2024.06.11 16:16 의견 0

옛말에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사람이 동물과 다른 것은 각자의 이름이 있고 그 이름에 걸맞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죽어서 악명을 떨치거나 오명을 남겨서는 안 된다는 경고의 성격도 담겨있다. 후손들이 부끄러워하는 선조의 이름으로 기억된다면 차라리 다른 사람들의 기억에 남지 않는 필부의 이름이 후손들에게는 더 나을 수도 있다. 그래서 이름대로 살고 이름값을 하며 살아야 한다.

사람은 태어나면 저마다 이름을 부여받는다. 이름은 개개인을 식별하기 위해 사용되는 문자의 조합이다. 이름이 부여됨으로써 그 사람의 정체성이 확립되는 것이다. 그래서 집안에 아기가 태어나면 요즘은 부모들이 직접 작명을 하기도 하지만 옛날에 작명은 할아버지의 몫이었다. 심지어 이름이 그 사람의 길흉화복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여겨 작명소를 찾아가 거금을 투자하기도 했다. 대부분 사주팔자와 연계해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주는 방식으로 이름을 지어 주었는데 요즘은 성명학이라는 게 등장해 획수나 파동으로 이름을 짓기도 한다. 물론 부르기 쉽고 듣기 좋은 이름이 좋은 이름이기도 하나 세상을 살다가 일이 꼬이면 이름을 바꾸기도 한다. 그만큼 이름의 뜻을 중요하게 여기며 이름대로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좋은 뜻을 지닌 이름을 선호한다. 상품도 네이밍이 매출을 좌우하듯 하물며 사람의 이름이야 말할 필요도 없다. 필자의 이름은 한자로 보면 ‘밝을 창(昶)’에 ‘터 기(基)’라 항상 밝은 터전을 만드는 존재라는 좋은 뜻을 지녔다. 그런데 단어로 보면 노래하는 기생이라는 의미도 있어 가끔 놀림의 대상이 되기도 해서 나의 이름은 이중성을 띠었다고 여겨왔다. 이처럼 이중성을 띤 이름을 지녔을 경우, 그래도 조상이 지어 준 이름을 함부로 바꿀 수는 없는 일이라 아호를 따로 지어 결점을 보완하기도 한다. 필자도 호가 있다. 대학기자 시절 후배기자가 석린(石麟)이라는 꽤 어려운 한자로 호를 지어 왔었다. 그 뜻을 풀이하길 ‘선배는 항상 먼저 남을 배려하고 희생하는 모습이 마치 산바위가 온갖 풍상을 겪으며 자신의 비늘을 서서히 내어 놓아 황토로 바뀌는 모습을 닮았다.’며 돌비늘이라고 호를 지었다는 것이다. 결국에는 바위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게 될 운명이지만 말이다. 재미있는 것은 천주교에 입교했을 때 세례명을 대개는 대부가 선정해준다. 그런데 안내역을 맡았던 후배교수가 ‘바르나바’라는 세례명을 들고 왔었다. 바르나바 성인은 보통의 신자들은 잘 모르지만 신부님이나 천주교에 조예가 깊은 신자들은 존경하는 성인 중에 한 분이다. 바르나바 성인은 AD 1세기에 전교가 어려웠던 시절, 자신의 전 재산을 기부하면서 자기보다 더 훌륭한 바울로사도를 도와 교회의 반석을 다지는데 크게 기여한 성인이었다. 그는 궂은일을 도맡아 헌신하고 희생하면서도 자신의 공을 드러내지 않는 겸손한 자세를 견지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후배는 나의 모습에서도 비슷함을 보았기에 세례명을 바르나바로 선정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나의 일생은 석린처럼 내 것을 끊임없이 내어주고 바르나바 성인처럼 앞에 나서기 보다는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을 빛내주기 위해 헌신해왔던 삶의 연속이었던 것 같다. 그러다보니 적지 않은 손해를 감수할 때가 많았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손해를 보아야 누군가 이익을 보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나 자신을 위로해왔다. 물론 이러한 나의 배려와 헌신을 당연히 여기는 이기적인 사람들 때문에 배신감도 들었지만……. 이처럼 이기적이기보다는 이타적인 삶을 살다보면 가장 피해를 보는 사람들은 가까운 가족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늘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가득하다. 그러나 어차피 인생에 정답이 있는 게 아닌 만큼 아호대로 살다보면 주변 사람들에게 이타적인 사람으로 기억되는 것이 가족들에게도 보람 있는 삶으로 비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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